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이 지난해 9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북한을 ‘사실상의 핵보유국(a de facto nuclear weapon possessor state)’이라 밝혀 파장이 일었다.
그로시 사무총장은 전 세계 핵 사용을 통제하는 IAEA의 수장이다. 그런 그의 입에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무너뜨리는 발언이 터져 나왔으니 후폭풍이 클 수밖에 없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2기 정부의 첫 국방장관 지명자인 피트 헤그세스도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상원 군사위원회에 제출한 서면 답변을 통해 북한을 ‘핵능력 보유국(nuclear power)’이라고 칭했다. 지난 25일 그는 세계 제1위의 국방력을 지휘하는 국방장관에 올랐다.
여기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첫날 북한 김정은을 언급하며 “사람들은 그를 엄청난 위협으로 봤고 이제 그는 핵무기를 갖고 있는 세력(nuclear power)”이라고 했다. 돌출 발언과 즉흥적인 행동으로 유명한 트럼프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어찌됐건 그는 미군(美軍)의 최고 통수권자이다.
‘핵능력 보유국(nuclear power)’이란 말은 비공식적으로 핵무기 기술을 보유하거나 활용하는 국가를 포함하는 통상적인 개념으로 쓰인다. 공식적으로 핵보유국을 인정하는 정확한 표현은 ‘핵무기 보유국(Nuclear Weapon State)’이다. 구속력 있는 국제 협약인 핵확산금지조약(NPT)에 따라 핵무기의 제조와 운용 기술을 보유했다고 인정받는 미국·러시아·중국·프랑스 등이 이에 속한다.
북한의 핵 능력을 인정하는 듯한 국제사회의 발언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8년 조지 부시 정부 당시 미 국방부 산하 합동전력사령부(USJFCOM)가 발간한 ‘2008 합동작전 환경보고서(The Joint Operation Environment 2008)’는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표기했다. 보고서는 태평양과 인도양 지역의 안보 환경 전망에서 “아시아 대륙에는 이미 5개 핵보유국이 있다”면서 ‘중국·인도·파키스탄·북한·러시아’를 영문 첫 글자 순서에 따라 나열한 바 있다.
이런 과거의 일들을 살펴봤을 때 최근 일련의 북한에 대한 ‘핵보유국 발언’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렇기에 확대 해석을 경계하며 한반도의 비핵화를 향한 고삐만을 더욱 옭아매면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종전 국제사회의 방침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주의 깊게 살펴볼 일이다.
소위 ‘고삐론’만 주장하다가 유엔 등의 국제사회가 현실적인 접근을 내세우는데 공조하지 못해 약화하는 대북제재를 바로잡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을 합법적인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는 순간 유엔이나 독자적인 제재를 하던 국가들의 노력이 무력화되고 이는 북한이 바라는 시나리오이다.
북핵을 두고 새판을 짜야 한다면 핵에 있어서도 남북 간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비핵화 원칙이 흔들린다면 당연히 수정된 안보전략의 복안이 있어야 한다. 핵 추진 잠수함의 도입이나 전술핵 배치를 통한 억지력도 방법일 수 있다.
우리 정부는 그간 북한 비핵화 목표에 대해 국제사회와 ‘확고하고 일치된’ 입장이라고 누차 강조해 왔다. 확고는 하나 일치되지 않는 입장이라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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