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작동 방해는 내란 아닌가?
국가원수를 군사작전 하듯 체포
고대 속에 잠든 ‘아고라’는 또 뭔지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가장 힘겹지만 새로운 세상을 목도할 9부 능선을 지나고 있다. 함께 힘을 모아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2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는 글이다(아마 경어체로 썼겠지만 신문기사에는 평어체로 인용돼 있다). 아주 궁금한 것은 이 대표가 인식하고 있는 혹은 희망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주 궁금하다. 윤석열 대통령을 ‘내란수괴’로 몰아대는데 성공했으니 ‘9부 능선’은 넘어섰다는 뜻인가?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은 창피해서라도 안 할 것 같은데 기어이 쓰고 마는 그 심사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말하더니 이 대표는 ‘새로운 세상’인가?
또 상기시켜야 하는 게 끔찍한 노릇이지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022년 6월 인천 계양을 선거구에서 보궐선거로 당선된 이재명 의원이 그해 8월 민주당 대표직까지 차지한 다음 시작된 고위공직자 탄핵소추 공세는 기총소사 혹은 융단폭격에 비견될만하다. 그가 당 대표직에 오른 후 민주당이 발의한 탄핵소추안이 29건(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에 이르렀다. 특검발의 건수도 만만찮다. 같은 기간 민주당이 발의한 특검안은 20건이었다.
정부 작동 방해는 내란 아닌가?
예산안심의에서도 거대 정당의 힘 과시 행태는 유감없이 발휘됐다. 대통령실 특활비, 검찰 특경비 및 특활비, 감사원 특경비 및 특활비, 경찰 특활비 및 치안활동비, 화물노동자 휴게소 건설비 등은 전액 삭감했다.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동해 심해 가스전 개발(대왕고래 프로젝트)을 위한 정부 편성예산 505억원을 8억원으로 줄였다. 청년 일자리 육성 사업예산도 23억 1500만원을 8억원으로 깎았다. 이 밖에도 수소충전소 구축 45억원→31억 5000만원, 아이돌봄 수당 등 사업 4230억 3800만원→3846억 3800만원, 전공의 지원 사업 3678억원→2747억원, 예비비(긴급예산) 4조 8000억원→2조 4000억원 등 칼질 솜씨를 자랑했다. 반면에 공수처 예산, 신재생 에너지 사업 예산 등은 대폭 늘렸다.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탄핵소추, 특검, 예산심의 등은 국회의 정부에 대한 견제 수단이지만 민주당의 경우는 도를 넘어도 너무 넘었다. 정부의 기능을 마비시키겠다고 작정한 인상이 뚜렷하다. 절대다수 의석을 내세워 입법권, 예산심의권을, 그들이 즐겨 하는 말로 ‘농단’한 것이다. 그 배경에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 해소 또는 완화와 차기 대선 당선’이라는 민주당의 목표가 있을 것이다. 당 대표 한 사람(그들은 ‘당의 아버지’, ‘신의 사제’라고도 부르는 모양이지만)을 위해 국가의 작동 자체를 멈춰버리게 할 기세다(이런 것은 내란죄의 범주에 들지 않는 것인지 법률전문가가 아니어서 판단하기 어렵다).
이 같은 거대정당의 횡포에 대해 대통령이 대응할 수단은 거의 없다. 중대 범법 혐의자가 버젓이 활개를 칠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가운명을 좌우할 듯이 설치는 상황을 속수무책으로 보기만 해야 하는 게 대통령의 처지다. 그냥 당하고만 있으면 정부와 주요공직사회는 일손을 놓아야 한다(비 오듯 쏟아지는 탄핵소추와 특검의 총탄을 피하기에도 정신없는데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국회의 정부 견제기능은 과도하게 부풀려 놓고, 정부의 대응 수단은 거의 남겨 놓지 않았던 게 이른바 ‘87 헌정체제’다. 이렇게 까지 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의원내각제로 권력구조를 바꿨어야 하는 것 아닌가?
국가원수를 군사작전 하듯 체포
계엄선포권은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 그런데도 무모했다는 지적을 받는 것은 계엄선포 자체가 아니라 정교한 시나리오도 없이 덜컥 저질러 버린 때문으로 여겨진다. 윤 대통령은 국회가 즉각 해제 요구안을 의결하자 바로 해제했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도 계엄령의 효과는 있었다고 보는 모양이지만 계엄해제 이후의 상황은 의외의 방향으로 너무 급격하게 전개됐다. 당장 윤 대통령에게 ‘내란 수괴’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이 붙여졌고, 국민의힘에는 ‘내란 공범’, 계엄선포에 대해 이해를 표하는 국민에겐 ‘내란 동조자’라는 딱지가 붙었다. 민주당 주장으로는 모두 처벌 대상이 될 터였다.
민주당이 먼저 죄목을 정하고 이에 따라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가 수사에 나서는 모양새가 됐다. ‘내란’이라고 단정했을 양이면 경찰이 수사하도록 했어야 할 텐데 공수처가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 왜 그랬는지는 나중에라도 따져봐야 할 일이다. 공수처는 권한에 없는 일을 저질렀다. 내란죄 수사권은 없지만 직권남용죄 관련범죄로 수사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직권남용죄를 따라가 보니 내란죄가 있더라’라는 경우라면 몰라도 ‘내란죄 수사를 위해 직권남용죄 수사권을 이용한다’는 것이야말로 ‘직권남용’ 아닌가?
현직 대통령 체포를 군사작전 하듯 거창하게, 온 세상이 다 알도록 떠들썩하게 한 것도 황당한 일이다.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 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고 헌법 제84조가 규정하고 있다. 공수처는 권력남용죄로도 대통령을 체포 구금해서 수사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뽑힌 ‘국가의 원수’를 공수처는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체포·구금했다는 것인가. 검찰은 공수처의 권한 없는 수사결과를 가지고 윤 대통령을 구속기소했다. 이래도 되는 게 대한민국 식의 법치인 모양이다.
헌법재판소도 이해하기 어려운 심리를 시작했다. 내란죄가 빠진 소추안을 근거로 탄핵여부를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탄핵소추 이유의 핵심이던 ‘내란’은 두고 ‘내란행위’만 대상으로 심리하고 결정한다는 방침으로 알려졌다. 헌재의 권고에 따라 국회의 탄핵소추단이 그렇게 입장을 정리했다고 알려졌었다. 내란행위는 있었지만 ‘내란’은 판단하지 않고, 탄핵 여부만 결정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법률비전문가도 알 수 있게 설명해 줄 수는 없는 건가?
고대 속에 잠든 ‘아고라’는 또 뭔지
다시 이 대표의 페이스북으로 돌아가자. 그는 이렇게 글을 이어갔다.
“서로 다른 색깔의 응원봉들이 경쾌한 떼창으로 한데 어우러지며 역사의 퇴행을 막아냈다. 우리 국민은 그 찬연한 손빛으로 내란의 어둠을 걷어내고 고대 속에 잠든 ‘아고라’를 깨워낼 것이다.”
그러니까 윤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역사의 퇴행을 막는’ 민주주의 지킴이라는 것인가? ‘고대 속에 잠든 아고라’를 깨워내면 그 군중의 힘으로 윤 대통령을 탄핵하고 민주당의 정부를 등장시킬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 같은데 이건 대중 선동 아닌가? ‘아고라’를 직접 민주정치의 뜻으로 쓴 것인지, 대규모 군중시위의 뜻으로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폭민정치’ ‘중우정치’를 ‘깨워낼’ 위험성도 있다. 이를 몰라서 그러는지 알고서도 그러는지 그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다. ‘대규모 군중시위’로서의 ‘아고라’라면 민주당과 그 주변세력들이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것이어서 새삼스레 깨워내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고, 산을 높이 오를수록 바람이 더 거친 법이다. 새해의 문턱에서 우리는 곧 오늘의 불운을 끝내고 우리 국민이 얼마나 위대한지 다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국민의 열망을 가슴 깊이 새기고 국민의 뜻을 받들어 새 미래를 열어가는 데 앞장서겠다.”
이런 게 바로 ‘선거 유세문’이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 대표가 ‘민주주의’의 지킴이인양 말하는 것은 정말이지 듣기 거북하다. ‘자신의 사법적 안전과 정권 장악’을 위해서라면 대한민국의 대의민주정치는 훼손돼도 좋다는 생각으로 민주당을 이끌고 입법과정을 좌지우지하는 것 같던데?
그의 변검술(變臉術: 순식간에 얼굴을 바꾸는 마술)이 이젠 무섭다. 탄핵반대 집회에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 2030젊은이들도 그게 싫다는 생각 아닐까?
음력 설날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길 소망합니다.
글/ 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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