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취임을 앞두고 달러 대비 유로화 가치가 연일 추락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로와 달러 환율이 2022년 이후 처음으로 패리티(parity·1대1 교환)를 밑돌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달러 독주 체제를 막아줄 유로가 고꾸라지면 원·달러 환율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관심이 쏠린다.
◇ 유로·달러 패리티 붕괴 코앞… 2022년 11월 이후 처음
19일 금융정보사이트 인베스팅닷컴에 따르면 유로·달러 환율(1유로당 달러가격, 종가 기준)은 지난 13일 1.0244달러까지 내려갔다가 16일 1.0302달러로 소폭 올랐다. 유로·달러 환율이 1.024달러선까지 내려간 것은 2022년 11월 21일 1.0241달러 이후 처음이다. 16일 환율을 미국 대선 결과가 나오기 전인 작년 11월 5일(1.0930달러)과 비교하면 두 달만에 6.1% 떨어졌다.
유로 가치가 떨어지면서 유로와 달러 환율이 패리티를 하회할 가능성도 커지고 있다. 유로화는 1999년 출범 이후 2000년 2월부터 2002년 11월, 2022년 8월~11월 두 차례 패리티를 밑돌았다. 그러나 이후 재차 반등하면서 대다수 기간에는 패리티 이상의 환율이 형성됐었다.
유로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은 역내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역내 요인으로는 독일과 프랑스 등 주요국의 내년 성장률 전망이 1%를 밑도는 등 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데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정책금리(연 3.5% 안팎)가 미국(4.25~4.5%)보다 낮게 형성돼있다는 점이 꼽힌다.
역외 요인으로는 트럼프 신정부가 예고한 보편적 관세(자국 내 수입품에 최대 2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 시행과 미국의 견조한 경제 펀더멘탈(기초체력) 등으로 글로벌 달러 강세 기조가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유로 가치를 상대적으로 하락시키는 작용을 한다.
시장에서는 유로 약세에 베팅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미국 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집계에 따르면 헤지펀드 등 비상업적(투기적) 목적의 유로 순포지션(매수약정-매도약정)은 작년 10월 말(2만8500계약) 순매도로 돌아섰고, 미국 대선 이후 매도세가 강해졌다. 이달 초에도 7만계약 가까이 순매도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김용준 국제금융센터 전문위원은 “주요 투자은행들은 미국 대선 이후 유로화 전망을 7% 내외 추가 약세 쪽으로 환율 전망을 수정했다”면서 “이미 유로당 1달러 수준에 임박한 상황이라 조만간 패리티를 하회할 여지가 상당한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 과거 붕괴 땐 환율 15% 올라… 금융·수출 영향 가능성
유로화 약세는 우리나라 경제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우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유로·달러 베리어 옵션(특정 환율에 도달하면 자동으로 활성화되거나 소멸되는 옵션)이 소멸되면서 관련 달러 헤지 수요가 일시에 집중될 수 있다.
옵션이란 특정가격으로 상품·주식·외화 등을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옵션이 소멸되기 전에는 유로화 가치가 떨어지더라도 사전에 정해진 가격으로 달러를 매수할 수 있어 환 헤지가 가능했는데, 소멸 이후에는 불가능해지므로 투자자들은 유로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방식으로 시장을 떠날 수 있다.
달러 매수세가 거세지면 글로벌 외환시장에서 다른 통화에 대한 투자 심리에도 영향을 미쳐 원·달러 환율 상승을 유발할 수 있다. 기획재정부에 따르면 패리티가 처음 무너졌던 2000년 연평균 원·달러 환율은 1264.5원을 기록하면서 전년(1138원) 대비 11.1% 올랐다. 이듬해에는 1313.5원으로 집계되면서 3.9%가량 더 뛰었고, 2002년에는 1186.2원으로 낮아졌다.
두 번째로 붕괴됐던 지난 2022년 8월부터 11월에는 환율 상승세가 더 가팔랐다.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8월 초 1300원대였던 환율은 한 달 뒤인 9월 중순 1400원을 넘어섰다. 이후 레고랜드 사태까지 겹치면서 환율은 그해 10월 21일 장중 1441원까지 치솟기도 했다. 환율은 그 후로도 1350원대를 유지하다가 11월 말에야 1310원대로 내려왔다.
원화 약세는 환차손을 우려한 국내 주식 투자자금의 순유출로 이어져 외환·금융 시장 불안정성을 고조시킬 수 있다. 실제로 트럼프 당선으로 환율이 1400원을 넘겼던 작년 11월 외국인은 국내 주식 4조1540원어치를 팔아치웠다. 비상계엄으로 환율이 1490원에 육박했던 작년 12월에는 국채 선물 시장에서 15조8949억원어치를 순매도하면서 3년 3개월 만에 신기록을 쓰기도 했다.
수출품 가격경쟁력 개선 효과도 제한적일 전망이다. 현재 세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란-이스라엘 전쟁, 중국경제의 불확실성 고조 등으로 총수요가 줄고 경기 하방압력이 높아진 상태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세계경제 성장률은 2021년 6.2%에서 지난해 2.4%로 성장세가 크게 둔화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격이 내려가더라도 수출 증가를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유로·달러 패리티가 깨지면 달러 강세가 더 심해져 원화도 추가 약세를 보일 수 있다”면서 “이는 투자 심리와 소비 심리를 위축시키고 수입물가 부담을 키워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수출 가격 경쟁력이 생기겠지만 글로벌 경기 둔화로 수출 물량이 감소해 기업의 매출도 하락할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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