엘키 밸리 포도밭은 신이 내린 선물이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라틴아메리카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칠레 출신 문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남긴 시구(詩句)다. 그가 자란 엘키 밸리는 칠레 피스코 문화의 심장부다. 어린 시절 그의 눈에 비친 포도밭은 ‘달빛을 머금은 에메랄드’였다. 그는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피스코를 ‘안데스 산맥 영혼을 담은 물방울’이라고 묘사했다.
오늘날 가브리엘라의 고향에서 피스코는 새 도전에 직면했다. 살아남은 증류소들은 이제 기후변화·인력난·원가 압박이라는 삼중고와 싸우고 있다.
30일 칠레 농축산청(SAG)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엘키·리마리 밸리 평균 기온은 1.5도 상승했다. 반면 봄철 강수량은 35% 감소했다. 햇볕은 뜨거워지고, 이를 잠재울 비가 잦아들면서 2023년 포도 수확량은 2019년보다 25% 줄었다.
피스코용 포도 재배 면적도 2000년 대비 20% 줄었다. 유엔 중남미경제위원회(CEPAL)는 2030년까지 현재 재배지 중 최대 40%가 피스코 포도 재배 부적합 지역이 될 것으로 전망했다.
후안 카를로스 무뇨스 칠레 농업연구원 기후변화팀장은 지난해 12월 산티아고 기후 정상회의에서 “기후변화가 피스코용 포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며 “엘키 밸리 저지대는 이미 한계점에 도달했고, 온도 차이가 높은 고도 1200미터 이상 지역으로 포도밭을 이전하지 않으면 피스코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
원가 상승 문제도 심각하다. 칠레주류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3년간 유리병 가격은 65%, 포도 수매 가격은 40% 상승했다. 물류비용은 2019년 대비 2배 이상 증가했다.
칠레 정부는 이런 위기 속에서 새 활로를 찾고 있다. 2018년부터 피스코 산업 발전 전략(Programa Estratégico Pisco Spirit)을 통해 보호에 나섰다. 칠레산업진흥청(Chilean Economic Development Agency·CORFO)을 통해 저금리 대출과 기술 혁신 지원금을 제공하고, 엘키 밸리와 리마리 밸리의 포도 재배 농가들을 대상으로 관개 시설 현대화 지원, 기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 시장은 아시아권 피스코 수출 교두보가 될 전망이다. 세계적인 주류시장조사기관 IWSR에 따르면 국내 수입 증류주 시장은 2023년 기준 전년 대비 22% 성장했다. 특히 칠레 와인이 국내 시장에서 쓴 성공 신화는 피스코가 품은 가능성을 보여준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2023년 칠레 와인 수입액은 1억 달러를 돌파했다. 2018년 대비 195% 증가한 수치다.
코큄보 피스코협회 관계자는 “칠레 와인이 한국 시장에서 거둔 성공은 피스코에도 좋은 징조”라며 “같은 토양과 환경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피스코 역시 한국인 입맛에 잘 맞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와 국내 와인 시장 점유율 1위(18%)를 다투는 칠레산 와인은 이미 검증된 유통망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한-칠레 FTA로 인한 무관세 혜택까지 누릴 수 있다.
칠레 정부는 한국 시장 공략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수립했다. 칠레대사관 무역대표부 자료에 따르면 2024년부터 3년간 단계별 진출 전략을 추진한다. 1단계는 주요 도시 바텐더 대상 교육(2024~2025년), 2단계는 유통채널 확대(2025~2026년), 3단계는 대중 마케팅 강화(2026~2027년) 단계다.
칠레수출진흥청 관계자는 “한국은 단순한 수출 시장이 아닌 문화적 교류의 장이 될 것”이라며 “초기 단계인만큼 구체적인 판매량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스코를 통해 두 나라가 가진 식문화가 어우러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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