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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제약물 복용은 노쇠로 가는 지름길…한국인 노화의 취약 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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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은 초고령 사회로 진입했다. 취재팀이 주목한 것은 ‘53.9%’라는 숫자였다. 대한민국 등록 장애인 중 53.9%가 65세 이상이다. 이는 고령화와 장애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취재팀은 고령 인구의 건강 통계 자료를 분석하고 장애인과 돌봄 가족, 의료진을 만나 그들의 목소리에 스피커를 달았다. 고령 장애인의 삶은 우리 사회 의료와 복지 패러다임의 과감한 전환을 촉구하는 신호이기도 했다. [편집자 주]

김경순 씨(86, 여, 가명)의 고단한 여정은 70대 초부터 시작됐다. 고질병이 된 고혈압과 파킨슨병 탓에 근육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무릎 관절이 굳어지자 그냥 서 있는 것도 버거워졌다. 김 씨 침대 주변에는 약봉지가 수북이 쌓여갔다. 아*정 5mg, 올* 정 20mg, 인*정 40mg …. 김 씨는 매일 15가지가 넘는 약들을 먹었다.

문제는 김 씨의 의식이 갈수록 혼미해져 알약을 넘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점이다. 보호자가 알약을 빻고 그 약가루를 삼키는 날도 있었다. 그즈음 치매 증세도 깊어졌다. 김 씨가 ‘누가 자기 물건을 훔쳐 갔다’고 말하는 일이 잦았다.

2025년, 대한민국은 인구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 진료비도 전체 진료비의 44.1%에 달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2025년 1월 5일 서울 한 대형 병원에서 고령 환자가 지나가고 있다. /장련성 기자
2025년, 대한민국은 인구 20%가 65세 이상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이에 따라 65세 이상 노인 진료비도 전체 진료비의 44.1%에 달할 정도로 치솟고 있다. 2025년 1월 5일 서울 한 대형 병원에서 고령 환자가 지나가고 있다. /장련성 기자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두려움으로 다가온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 지인 중에 김 씨와 같은 사례가 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의 경우 요양원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골골 17년’. 한국인의 기대수명(82.7세)과 건강수명(65.8세)의 차이가 커 생긴 말이다. 골골 17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표가 ‘장애 인구의 고령화’다.

2023년 신규 장애인 등록자 중 56.3%가 65세 이상이었다. 전체 등록 장애인 중 65세 이상 비중은 2010년 37.1% 수준에서 2015년 42.4%, 2020년 49.9%, 2022년 52.8%, 2023년 53.9%로 증가했다(2023년 기준 전체 장애인 수는 264만2000명).

고령자가 치매, 뇌졸중, 골절 등으로 장애를 얻게 되면, 개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 전체가 돌봄에 매달려야 한다.

고령 장애인으로 가는 길

조선비즈는 한국인의 노쇠와 신체 기능 장애, 사망 등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2016년부터 70~84세 노인 약 3000명을 2년 단위로 추적 조사한 한국노인노쇠코호트연구(KFACS·Korean Frailty and Aging Cohort Study) 데이터를 분석했다. 언론사가 KFACS의 2016~2023년 전체 데이터를 분석, 보도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KFACS는 질병관리청 국립보건연구원이 주관하는 연구로 전국 10개 의료기관이참여하고 있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고령 인구를 장기 추적한 고품질 의료 데이터로 평가받는다.

본지는 KFACS 연구 책임을 맡은 경희대 의과대학 김미지 교수팀의 협조를 얻어 남녀 연령별 건강 상태 변화와 건강 악화 요인을 살펴봤다.

그래픽= 한유진
그래픽= 한유진

① 남녀 노화의 취약 경로 크게 달랐다

노쇠란 전반적인 기능 저하와 함께 신체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생리적 예비능력이 저하된 상태를 말한다. 노쇠한 노인은 치매, 보행장애, 낙상이나 병원 입원 가능성이 증가하고 기본 생활이 어려운 신체 기능 장애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고령의 신체 기능 장애는 특정 부위나 기능에 국한되지 않고, 신체 전반에 걸쳐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다. 쇼핑, 요리, 약 복용 관리 등 도구적 일상생활 활동이 제한된 상태(IADL), 식사, 옷 입기, 대소변 조절 등 일반 일상생활 활동이 제한된 상태(ADL)를 구분해 장애도를 판별한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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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는 우선 KFACS 참여자 중 2년 간격으로 진행되는 3차례 추적 조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1512명(사망 상태 확인 포함)을 추려, 분석했다.

분석 결과, 남녀 노화의 취약 경로(노쇠, 경미한 노쇠, 기능 장애, 사망)는 75세를 기점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이때부터 남성의 경우 사망률이 눈에 띄게 증가했고 여성의 경우 노쇠 비율과 신체 기능 장애 비율이 급격히 높아졌다.

6년 후 추적 조사(2016년 → 2022년 또는 2017년 → 2023년)에서 남성 사망률은 70~74세 그룹 8.4%, 75~79세 그룹 11.4%, 80~84세 그룹 21.4%로 나타났다. 여성의 경우, 사망률은 남성의 절반 이하로 나타났지만, 신체 기능 장애 발생 비율은 70~74세 그룹 18%, 75~79세 그룹 24%, 80~84세 그룹 29.6%로 치솟았다.

남성 고령자의 경우 음주, 흡연 등으로 암과 같은 치명적인 병을 얻어 사망에 이르는 사례가 많고, 여성 고령자의 경우 좁은 생활 반경, 운동 부족 등으로 극심한 근력 저하와 인지 기능 저하를 겪는 사례가 많았다. 즉, 고령 여성은 노쇠·장애 상태에서 더 오래 생존, 심각한 삶의 질 저하를 겪는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인노인노쇠코호트 연구에서는 고령자의 건강 상태를 건강, 전(前)노쇠, 노쇠, 장애로 기술한다. 이번 보도에서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전(前)노쇠를 '경미한 노쇠'로 풀어 썼다. / 그래픽=한유진
한국인노인노쇠코호트 연구에서는 고령자의 건강 상태를 건강, 전(前)노쇠, 노쇠, 장애로 기술한다. 이번 보도에서는 독자 이해를 돕기 위해 전(前)노쇠를 ‘경미한 노쇠’로 풀어 썼다. / 그래픽=한유진

② 다제 약물 복용, 숨은 시한폭탄

노쇠와 신체 기능 장애는 고령자의 어떤 특성과 관계가 있을까. KFACS 데이터에는 나이·성별·교육 수준·거주지·질환 등 인구통계학적·신체적·임상적·사회적 특성이 포함돼 있다.

이번에는 KFACS에 기록된 주요 32개 특성과 노쇠 및 신체 기능 장애와의 연관성을 알아봤다. 2016~2017년 기반 조사에서 건강 상태였으나, 이후 추적 조사에서 노쇠·기능 장애·사망 등에 이른 788명의 참여자를 선별해 32개 특성의 상대적 영향력을 로지스틱 회귀 모형으로 분석했다.

분석 결과, 건강 악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특성은 예상대로 나이였다. 그다음은 놀랍게도 다제 약물 복용(polypharmacy)이었다. 다제 약물 복용이란, 한 사람이 동시에 여러 종류의 약물을 복용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는 만성질환 등으로 여러 약물을 복용하는 고령자의 다제 약물 복용이 그 자체로 노쇠와 장애를 가속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서로 다른 약물들이 상호 작용을 일으켜 적지 않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픽=한유진
그래픽=한유진

③ 공기 좋은 시골?… 노쇠·장애 많아

고령자의 거주 지역도 노쇠·장애와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기 좋은 시골에서 거주하는 것이 건강에 유리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이번 분석 결과에서는 시골 지역 거주가 건강 관리에 부정적인 것(영향도 6위)으로 나타났다. 시골 지역 거주자들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높은 데 비해 보건 및 의료 서비스, 건강 정보 접근성이 낮아 건강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추정된다.

④ 근력, 노쇠 막는 방어선

한편, 근력과 관련된 주요 특성들이 노쇠 판정을 좌우하는 핵심 요인으로 나타났다. 걷고 앉았다 일어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길거나(3위, TUG 테스트), 종아리 둘레가 32cm 이하로 가늘거나(5위), 손아귀 힘이 약한 경우(7위) 등이 건강 악화와 상관 관계가 높았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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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 장애 vs. 노쇠 → 건강

이번 분석에서 고령자의 건강 상태는 역동적이라는 점도 확인됐다. 기반 조사 당시 건강 상태였던 참여자가 6년 후 추적 조사에서 사망에 이르기도 하고 경미한 노쇠 상태였던 참여자가 6년 후 추적 조사에서 건강을 되찾는 경우도 있었다.

조사 첫 해 건강으로 분류된 참여자의 6년 후 건강 분포도는 건강 44%, 경미한 노쇠 28%, 노쇠 2%, 장애 발생 20%, 사망 7%였으며, 경미한 노쇠 단계 참여자의 6년 후 건강 분포도는 건강 34%, 경미한 노쇠 33%, 노쇠 5%, 장애 발생 19%, 사망 9%였다. 노쇠 단계 참여자의 6년 후 건강 분포도는 건강 1%, 경미한 노쇠 32%, 노쇠 18%, 장애 발생 21%, 사망 28%였다.

디자인 = 한유진
디자인 = 한유진

노인노쇠코호트사업 책임 연구자인 김미지 교수는 “고령자의 건강 상태는 개인의 건강 관리 노력과 사회적 지원 여부에 따라 변화할 수 있다”면서 “고령자의 노쇠 완화 요인과 노쇠 악화 요인에 대한 연구는 초고령 사회에서 보건 정책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단한 각오로 보건복지 체계를 바꿔 나가야”

이번 분석 결과를 토대로 각종 실태 조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고령 인구의 상당수는 이미 노화의 취약 경로에 있거나, 가까운 시일 내에 취약 경로에 들어설 가능성이 높다.

2023년 노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5세 이상 노인의 86.1%가 만성질환을 한 가지 이상 앓고 있으며, 35.9%는 3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이에 따른 고령 인구의 다제 약물 복용 실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한지아 국회의원실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23년 상반기 기준으로 65~74세 인구 중 39만4029명, 75~84세 인구 중 45만6666명, 85세 이상 인구 중 18만5939명이 10개 이상의 약물을 복용 중이다.

65세 이상 노인 진료비도 치솟고 있다. 2023년 기준, 노인 진료비는 48조 9011억원으로 전체 진료비의 44.1%에 달했다. 이는 전체 노인 인구의 약 70%가 받는 기초연금 소요 예산의 두 배와 맞먹는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고령화 추세는 가속화하고 있다. 1차 베이비붐 세대(1955~1964년생)와 2차 베이비 붐 세대(1964~74년생)에 속하는 1600만명이 고령 인구로 속속 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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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률 한림의대 가정의학 명예교수(전 대한노인병학회 이사장)는 “2050년에는 한국 인구의 약 40%가 65세 이상일 텐데, 지금부터 대단한 각오로 보건복지 체계를 바꾸지 않으면 나중에 손을 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인 진료비 폭증, 심각한 다제 약물 복용 등은 우리나라가 고령 사회에 맞는 보건 체계를 갖추지 못했다는 점을 보여준다”면서 “지금이라도 노인의학 전문과와 노인 주치의 제도를 만들고 방문 진료(재택 의료)를 활성화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건강 통계 자료 분석에 도움을 주신 분들

윤종률 한림의대 가정의학 명예교수

김미지 경희대 의과대학 의예과 융합의과학교실 교수

정희은 경희대 KHU-KIST 융합과학기술학과 박사과정

김성민 성균관대 미래인문학 기반 사회혁신 창업교육연구단 박사후 연구원

조선비즈
content@newsbel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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