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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보다 관찰이죠…우리는 각자의 길로 늙어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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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53.9%’라는 숫자였다. 대한민국 등록 장애인 중 53.9%가 65세 이상이다. 이는 고령화와 장애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취재팀은 고령 인구의 건강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장애인과 돌봄 가족, 의료진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스피커를 달았다. 고령 장애인의 삶은 우리 사회 의료와 복지 패러다임의 과감한 전환을 촉구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편집자 주]

수원 영통구의 한 오피스텔 건물 3층. 기자는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에 들어서서 두리번 거렸다. 고급 인테리어도, 대기실의 환자도, 간호사의 응대도 없었다.

사무용 책상 둘, 보조 책상 하나가 시설의 전부였다. 벤처 사무실 같은 분위기였다. 고속도로 바로 옆 건물인 탓인지, 대형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사무실 전체가 미세하게 떨렸다. 로봇 청소기가 한가롭게 바닥을 누비는 모습 정도가 이채로웠다.

“외래 환자를 보지 않을 예정이라, 고정 경비를 아끼기 위해 이곳에 입주했어요.”

4년차 개원의 기승국 원장의 말이다. 그는 수원시와 용인시 수지구, 기흥구 일대 거동이 불편한 고령자를 대상으로 방문진료를 하고 있다. 1998년 아주대 의과대를 중퇴한 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아주대 의대에 재입학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방문진료는 간호사의 바이탈 체크(체온, 혈압, 심박수 등), 의사의 상담과 처방, 노트북 차트 입력으로 진행된다. 사진은 기승국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 원장과 소속 간호사가 진료하는 모습./김홍구 객원 기자
방문진료는 간호사의 바이탈 체크(체온, 혈압, 심박수 등), 의사의 상담과 처방, 노트북 차트 입력으로 진행된다. 사진은 기승국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 원장과 소속 간호사가 진료하는 모습./김홍구 객원 기자

그가 건넨 명함엔 하늘색 바탕의 선명한 흰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다.

예방의학과 전문의.

재택의료센터/장애인건강주치의/방문진료/산업보건센터.

“예방의학 전문의는 거의 못 만나 보셨을 거예요. 예방의학 전문의는 한 해 10명도 안 나오니까요.”

예방의학은 질병과 장애, 조기 사망 예방을 목적으로 하는 의학 분야다. 한국 의대생 사이에선 개원 기회가 적고 개원 후에도 수익성을 기대하기 어려워 선호하지 않는다. 의대 진학을 위해 초등 준비반까지 등장하는 한국 사회의 상식선에서 그의 선택은 ‘비상식적’이다.

“(경영학 전공 배경이 있으니) 보건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죠. 전 세계 고령화 추세를 고려하면, 최신 의학 분야인 노인 의학이 유망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인 보건 전공이신 지도 교수님의 영향도 받았고요.”

문제는 데이터였다. 예방의학은 데이터 확보가 생명인데, 한국인이 어떻게 늙고 죽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별로 없다. 정부의 보건 프로젝트를 수주하려고 해도 지속적인 연구에는 변수가 많았다.

“재택의료 분야 권위자인 김창오 원장님이 서울 성북구에 ‘돌봄 의원 재택의료센터’를 개설하셨어요. 아, 나도 현장에서 경험과 데이터를 축적해야겠구나 싶었죠.”

그래픽 = 정다운
그래픽 = 정다운

지도 앱 필수…하루 최대 8건 진료

최근 기 원장의 진료 건수가 꽤 늘었다. 한달에 100건 넘게 방문진료를 한다. 덕분에 현장 진료를 함께 할 간호사도 채용했다. 그래도 하루 진료 건수가 8건이 채 안된다.

기자는 2024년 10월, 11월 그의 진료 현장에 동행했다. 오전 9시 기 원장과 간호사가 각자 차량을 몰고 첫 번째 예약 환자의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진료 일정이 시작됐다. 간호사의 바이털 체크(체온, 혈압, 심박수 등), 기 원장의 상담과 처방, 차트 입력이 가가호호(家家戶戶) 반복됐다. 좁은 골목을 누벼야하기에 지도 앱은 필수다.

“파란 약이… 다 떨어졌…어.”

2007년 파킨슨병을 진단받은 안OO(71세, 여) 씨를 방문진료 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안 씨의 발음은 어딘가 느리고 부정확했지만, 동시에 절박했다. 그가 말하는 파란 약이란, 우울증 치료 등에 사용되는 신경과 약물인 미르타자핀(Mirtazapine)이었다. 안 씨의 말은 ‘미르타자핀이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파킨슨병은 신체 일부가 심하게 떨리는 게 주 증상이다. 신경과 약물은 증상 완화와 환자의 수면 질 향상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 씨의 말에 순간 소동이 벌어졌다. 의사, 간호사, 보호자가 모두 당황하며 식탁 위에 무질서하게 쌓인 약봉지를 하나씩 뒤졌다. 알고 보니, 안 씨가 임의로 미르타자핀을 한 번에 2봉씩 복용해 3개월어치 약이 한 달 반 만에 동이 났던 거였다.

“복용량을 지키는 게 정말 중요합니다.”

원장과 간호사는 처방대로 복용해 달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환자 입장에서 방문진료는 집에서 의료 서비스를 누리는 ‘재택 의료’다. /김서영 기자
환자 입장에서 방문진료는 집에서 의료 서비스를 누리는 ‘재택 의료’다. /김서영 기자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2020년 뇌출혈로 우측 편마비 상태로 누워있는 허OO씨(82세, 남)가 거주하는 공간이었다. 그는 알츠하이머병도 앓고 있다. 허 씨는 요양 병원에서 3년간 지내다, 보호자인 아내의 요청으로 퇴원했다.

“남편의 설사가 멈춰서 너무 좋아요.”

허 씨의 아내 표정이 밝았다. 허 씨는 매일 설사를 했고 그의 아내는 매일 밤 그의 기저귀를 갈아야 했다. 설사를 멈추는 지사제를 처방해 달라는 게 아내의 간곡한 요청이었다.

기 원장은 지사제 처방 대신 허 씨가 복용 중인 약물 중 변비약을 뺐다. 변비약은 대변을 묽게 만들어 설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허 씨의 설사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사실 제 방문진료는 대부분 ‘메디케이션 리뷰(medication·약물 처방 및 검토)’예요. 수가도 없어서 응급 출동은 하지 않고 있어요.”

기 원장이 돌보는 환자 중 누워 있지 않은 환자는 거의 없었다. 2024년 10월까지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의 총 524건 진료를 분석해보니, 신체 마비 진료 건수 299건 (57%), 신경계 퇴행성 질환 진료 건수 142건 (27%)로 고령 장애 환자의 진료 건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 진료 환자 유형 분석 /그래픽 = 정다운
홈닥터 예방의학과 의원 진료 환자 유형 분석 /그래픽 = 정다운

“영화 「기생충」에서 보듯 냄새는 못 속입니다”

방문 의료는, 환자 입장에서 ‘재택 의료’다. 의사가 집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환자의 삶 그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형편은 어떤지, 부양가족은 있는지, 형제 우애는 어떤지 등 건강 상태 지표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정보들을 만나게 된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임OO(86세, 여) 씨의 35평 아파트. 간소한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액자 속 사진만으로도 그의 젊은 시절을 그릴 수 있었다. 굳은 입매와 똑바로 선 어깨를 가졌던 커리어 우먼(전문직 여성)이었다.

이제 그의 두 다리는 일자(一字)로 무겁게 굳었다. 75세에 알츠하이머 발병 이후 장기간의 침상 생활로 무릎 관절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평소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임 씨가 이날 기 원장에게 연신 ‘고맙다’ ‘고맙다’고 했다. 그의 두 눈에서는 이유 모를 눈물이 조용히 흘렀다.

“요새 어머니께서 부쩍 감동하세요. 제가 손 닦아 드리면 ‘고맙다’ ‘감사하다’고 말씀하시고요. 꽃게탕 먹고 싶다, 불고기도 해 먹자고 하시더라고요. 예전에는 이렇게 말씀 안 하셨는데….”

요양 보호사는 안 씨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래픽 = 정다운
그래픽 = 정다운

기 원장은 고령의 부모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도 만났다고 했다.

“장애 등급을 받기 위해 연기하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많지만,그 경우는 제가 본 최악의 케이스(사례)였습니다. 부모는 방치하면서 정부 보조금만 타는 보호자였어요. 환자인 할아버지의 살갗은 감염으로 부풀어 오르고 썩는 냄새를 풍겼습니다.”

기 원장은 “영화 「기생충」에서 보듯 다 속여도 냄새는 못 속인다”라면서 “사회복지사들이 취약 계층에 대한 정부의 현금성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일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보호자의 지원금 유용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홈닥터 예방의학과의원 원장 소속 간호사의 진료 가방 /김홍구 객원 기자
홈닥터 예방의학과의원 원장 소속 간호사의 진료 가방 /김홍구 객원 기자

예방 의학은 한마디로 ‘가성비’

기자가 각종 데이터 분석과 자료를 얻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벤처 사무실 같은 병원 모습은 여전했다. 컴퓨터 앞에 앉은 기 원장과의 이번 대화는 흡사 데이터 과학자(data scientist)와의 만남처럼 흘러갔다.

“예방 의학의 장점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치료비 대비 효과)’예요. 가성비를 제대로 측정하려면 충분한 데이터를 모아야 하고 의료 정책 연구자들은 질병 코드를 정확하게 입력해야 합니다.”

그는 저위험군은 지역 사회 보건 사업으로, 중위험군은 외래 및 비대면 진료로, 고위험군은 방문진료로 대응하는 것이 가성비 높은 의료 체계로 본다. “닭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쓰면 안 된다”는 설명이었다.

“정부가 왜 요양병원을 줄이려고 할까요? 낫지 않는 ‘엔드 스테이지(end stage⋅말기)’ 환자들을 입원시켜 24시간 의사가 상주해 건강보험에서 요양급여를 청구하는 것이 국가 재정을 갉아먹고 의료 전반의 효용을 떨어뜨리기거든요.”

환자 입장에서 방문진료는 집에서 의료 서비스를 누리는 ‘재택 의료’다. /김서영 기자
환자 입장에서 방문진료는 집에서 의료 서비스를 누리는 ‘재택 의료’다. /김서영 기자

그는 최근 아주대에서 발표했다는 자료를 꺼냈다. 제목은 ‘스크리닝에서 모니터링으로’였다.

“노인에게는 질병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 나타나지 않거나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요. 가령, 노인 상당수는 심근경색인데도 흉통이 없다고 해요. 노인에게 각종 수치의 ‘정상 범위’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어요. 우리는 각자의 길로 늙어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결국 노인의 건강은 개별로 평가해야 한다는 게 그 발표 자료의 결론이었다.

“스크리닝(검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깊이 있게 관찰하는 모니터링이죠.”

기 원장은 한국인 노년 데이터를 모아 의학 분야 최고의 학술지인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NEJM)’에 논문을 발표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 여정에서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더위. 매년 여름이 뜨거워져 진료 현장도 점점 더워지고 있다. 불볕더위 속 좁은 골목길에 세워둔 차량은 불가마가 되기 일쑤였다.

기 원장은 작년에 더위에 지쳐 방문진료를 그만둘까 고민도 했다고 털어 놓았다.

다른 하나는 장애에 대한 본질적인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은 100세까지 살아도 30년, 40년을 누워 지낸다. 기 원장은 진료 현장에서 그런 사례를 자주 목격한다.

“그런데, 누구나 노년에는 장애인이 될 수 있습니다. 103세 장애 노모를 돌보는 84세 효자 할아버지도 ‘이젠 지친다’고 하셨습니다. 노모가 아들을 안아주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니까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건강할 때 더 자주 만나고 서로 사랑해야겠더라고요. 그게 제가 진료 현장에서 깨달은 가성비 높은 사랑법입니다.”

조선비즈
content@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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