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의 난점은 조수 간만의 차가 큰 데 있다. 일제는 그 애로를 극복하기 위해 독(Dock)을 건설했다. 공사 과정에서 인천감리서에 수감됐던 백범 선생이 끌려가 노역을 당했다는 서글픈 얘기가 전해지는데, 그 ‘독’과 ‘갑문’은 식민 침탈을 위한 방편으로써 설계하고, 시공한 것이었다.
그때, 그 같은 기술과 자본을 대거 투입했다는 것은 일제의 야욕이 얼마나 집요했던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공사는 1911년에 시작해 1918년에 마쳤다. ‘갑문’은 ‘이중식’이어서 조수 간만의 차가 커도 출입이 자유로웠고, ‘독’은 4500t 급 5척을 동시에 접안시킬 수 있는 규모였다.
박물관 측은 이를 두고 “해가 진 어두운 밤에도 언제든 자유롭게 배들이 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고 해 마치 ‘갑문’을 찬양하는 듯 했다. 더불어 월미도 해상의 배경을 두른 산들이나 해변가의 빽빽한 민가들, 과장된 항만 시설과 거리, 가배점(咖啡店=커피점), 중화루의 간판 등 현실과는 거리가 먼 그래픽도 어설펐다.
일제는 식민 통치 내내 인천항 ‘독’과 갑문’을 가리켜 ‘제국의 위업’이라고 했다. 그런데 박물관 측은 그런 그늘진 배경을 지닌 식민 잔재를 굳이 큰돈을 들여 소개하는 반면에 그 오욕의 역사를 뛰어넘어 지난 1974년 우리가 우리 힘으로 완공한 인천항 내항의 전면 ‘독’은 웬일인지 외면하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박물관 측은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살아온 사람’으로 평택항을 지켜온 김대식 씨(평택), 바다의 길을 밝혀준 섬마을 등대원 강용정 씨(신안), 바다와 함께 멍게를 기르는 양식업자 김진수 씨(영덕), 대를 이어 바다를 누비는 기관장 하이호 씨(거제) 등을 소개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인천항’에서 평생을 바쳤던 인천의 항만인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반면에 2016년 인천시립박물관 측이 발행한 ‘인천항 사람들’은 ’45년 부두 인생, 하역원 최민재’, ‘배들과 밀당을 하는 사람, 줄잡이 송영일 소장’, ‘인천항을 들어 올리는 크레인, 김갑태 반장’, ‘어두운 바다의 신호등, 등대지기 김신철 등대장’ 등 여러 항만 공로자들을 알리고 있다.
생애의 대부분을 인천항에서 보내며 ‘해기사’처럼 인천항에서 잔뼈가 굵은 항만 발전의 공로자 역시 국립인천해양박물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인천해양박물관은 ‘인천 해양사’를 담아야 한다. 다음은 ‘인천 해양사’의 단상들이다.
(1) 우리나라 최초의 ‘세관(옛 명칭 海關)’은 조선 정부가 제물포에 세웠다.
(2) 우리나라에서 민간인이 세운 최초의 기선회사는 인천의 ‘대흥상회’였다.
(3)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는 1893년 인천 강화도에 설치된 ‘조선수사해방학당’이었다.
(4)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대학은 1947년 인천에서 개교한 ‘조선해양대학’이었다.
(5) 우리나라 최초의 군함인 양무호와 그 후 취역한 광제호의 모항은 인천항이다.
(6) 우리니라 최초의 해수욕장은 1906년 인천부 만석동 매립지에서 문을 연 ‘묘도 해수욕장’이었다.
(7) 우리나라 최초의 수족관은 1915년 경복궁에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 당시 별관으로 지은 ‘인천수족관’이 처음이다.
(8) 우리나라 최초의 컨테이너 전용부두는 1974년 5월 10일 인천항 내항에서 개장하였다.
(9)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 이민이 출발한 곳은 인천 제물포였다.
(10)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조탕 시설을 갖춘 임해 유원지는 월미도이다.
‘국립인천해양박물관’은 부산의 ‘국립해양박물관’과는 명칭부터 다른 취지에 입각해서 설립되었다. 따라서 부산의 ‘국립해양박물관’과 중첩되지 않는 해양 일반사(一般史)과 함께 ‘인천항’ 특유의 역사와 그 위상, 미래에의 전망 등을 충실히 제시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본다. 향후의 심도 깊은 지역 연구와 보완을 기대한다.
/조우성 전 인천시립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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