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찰용지 주세요. 아무도 안 쓰시네. 씁시다. 써요.”
지난 22일 오전 11시 전남 신안 압해 송공항에서 물김 경매를 진행하던 고홍준 신안군수협 송공지점 과장의 목소리가 커졌다.
고 과장은 물김 채취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선 위를 뛰어다니며 김의 종류와 상태를 외쳤다. 경매는 한 차례에 어선 4척씩 진행됐다. 고 과장이 “1번 곱창”, “2번 마루바 얼치기”, “3번 일반”, “4번 일반” 이렇게 외치면, 뒤 따라온 보조 경매사가 “1번 김00씨”, “2번 최00씨”처럼 채취한 어민의 이름을 불렀다.
입찰에 참여하는 중도인들은 배를 옮겨다니며 김의 상태를 확인했다. 김의 색깔과 형태, 이물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품질이 결정된다고 한다. 경매사와 경매에 참여하는 중도인 모두 몇십 년을 해온 일이다. 김의 때깔만 보면 상품인지, 하품인지 바로 안다. 누가 양식한 것인지도 보조 지표로 작용한다. 양식업자의 이름이 일종의 ‘브랜드’인 것이다.
중도인들은 입찰용지에 자신들이 구입할 가격을 기재한 뒤, 고 과장에게 건넸다. 고 과장은 중도인들이 낸 가격 중 최고가를 낙찰가로 외친다.
이날 경매는 총 10차례가량 진행됐다. 고급김으로 분류되는 곱창김과 모무늬돌김(마루바)은 비교적 높은 가격을 받았다. 곱창김의 낙찰 가격은 20만원을 상회했다. 품질이 좋은 것은 30만원에 육박했다. 이들과 일반김이 섞인 ‘얼치기’도 10만원대에 낙찰됐다.
반면 일반김은 찬밥 신세였다. 이날 경매에서 가장 낮은 일반김 낙찰가격은 3만5000원. 120㎏들이 1망의 가격이다. 최명용 송공어촌계장은 “작년 김 수요가 증가해 가격이 올랐을 때는 일반김도 1망에 20만원은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신안군수협에 따르면 이달 일반김 평균단가는 4만3000원이다. 작년 1월에는 17만8000원이었던 게 4분의 1토막이 났다. 작년 3월에는 일반김 평균단가가 28만6000원에 달했다.
이날 경매에선 입찰자가 한 명도 없는 물김이 나왔다. 고 과장은 “사 갈 사람이 없는 김은 폐기 대상이 된다”면서 “다행히 오늘은 입찰이 안 된 양이 많진 않다. 3만원만 주고 가져가라고 중도인들에게 부탁을 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고 과장은 “그래도 오늘 송공리 가격은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어제 북부지점(신안군 지도읍 소재)에선 김 1망 평균단가가 2만원에 그쳤다”고 덧붙였다.
◇ 김 채취 적기라는데… 한적한 송공 앞바다
22일 아침 7시 목포에서 압해도를 잇는 압해대교 뒤로 해가 떠올랐다. 압해대교에서 20여분을 달리면 신안군의 대표 김 양식지인 압해읍 송공리가 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니 ‘물 반, 고기 반’이 아니라 ‘물 반, 김양식장 반’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송공리에선 김 양식을 지주식으로 한다. 길쭉한 대나무나 플라스틱 막대를 1m 간격으로 바닥에 꽂고, 막대에 그물을 걸어두는 방식이다. 수심이 얕은 바다에서 주로 하는 김 양식 방법이다. 밀물 때는 김이 물 속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썰물 때는 수면 위로 노출돼 햇볕을 받게 된다. 파래 같은 불순물이 자연적으로 제거돼 고품질의 김을 생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본격적인 김 채취철이지만, 바다에서 작업을 하는 어선은 잘 보이지 않았다. 최명용 계장은 “이맘 때면 바다가 작업하는 배로 북적거리는 게 정상”이라면서 “설 연휴 전이기도 하지만, 올해는 값을 제대로 받지 못하니, 어가들이 작업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 계장의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해가 뜨는 방향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5분여를 달렸을까. 망에서 김을 털고 있는 어선 한 척이 눈에 들어왔다. 배 위에선 3명이 김 채취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명이 망을 끌어올리면, 다른 두 명은 양쪽에서 망을 잡아 당겨 김 양식 망이 털이 기계로 잘 들어가도록 붙잡는 역할을 했다.
1월에는 보통 새벽 6시부터 아침 10시까지 김 채취 작업을 한다고 최 계장은 설명했다. 김 경매가 11시에 진행되니 10시면 작업을 마치고 항구로 이동해 김을 정리하거나 망에 담는 작업을 한다고 한다. 소형어선 한 척에 싣는 김의 양은 보통 3톤(t) 가량. 120㎏ 망으로 환산하면 25개 정도 나온다.
최 계장은 “한번 작업을 나가면 용선료와 인부 비용이 들어간다. 외국인 일당이 17만원이다. 밥값까지 하면 20만원이 든다. 2명 인부 값과 용선료를 감안하면 고정비만 60만원이 들어간다”며 “최근에 김 경매가가 안 좋을 때는 2만원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작업비도 못 건지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작업을 할 수록 손실이 발생한다면, 작업을 미루면 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최 계장은 “김은 적기에 수확을 하지 않으면 망에서 썩어 버린다”고 답했다.
◇ 작년 1망에 20만원 받던 물김, 올해는 4만원도 힘들어
작년엔 김이 없어서 난리였다. 작년 4월 초 마른김 1속(100장)의 소매가격은 1만2580원으로 전년 대비 25% 이상 올랐다. 물김 가격도 1망에 15만~20만원에 육박했다. 평년 7만원 정도에 거래됐던 가격이 2~3배로 뛰었다.
이는 수출 물량이 증가하면서 김 수요가 늘어난 덕분이었다. 여기에 김 생산지인 중국과 일본의 해수온 이상 현상으로 작황이 나빠지면서 상대적으로 생산이 원활했던 한국으로 김을 사겠단 바이어들이 몰려 들었다. 경매현장에서 만난 한 어민은 “바이어들이 ‘품질이 떨어져도 괜찮다. 그냥 김이면 된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정반대다. 품질이 좋아도 예년 값을 받기 어렵다. 이날 경매에 오른 일반김 중 상태가 가장 좋았던 게 한 망에 6만원에 낙찰됐다. 상품으로 평가받으면 5만원대, 중품이 3만5000원~4만원대였다.
중도인이 매입한 물건을 목적지로 옮기는 배달기사에게 물어보니 그나마 송공리 지역은 경매가가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이 배달기사는 “고흥에선 2만원에도 안 팔리고 폐기되는 물건이 허다하다”면서 “어제는 서천에서도 망 수십개가 폐기됐다”고 말했다.
김값이 뚝 떨어진 이유는 수요보다 공급이 부쩍 늘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선 공급이 늘어난 이유를 크게 2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올 겨울 날씨가 따뜻해 수온이 김 성장에 유리한 조건이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난해 김값 폭등을 계기로 허가를 받지 않고 설치한 ‘불법 김양식장’이 범람한 것이다.
최 계장은 “오늘도 1월 날씨 치고는 따뜻하지 않냐. 수온 영향으로 김 작황이 20~30% 가량 늘었다”며 “작년에는 김 양식 망을 20일마다 한번씩 털이 작업을 했는데, 올해는 보름에는 한번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립수산과학원은 “9∼10월 고수온 현상으로 채묘가 지연돼 김 생산 시기가 다소 늦어졌지만, 2024년 12월 기준 김 생산량은 오히려 전년 대비 약 30% 증가했다”며 “양식 현장에서 채묘 시기를 잘 준수해 채묘 밀도가 개선됐고, 수온과 영양염 조건이 김 성장에 적합했다. 강풍으로 인한 피해도 적었다”라고 설명했다.
신안군 자은면에서 김 양식을 하는 황성호 욕지어촌계장은 “작년에 김 값이 역대 제일 좋았다. 김 양식을 하면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해서 허가를 받지 않고 양식장을 짓는 사람들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황 계장은 “예전에도 무허가 시설이 있긴 했지만, 기존 양식장에 시설을 조금 더 설치하는 수준에 그쳤다”면서 “작년 하반기 채묘를 앞두고 먼 바다에 대규모 무허가 양식장을 짓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무허가 시설에 대한 관리·감독과 징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 김 증산 추진하던 정부는 난감… “불법 양식 단속 및 시장 감시 강화”
김 수요 증가에 맞춰 양식 허가를 확대해 증산을 꾀하려던 해양수산부는 난처한 상황이 됐다. 당장 현장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려던 증산 계획을 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부는 지난해 김 수요가 급증하자 김 공급 물량 확대를 위해 전국적으로 2700헥타르(㏊, 1ha=1만㎡) 규모의 김 양식 면허를 신규 발급하겠기로 했다. 아울러 올해부터는 다른 수산물을 양식하던 장소를 김 양식장으로 전환하는 것도 허용키로 했다.
하지만 기후적 요인으로 정부가 예상한 것보다 김 작황이 좋아지고, 정부 통계에 잡히지 않는 무허가 시설이 난립하자 가공 시설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물김이 생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김 가격 하락으로 소비자들이 먹는 조미김 가격도 조금은 내려갈까? 어민들이 채취한 물김은 중도인을 거쳐 마른김 생산 업체로 들어간다. 대형 마른김 업체는 중도인과 고용 계약을 체결하기도 한다. 마른김 업체에선 세척-말림 작업을 해 한 속(100장) 단위로 마른김을 만든다. 이렇게 마른 김은 일부는 시장으로, 일부는 조미김 가공업체로 들어간다.
‘물김 가격이 내린 만큼 마른김 가격도 내렸냐’는 기자의 질문에 가공업체에선 고개를 갸웃거렸다. 국내 조미김 생산 1위 업체인 신안천사김의 김갑철 이사는 “물김 가격이 많이 내렸다고 하는데, 우리가 공급받는 마른김의 가격은 작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면서 “물김 생산이 증가한만큼 마른김 생산도 늘고, 공급 증가로 가격이 하락하는 게 정상적인 시장 조정일텐데 그러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마른김 업체들도 고충을 토로한다. 생산 능력보다 더 많은 양의 물김이 공급되고 있어 소화가 어렵다는 것이다. 충분한 물량을 확보했지만, 어민 피해를 막기 위해 초과 물량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신안에서 마른김을 생산하는 다도해어업회사법인의 김형정 대표는 “30년 만에 처음 겪는 일이다. 그동안 원물 생산과 공장의 마른김 생산 능력이 조율돼왔는데, 올해는 공장을 풀로 돌려도 밀려 들어오는 원물을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마른 김 가격과 관련해선 “조미김 가공업체가 구입한 시점과 차이가 있는 듯 하다. 작년에 1속에 1만2000원 하던 게 최근에 6000원까지 떨어졌다”고 말했다. 신안군 관계자는 “마른김 업체들도 물건을 빨리 출고하고 싶지만 주문이 없어 창고가 꽉 찬 상황”이라며 “수출 등 수요 감소도 영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해수부는 대책 마련을 고심 중이다. 홍래형 해수부 수산정책관은 “현장에서 제기하는 문제점을 종합해보면 불법 양식장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면서 “지자체 역량만으로 불법 양식장 점검을 하기가 힘이 벅차다고 해서 합동 단속을 추진키로 했다”고 말했다.
유통 단계 점검도 강화한다. 물김은 저렴하게 매입하면서, 마른김은 출하 시기를 조정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현장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마른김 업체 간의 담합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홍 정책관은 “지난해에는 김 값 상승 시기 사재기가 있는 것은 아닌지 유통 현장을 점검했는데, 이번에는 반대로 판매를 하지 않고 비축하려는 업자가 없는지 현장을 점검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어민 지원 대책과 관련해선 “해남에선 수협과 지자체가 협업해 물김 가격이 한 망에 4만원 이하로 나오면 폐기를 하고, 4만원을 어민에게 지원하는 방안을 하고 있다”며 “이처럼 어민의 생산비용을 최소한으로 보장하는 지원책을 전국적으로 확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