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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둥이 아들아, 이 편지를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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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53.9%’라는 숫자였다. 대한민국 등록 장애인 중 53.9%가 65세 이상이다. 이는 고령화와 장애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취재팀은 고령 인구의 건강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장애인과 돌봄 가족, 의료진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스피커를 달았다. 고령 장애인의 삶은 우리 사회 의료와 복지 패러다임의 과감한 전환을 촉구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편집자 주]

순진한 여~자의 가슴에다 돌을 던진 사내야 ~ 떠나 버릴 사람이라면 사랑한다 말은 왜 했나~

서울 양천구 신월동의 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이옥순(가명·75세)씨는 트로트 가수 유지나의 ‘미운 사내’를 흥얼거리며 기자를 맞이했다. 미운 사내는 미스터트롯 수상자 이찬원 씨의 애창곡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탄 곡이다.

“내 인생 같은 곡이야. 미운 사내는 어릴 적 만난 내 남편이지. 걸핏하면 나를 때렸던 ….”

갑작스러운 사고로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이옥순(가명)씨./장윤서 기자
갑작스러운 사고로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은 이옥순(가명)씨./장윤서 기자

낡은 바지와 형형색색 윗도리, 각종 지원금 신청 서류, 크고 작은 화분과 옛날 장독대까지…혼자 사는 이 씨의 아파트는 정리되지 않은 물건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식탁 위에도 반찬 그릇과 자잘한 잡동사니가 쌓여 있었다. 한쪽으로 뒤틀린 발목과 관절염 탓에 이 씨에게는 사소한 일조차 고된 노동처럼 보였다.

“나이 드니, 일상이 흉기더라”

“2010년 어느 날, 버스에서 내리다 발을 헛디뎠지. 길이 움푹 파인 걸 못 봤어. 미끄러지며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길에 주저앉았어. 나이 들어 반응이 느린데, 그날은 더 그랬던 것 같아.”

이 씨는 젊은 시절 몸을 혹사해 양쪽 무릎에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상황에서도 예상치 못한 사고를 맞았다.

“너무 아파서 119라도 부르고 싶었는데, 그럴 힘도 없었어. 주변에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았지. 그게 진짜 슬펐어.”

이옥순(가명)씨가 타고 다니는 휠체어가 아파트 복도에 비치돼 있다./장윤서 기자
이옥순(가명)씨가 타고 다니는 휠체어가 아파트 복도에 비치돼 있다./장윤서 기자

결국 이 씨는 절뚝거리며 혼자 집으로 걸어갔다. 일주일이 흘렀다. 그래도 통증이 가라앉지 않아 척추관절병원을 찾았다. 결국 이 씨는 발목 골절 수술을 받았다.

의사가 3개월간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혼자 사는 그에게 의사의 당부는 사치였다. 간병인도 없고 가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발을 사용했는데, 발목에 세워둔 인공 뼈가 주저 앉아버렸어.”

모진 운명에도 성실하게 살아온 그에게 ‘고령 장애인’이라는 반갑지 않은 삶이 시작됐다. 이제 그는 장애 2급 판정을 받고 전동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간다.

이 씨는 화장실에 갈 때, 침대에서 일어날 때,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으러 갈 때 집안 곳곳에 설치된 손잡이가 없이는 움직이기 어렵다. 화장실에는 미끄럼 방지 패드가 깔려 있다.

사고와 부상, 그로인한 근력 감소와 인지 능력 저하가 또 다른 사고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최근 이 씨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외부 화장실을 이용하고 이동하려다가, 각진 바닥에 걸려 또 넘어졌다

이번엔 바닥에 손을 짚은 것이 문제였다. 정형외과에서 자기공명영상진단(MRI)을 받아보니, 오른쪽 손목에 힘줄이 끊어져 수술이 필요했다.

“다리에 힘이 없다보니 다치지 않으려고 순간적으로 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지. 이번엔 5주간 손을 쓰지 말라고 하네. 밥도 해먹고 설거지도 해야 할 텐데…. 수술비 마련은 더 큰 걱정이고.”

그는 “일상이 흉기더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 이 씨와 같은 65세 이상 1인 가구수는 2024년 기준 219만6738가구이다. 전체 노인 중 혼자 사는 노인(독거 노인) 비율은 2020년 전체 가구 중 19.8%에서 2024년 22.1%로 계속 증가 추세다.

우리나라 노인빈곤율은 OECD 38개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23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빈곤율은 40.4%로 일본(20.0%)이나 미국(22.8%)의 두 배에 달한다.

그래픽= 한유진
그래픽= 한유진

아들 OO 꼭 보아라 – 본인 옥순

‘안녕하세요. 저는 49년생 이옥순입니다. 나의 일생을 글로 적어보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습니다. (후략)’

이 씨는 비뚤빼뚤 쓴 글을 기자에게 보여주었다.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아 쓴 총 4장의 편지 형식의 글이었다. 이 씨의 인생은 그의 손에 팬 주름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씨는 남편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당시 두살배기 막내만 등에 업고 집을 나왔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안해 본 일이 없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한 병아리 부화장에 방 한 칸을 얻어 갓난쟁이를 키우기도 했고 낯선 집에 들어가 식모살이도 했다.

간병인으로 일하며 24시간 병원에서 먹고 자기도 했다. 서울 을지로 인쇄소 골목도 이 씨의 주된 일터였다. 식당일과 각종 잡일을 닥치는 대로 했다. 결국 빈곤을 견디지 못해 남편한테 막내 아들을 돌려 보내야 했다. 이 씨는 품에서 못 키운 자식들을 생각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내가 돈을 벌려고 악착같이 노력했던 이유는 자식 때문이야. 작은 방을 구하고 아이들을 찾아갔더니 갑자기 떠난 엄마를 원망하며 보지 않으려 하더라. 마음이 너무 아팠지.”

어느 날 막내 아들이 중병을 얻었다며, 그를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이 씨는 “막둥이가 아프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했다. 편지에는 서울 중구의 쪽방에 살면서 막내 아들을 돌본 기록들이 이어졌다.

이 씨는 한때 첫째 아들 손녀를 키우기도 했지만, 현재 유일하게 소통하는 자식은 젊었을 때 등에 업고 나왔던 ‘막둥이 아들’이다. ​편지 봉투에는 ‘막둥이 아들 OO 꼭 보아라 – 본인 옥순’이라고 쓰여 있다.

이 씨는 요양 보호사 도움을 받아 이 편지를 동사무소(동 행정복지센터)에 들고 갔다고 했다. 취약 계층을 위한 각종 지원금 신청은 주소지 관할과 상관없이 전국 읍·면·동 행정복지센터에서 가능하다.

이 씨는 알츠하이머병도 앓고 있었다. 병원에서 제공한 치매 패치도 붙이고 있었다. 이 씨는 자신의 기억이 오락가락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편지에 나의 기록을 남겨 둔 이유이지.”

일주일에 5번, 그의 돌봄을 맡은 요양보호사가 집을 방문한다. 요양보호사는 수시로 이 씨의 생년월일이나 주소지를 물었다. 이 씨의 인지력을 유지하기 위한 가벼운 훈련이라고 했다. 이 씨의 요양보호사는 “집에 불필요한 물건이 많으니 정리하자고 말씀드리면, ‘내게는 소중한 물건들’이라고 할머니의 호통이 떨어진다”고 귀뜸했다.

“노래는 나의 힘”

이 씨의 방 한쪽에는 금빛 반짝이는 작은 상패가 놓여 있다. ‘제1회 OO공원 가을축제 주민노래자랑 부문 인기상.’ 빛바랜 벽지와 온갖 짐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는 지난해 10월, 양천구 OO공원에서 열린 가을 축제에서 주민 노래자랑 부문 인기상을 받았다. 이 행사는 서울 양천구 목1동과 신정2동 주민들이 주축이 된 동네잔치였다.

“혼자 살면 외롭잖아요. 기초연금과 장애인연금이 수입의 전부이고. 한 70만원이 될까. 그래도 나는 노래할 때 가장 행복해요. 그 어떤 것도 잊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노래야.”

그에게 인기상 수상의 영예를 안겨 준 노래는 자신의 인생 같은 곡, 가수 유지나의 ‘미운 사내’. 이 씨는 다시 무대에 선 것처럼 자세를 잡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첫 소절에서 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지만 이내 ‘인기상 가수’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고달픈 인생을 일순간 떨어버리는 듯, 트로트 특유의 떨림 발성이 임대 아파트에 퍼졌다.

조선비즈
content@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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