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달 16일이면 윤동주 시인이 세상을 떠난 지 80년이 된다. 영정 속 학사모를 쓴 시인의 모습은 흔들림 없는 청춘이다. 윤동주가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이라는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우리 세대 모두는 ‘서시’를 읽으며 젊은 날을 지나왔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는 고뇌로 점철된 고백이다.
일본 규슈 후쿠오카(福岡)는 윤동주가 마지막 생을 보낸 곳이다. 윤동주는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43년 7월 체포됐다. 2년형을 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된 둘은 이곳에서 마지막 1년 7개월을 보냈다.
그리고 ‘육첩방(六疊房) 남의 나라’에서 2월 16일, 3월 7일 차례로 숨졌다. 아직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광복을 반년 남겨 놓은 때였다.
두 사람은 태어난 곳도, 자란 곳도, 죽음을 맞은 곳도, 묻힌 곳도 같다. 중국 길림성 용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했고 연희전문을 다녔다. 또 중국 용정에 나란히 묻혔다. ‘시인 윤동주 지묘’와 ‘청년문사 송몽규 지묘’는 100m 떨어진 지척에 있다. 윤동주는 그해 3월 6일 장례를 치렀다. 송우혜는 ‘윤동주 평전’에서 “그날따라 봄을 시샘하는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의 유골을 땅에 묻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했다”며 시린 그날을 묘사했다.
후쿠오카에 갈 때마다 이따금 구치소에 들리는데, 매번 뭉클한 감상에 젖는다. 아들 또래 청년들이 한창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지금은 구치소로 바뀌었지만 후쿠오카 형무소는 악명 높았다. 구치소 건물은 전혀 생각지 못한, 주택가와 인접해 있다. 우리 같으면 혐오시설이라며 이전 요구가 빗발쳤을 게 분명한데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싶었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 웬만해서 반대하지 않는 일본인 특유의 순종주의가 묻어 있다.
두 사람의 공식 사인은 병사(뇌출혈)지만 생체실험 사망설도 꽤 설득력 있다. 가장 먼저 생체실험 사망설을 제기한 이는 일본인 고노 에이치(鴻農映二)다. 문학평론가 고노는 1980년 ‘현대문학’ 10월호 ‘윤동주, 그 죽음의 수수께끼’에서 생체실험 도중 숨졌을 가능성을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전쟁 말기, 일제는 모자란 피를 충당하기 위해 혈장을 대신해 생리식염수를 주사하는 실험을 했는데, 실험 도중 사망했다는 것이다.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첫째 ‘규슈제국대학에 해부용으로 제공함’이라는 전보, 둘째 면회 자리에서 송몽규가 했다는 말이다. 해부용 운운은 실험 도중 숨졌음을 추정케 한다. “매일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있다”라는 송몽규의 말 또한 정황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이후 생체실험 사망설은 음모론을 넘어 어느 정도 구체화됐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TRA) 자료도 그중 하나다. 전후 연합군은 규슈제국대학 의대교수 5명을 전범 재판에 기소했는데, 미군 전투기 조종사 8명을 생체 해부한 혐의였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미군 포로의 장기를 적출하고 ‘바닷물 주사’를 꽂았다.
SBS방송(2009년 8월15일)도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문서를 확인해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규슈제국대학이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를 상대로 바닷물 수혈 생체실험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선일보 또한 2015년 4월 6일자 ‘이 끔찍한 짓을 우리가 했습니다, 미군 생체실험 규슈의대의 반성’이란 기사에서 미군 포로 생체 해부에 참여했던 일본인이 마이니치신문에 털어놓은 증언을 실었다.
19살 의대생 신분으로 실험에 참여했던 노인(2015년 89세)은 “당시 대학은 군을 거역하지 못했다. 산 채로 미군 장기를 적출했다. 또 혈관에 바닷물을 주입했다. 전쟁이 만든 광기였다”고 증언했다. 규슈대학 또한 2015년 4월 교내에 의학역사관을 개관해 미군 포로 생체 해부 사건을 기록한 전시물을 비치하고 추모 공간을 설치함으로써 어두운 과거를 속죄하고 있다.
생체 실험 사망 의혹은 후쿠오카 형무소 사망자 추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옥중 사망자는 1943년 64명에서 1944년 131명, 1945년 259명으로 급증했다. 종전에 임박해 대규모 생체 실험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단기간 급증한 옥중 사망자를 설명할 도리가 없다. 일본 정부는 80년 넘게 불편한 침묵을 이어가고 있다. 반면 전후 일본 지식인과 시민들은 윤동주 시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참회하는 일에 적극적이다.
‘윤동주 시를 읽는 모임’은 1994년 이후 30년 넘게 윤동주 시를 낭송하며 그를 기리고 있다. 이들은 매년 2월 16일 후쿠오카 구치소 옆 뜰에서 윤동주의 시를 읽으며 속죄한다.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80)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는 오랫동안 윤동주 시비 건립을 추진했다. 비록 좌절됐지만 그는 10년 가까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혼신을 다했다.
윤동주 묘를 처음 세상에 알린 이는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 전 와세다대학 명예교수다. 그는 1985년 5월 용정 동산교회 묘지에서 윤동주 묘를 발견했다. 그가 없었다면 윤동주가 우리 곁에 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을지 모른다. 마스오 교수는 2023년 90세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윤동주와 한국문학’, ‘조선의 혼을 찾아서’를 통해 한국과 일본사회에 윤동주를 알렸다.
아부라야마 강과 무로미 강은 후쿠오카 구치소에 이르러 합류한다. 이곳 두물머리에서 동해까지는 1km 남짓이다. 지난 가을, 그곳 소나무 숲에서 윤동주와 송몽규를 떠올렸다. 그들도 차가운 감방에서 파도 소리를 들었을까, 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두 조선 청년의 죽음을 애도하며 일본 정부의 무심함을 탓했다. 다시 윤동주 서거 80주년을 맞아 군국주의 어두운 그림자와 양심적인 일본 시민 사이에서 일본 정부의 자세를 묻는다.
|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