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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은 명령, 법은 법”이라며 부역자가 된 ‘사법 기술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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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불면증에 시달린 시민들, 자영업자들, 시위대의 소음에 지친 주민들…12.3 친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지만 많은 피해자를 남겼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뜬금없는 12.3 계엄 당일 밤,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는 명령을 받았던 계엄군 병사들이 첫 피해자들이다. 상관의 명령을 어기느라 일부러 당나라 군대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던 병사들은 그날 밤의 트라우마로 아직도 힘들어 한다.

피해자는 또 있다. ‘내란 수괴’ 혐의로 체포영장이 나온 윤석열을 지키라는 강경파 ‘호위무사’들의 명령을 받은 대통령 경호처 직원들이다. 윤석열은 딱 43일 동안 용산 한남동 관저에서 농성을 하며 버텼다. 400년 전쯤인 병자호란(1636) 때 인조의 남한산성 항전에 빗대어 ‘석열산성’ 또는 ‘한남산성’이란 얘기마저 나돌았다. 그동안 경호처 직원들은 차벽을 세우고 철조망을 두르는 등 몸고생과 더불어 마음고생이 많았다. 군 탈영병처럼 ‘석열산성’에서 빠져 나오는 것을 고민했을 듯하다(관저 입구를 가로막은 버스 안에 열쇠가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명령은 명령, 법은 법”

“명령은 명령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봉기(아랍어로 인티파다 intifada, 2000-2005) 때 일부 이스라엘 전폭기 조종사들이 자조적으로 내뱉었던 말이다. 아랍인을 맹목적으로 증오하는 유대인 조종사들이야 “내키지 않지만, 명령이니까…”라는 말들을 주고받진 않았을 것이다. 2023년 10월부터 이어져온 팔레스타인 가자(Gaza) 폭격은 1월16일 휴전 합의로 곧 멈춰지겠지만, 15개월 동안 팔레스타인 주민 4만7000명이 죽고 11만 명 넘게 다쳤다.

민간인 주거지역을 마주잡이로 공습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전쟁범죄다. 2000-2005년 사이의 무력충돌 때엔 30명쯤의 이스라엘 전폭기 조종사들이 ‘폭격 명령’을 거부했었다. 이번 전쟁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출격 거부 움직임은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스라엘 군 쪽에서 말이 새나가는 것을 막고 조용히 수습하면서 쉬쉬했을 것이다).

“법은 법이다.” 악법도 법이란 말이 있듯이 실정법은 지켜져야 한다는 말이다. 나치 히틀러정권 아래서 독일 법조인들은 ‘법은 법’이란 말들을 주고받으며 전쟁범죄의 하수인으로 봉사했다. 박정희․전두환 독재시절에 고분고분했던 사법부의 판·검사들도 또한 자조적으로 ‘법은 법’이란 말들을 주고받았다. 그 말 속엔 비판이나 저항 의지가 담겨 있지 않다. 권력자가 실정법을 들먹이며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합리화할 때 ‘사법 기술자’로 봉사할 뿐이다.

탈영한 뒤 헌병 죽여도 ‘긴급 피난’ 인정

어떤 조직이든 하급자는 상부의 명령이나 지시를 따라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 특히 전시 아래서의 항명이나 탈영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군법재판까지 가지 않고 탈영병을 즉결 처형했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탈영했던 한 독일군 병사에 얽힌 드라마 같은 사례 하나를 보자.

1943년 작센 출신의 한 사병이 동부전선의 포로수용소에서 감시병으로 있다가 탈영했다. 처갓집에 숨어 있던 사병은 독일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송 도중에 그는 몰래 숨겨놓았던 권총으로 헌병의 등을 쏴 죽이고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도망쳤다. 전쟁이 끝나 고향인 작센으로 돌아온 뒤, 그 탈영범은 다시 붙잡혀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1946년 봄 서독 작센주 검찰은 공무원(구 독일군 헌병)을 살해한 죄로 그 탈영병을 기소하려 했다. 탈영한 데다 살인까지 저지른 그는 “전쟁포로들이 겪는 비인간적인 대우에 혐오감을 느꼈기 때문에 탈영했다”고 주장했다. 얼마 안 가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작센주 검찰총장의 결정에 따라 풀려났다. 탈영과 헌병 살해가 서독 형법 제54조(긴급 피난)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를 풀어주며 검찰총장이 했던 말을 들어보자.

[그 당시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법이라 공표한 것들은 이제 효력이 없다. 히틀러와 카이텔(독일국방군 총사령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교수형)의 군대에서 탈영한 행위는 우리의 법적 견해에 비춰볼 때, 그 탈영병을 비난하고 처벌해야할 잘못에 해당되지 않는다. 탈영은 결코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프랑크 잘리거, 「라드부르흐 공식과 법치국가」, 길안사, 2000, 139쪽).

위에 옮긴 글은 구스타프 라드브루흐(1878-1949, 하이델베르크대, 형법학, 법철학)가 1946년에 쓴 논문(‘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에서 옮겨왔다. 독일인 연구자 프랑크 잘리거(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대, 형법․법철학)가 ‘라드브루흐 공식'(Radbruchsche Formel)을 주제로 쓴 박사학위 논문(‘라드브루흐의 공식과 법치주의’, 1999)을 바탕으로 낸 책 끝에 부록으로 실려 있다.

▲ 1942년 8월26일 베를린에 모인 ‘히틀러의 법률가들’, 왼쪽부터 롤란트 프라이슬러,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오토 게오르크 티어라크, 커트 로텐버거. ⓒBundesarchiv, 위키미디어
▲ 1942년 8월26일 베를린에 모인 ‘히틀러의 법률가들’, 왼쪽부터 롤란트 프라이슬러,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오토 게오르크 티어라크, 커트 로텐버거. ⓒBundesarchiv, 위키미디어

라드브루흐, “정의가 불법적 명령에 앞선다”

라드브루흐는 1920년대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사회민주당 소속의 국회의원과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라드브루흐를 법철학자로 기억하는 것은 그가 내놓은 논리 때문이다. ‘실정법이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면, 그 법은 부당한 것이고 정의에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는 이른바 ‘라드브루흐 공식’이다.

이 공식의 잣대로 재면, 포로수용소에서의 인권 침해는 ‘실정법이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참을 수 없는 정도’로 참혹했다. 나치 시절이었다면 그 탈영병은 (헌병을 죽이지 않았더라도) 약식 재판 끝에 빠르게 처형됐을 것이다. 하지만 서독 검찰은 나치 군 형법을 어기고 탈영한데다, 그를 붙잡으려는 헌병을 죽이기까지 했음에도 ‘긴급 피난’이라며 죄를 묻지 않았다.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독일 헌병을 죽이고 도망치는 것이 ‘긴급 피난’으로 받아들여졌다. 패전 뒤의 반나치 분위기를 짐작하게 만든다.

12.3 친위 쿠데타 실패 뒤 경호처 직원들은 조직의 명령에 따라 ‘범법자’인 윤석열을 지켜줘야 하느냐, 아니면 상식과 양심에 따라 행동해야 하느냐로 고민했을 것이다. 현행 ‘공무원 행동강령'(대통령령 32661호) 제2조는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공정한 직무수행을 현저하게 해치는 지시)을 내렸을 때 거부할 수 있도록 못 박고 있다(군인과 달리 공무원에겐 항명죄가 없다). 결국은 윗선의 부당한 명령을 따르느냐 거부하느냐는 결단의 문제다.

“독일 법원을 나치 범죄의 도구로 이용”

독일 법철학자 라드브루흐는 나치 독일 패망 다음 해인 1946년, ‘법률적 불법과 초법률적 법’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이렇게 나치 법체계를 비판했다.

[민족사회주의(나치)는 두 가지 원칙을 수단으로 군부와 사법부를 장악했다. 그것은 바로 ‘명령은 명령이다’라는 원칙과 ‘법률은 법률이다’라는 원칙이었다. ‘명령은 명령’ 원칙은 무제한적으로 적용되진 않았다. 이에 반해 ‘법률은 법률’ 원칙에는 어떤 제한도 없었다. 이 원칙은 법실증주의 표현으로, (나치 정권에서) 십여 년 동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독일 법률가들을 지배했다.](프랑크 잘리거, 「라드브루흐 공식과 법치국가」, 길안사, 2000, 132-133쪽에서 재인용).

위 인용문에서 ‘명령은 명령’ 원칙이 ‘무제한적으로 적용되진 않았다’는 표현은 딱 맞는 얘긴 아니다. 나치 군 형법 제47조에는 상급자가 범죄를 목적으로 내린 명령에 대해선 복종의무가 없다는 규정이 있긴 했다(위에서 살펴본, ‘공무원 행동강령’ 제2조와 같다). 독자분들도 짐작하듯이, 독일군에서 이런 문서상의 규정은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지켜지기 어려웠다. 침략전쟁을 벌이던 삼엄한 시기의 명령 불복종은 즉결 처형으로도 이어지곤 했다.

나치 히틀러 정권의 독재를 받쳐주는 실정법이 문제였다. 나치 독일의 사법부는 히틀러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많이 내렸다. 나치 정권을 비난하는 낙서를 남긴 자영업자, 탈영한 젊은 병사 등 (직업적인 반나치 투쟁가와는 거리가 먼) 독일의 보통사람들이 사형 판결을 받고 죽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라드브루흐는 튀링엔 주 검찰총장의 입을 빌려 “독일 법원이 (나치) 범죄의 도구로 이용됐다. 독일 법관들을 ‘살인자’로 보는 것 말고 다른 결론이 있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프랑크 잘리거, 135-136쪽).

진리와 법 감각 없고 인성(人性)이 문제인 지도자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범죄가 저질러진 사례를 둘 꼽으라면,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과 독일이 벌인 전쟁범죄다. 라드브루흐는 나치 독일이 그렇게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지르게 된 가장 큰 이유를 나치 독재자 히틀러의 비뚤어진 인성(人性)에서 찾는다. 그의 논문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히틀러의 인격이 갖는 가장 뚜렷한 속성은-그것은 모든 민족사회주의(나치) ‘법’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기도 하다-진리와 법에 대한 감각이 완전히 상실돼 있었다는 점이다. 진리에 대한 감각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선동적인 연설이 효력을 발휘하면 어떠한 수치심과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곳이 ‘진리’라고 규정할 수 있었다. 또한 법에 대한 감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기에 그는 노골적인 자의를 법률로 만드는 데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을 수 있었다.](프랑크 잘리거, 141쪽).

아마도 이 인용문을 읽는 독자분들은 히틀러라는 이름 대신에 (지난주 선동을 주제로 한 글에서 살펴봤듯이) 미국의 트럼프나 윤석열을 넣어도 문맥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 것이다. 20세기의 괴물 히틀러는 거짓 선동으로 독일 보통사람들의 판단을 흐리면서 증오심을 부추겼고, 끝내 침략전쟁과 그에 따른 전쟁범죄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21세기의 트럼프와 윤석열도 ‘진리와 법에 대한 감각’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다. 언제라도 갈등 상황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할 위험한 인물들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 가운데 상당수는 ‘내란 수괴’ 윤석열이 12.3 계엄 뒤 법적 정치적 책임을 지려들기는커녕, 윗글처럼 ‘수치심과 망설임도 없이’ 이런 저런 구차한 꼼수로 버티는 찌질한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느낄 것이다. 외국의 언론들도 이런 모습들을 관심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

“히틀러는 최고 입법자이자 최상위 판사”

“법은 법이다.” 나치 히틀러의 법률가들은 이런 말들을 주고받으며 나치 전쟁범죄의 하수인으로 일했다. 특히 나치 친위대 소속 판검사들은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집행 실무자들을 사법 처리하려고 나서질 않았다.

헤린더 파우어-스투더(오스트리아 빈대학, 윤리학․정치철학)는 나치 독일법에 초점을 맞춰 법의 합리성과 규범성을 깊이 들여다 본 연구자다. 그는 근래에 쓴 책(Justifying Injustice, 2020)에서 히틀러 시대의 독일 법률가들이 합법성과 정의를 추구해야 하는 법정신을 버리고 독재 체제의 하수인이 됐다고 지적한다. ‘왜곡된 나치 윤리’에 따라 ‘그들에게 정해진 임무를 성실히 완수하는 데서 자신들의 직업적 성실성을 찾았다’는 것이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나치의 법률가들」, 진실의 힘, 2024, 246쪽).

물론 몇몇 법률가들은 그 나름으로 법과 정의를 지키려 했다. 파우어-스투더는 그 한 보기로 콘라트 모르겐 판사를 꼽았다. 1941년1월부터 1942년5월까지 크라쿠프(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까운 폴란드 남부 중심도시)의 나치 친위대법원 판사로 일했던 모르겐은 부패하고 강제수용소의 ‘불법적인 살인’을 저지르는 나치 친위대의 고위급 장교들을 벌주려고 나섰다. 하지만 하인리히 힘러 친위대 사령관에게 찍혀 판사복을 벗고 이등병으로 강등됐다.

그 뒤 1943년5월 힘러는 모르겐을 베를린 제국형사경찰청 소속 나치친위대 판사로 불러들였다. 강제수용소 안의 부정부패에 진저리를 치던 힘러가 강직한 성품을 지닌 법률가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모르겐은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사령관 카를 오토 코흐에게 사형언도를 내렸고, 실제로 코흐는 나치 패망 직전인 1945년 4월 처형됐다.

모르겐은 아우슈비츠와 루블린에서의 현장 조사를 통해 그 지역들에서 집단학살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찾아냈지만, 힘러의 명령에 따른 것임을 알고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힘러의 뒤에는 물론 히틀러가 있었다). 모르겐이 지닌 한계는 뚜렷했다. 힘러의 승인을 받아 강제수용소 사령관들의 부정부패를 막는 역할을 했을 뿐, 나치 전쟁범죄를 막거나 그 몸통인 친위대 사령관, 나아가 히틀러를 기소할 힘은 없었다. 패전 뒤 모르겐은 잠시 미군 방첩대에 잡혀 있다가 얼마 뒤 무혐의로 풀려났다. 그 무렵 그가 남긴 증언을 들어보자.

[나치 국가의 법은 히틀러 총통의 명령이기도 했다. 나치 국가의 총통은 모든 권한을 자기 손안에 통합했다. 히틀러는 국가의 수반일 뿐만 아니라 최고 입법자이자 최상위 판사이기도 했다. 국가수반이자 최고사령관을 법정에 세울 수는 없었다.](헤린더 파우어-스투더, 239-240쪽)

▲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피고들. 왼쪽부터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헤르베르트 클렘, 오스발트 로타우크, 루돌프 외셰이. ⓒ위키미디어
▲ 뉘른베르크 후속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피고들. 왼쪽부터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헤르베르트 클렘, 오스발트 로타우크, 루돌프 외셰이. ⓒ위키미디어

‘히틀러의 법률가들’ 재판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12개 후속재판 가운데 세 번째로 열린 것이 16명의 나치 법률가 재판이다. 이른바 ‘히틀러의 법률가들’을 단죄한 재판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16명의 독일의 법학자, 법조인 가운데 9명은 법무부 고위 관료였고, 나머지는 특별법정과 인민법정에서 판검사로 재직하면서 히틀러와 나치 이념에 따른 ‘어용 재판’을 이끌었던 자들이다. 피고인들은 나치의 우생학적 인종주의 편견이 담긴 법률을 내세워 나치의 인권탄압을 법적으로 떠받든 혐의로 심판을 받았다.

1947년 3월5일부터 12월4일까지 9개월 동안 이어졌던 재판에서 피고인들은 한결같이 무죄를 주장했다. 제3제국의 실정법에 따른 재판이었기에 합법적이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재판 결과는 4명에게 무기징역형(법무장관대리 프란츠 슐레겔베르거, 법무장관 헤르베르트 클렘, 뉘른베르크 특별법원장 오스발트 로타우크, 로타우크의 뒤를 이은 뉘른베르크 특별법원장 루돌프 외셰이), 나머지 6명에겐 5-10년 사이의 유기징역이 매겨졌다(4명은 풀려남).

이 재판을 지켜보던 많은 독일 시민은 피고인들이 저질렀던 악명 높은 범죄 행위에 견주어 판결이 너무 낮게 매겨졌다고 여겼다. 교수형을 받은 피고는 하나도 없었다. 더구나 이들 피고인들은 동서냉전의 분위기를 타고 슬금슬금 풀려났다. 유기징역을 받은 자들은 1951년, 무기징역을 받은 자들은 1957년까지 모두 자유의 몸이 됐다.

나치 선전 포스터 찢었다고 사형 선고

법무장관대리 프란츠 슐레겔베르거(1876-1970)는 나치 법률가 재판의 16명 피고인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다. 1941년 법무장관 프란츠 구르트너가 죽자, 슐레겔베르거가 1년 동안 법무장관 대리를 지냈다(그를 이어 1942년 법무장관이 된 오토 게오르크 티에라크도 ‘히틀러의 법률가’로 악명이 높았다. 나치 특별재판소장을 맡고 있다가 글 바로 밑에서 살펴볼 ‘미치광이 롤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재판소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티에라크는 1946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앞두고 자살했다).

슐레겔베르거가 법무장관 대리에 있는 1년 동안 나치 법원의 사형 선고 건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그는 독일 점령지구인 폴란드에서 나치 선전 포스터를 찢을 경우 사형 선고를 내리는 엄격한 폴란드형법을 앞장서 만들었다. 한 폴란드 피고가 징역 2년의 형을 받자,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그를 넘겨받아 처리하라’고 요청하는 집요함을 보이기도 했다.

슐레겔베르거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유대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전면적인 박해를 위한 법적 절차를 제도화하고 지원했다는 혐의도 따랐다. 하지만 복역 기간은 3년에 그쳤다. 1950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풀려났다. 그로부터 1970년까지 20년 동안 슐레겔베르거는 독일인 월 평균소득의 5배가 넘는 거액의 연금을 달마다 챙겼다[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1961년도 흑백영화 ‘뉘른베르크 재판(Judgment at Nuremburg)’에서 명우 버트 랭커스터가 그의 역할을 맡아 열연했다].

‘가학적이고 무자비한, 피에 굶주린 판사’

종신형을 받은 4인 가운데 하나인 헤르베르트 클렘(1903-1963)은 1944년 1월부터 1945년 5월 항복 때까지 법무장관을 지냈다. 독일 검찰 출신으로 일찍부터 나치 돌격대(SA)에 몸을 담았던 골수 나치 법률가다. 히틀러의 최측근으로 비서부장이었던 마르틴 보르만과 가깝게 지냈다(보어만은 1945년 패전 뒤 도망치다가 공습으로 사망 추정). 클렘에겐 ‘가학적이고 무자비한 법률가’라는 악명이 따라붙었다. 법무장관 재임 중에 그는 사형선고를 면해달라는 탄원을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종신형을 받았지만 감형을 받은 끝에 1957년 풀려났다.

오스발트 로타우크(1897-1967)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해(1933)에 뉘른베르크의 검사가 됐고, 뉘른베르크 특별법원장을 지냈다. 친위대와 손을 잡고 나치의 인종차별 정책을 적극 지지하며 많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942년의 한 재판에서는 25세의 폴란드 노동자에게 사형을 선고하면서 “피고는 폴란드 하위 인간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열등함이 분명히 있다”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로타우크를 단죄한 판결문은 ‘독일에서 나치의 비밀 음모와 잔인함을 의인화한 인물’이며 ‘가학적이고 사악한 인물’이라 비판했다. 종신형을 받았지만 곧 20년 형으로 감형 받았고, 1956년 자유를 얻었다.

루돌프 외셰이(1903-1980)도 골수 나치 출신이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기 2년 전인 1931년 나치당원이 됐다. 뉘른베르크 특별법원의 수석 판사 출신으로 1943년 로타우크의 뒤를 이어 뉘른베르크 특별법원장에 올랐다. 외셰이는 재판 가정에서 피고인들에게 욕설과 폭언 등 갖은 모욕을 안겨주곤 했다. 그가 워낙 사형선고를 많이 내려 사람들로부터 ‘피에 굶주린 판사’라는 악명을 얻었다. 로타우크와 마찬가지로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20년 형으로 감형을 받은 뒤 1955년에 풀려났다.

자신의 범행 장소에서 죽은 ‘미치광이 롤란트’

정작 뉘른베르크 재판정에서 죄를 물었어야 할 ‘히틀러의 법률가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법무장관을 지낸 프란츠 귀르트너는 1941년에 죽었고, 그의 후임 장관 오토 게오르크 티어라크는 재판이 열리기 앞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잇단 사형 판결로 숱한 사람들을 떨게 했던 나치 특별재판소장(인민법원장) 롤란트 프라이슬러(1893-1945)는 독일 항복 직전인 1945년 2월 베를린 공습으로 죽었다.

‘미치광이 롤란트’라는 별명이 말해주듯이 프라이슬러는 나치 법정을 지배했던 ‘히틀러의 법률가’였다. 그가 서슬 퍼런 결정에 따라 숱한 사람들이 처형됐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형 판결을 내린 사람은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독일 고백교회 지도자)의 형인 클라우스 본회퍼(변호사)였다. 널리 알려졌듯이, 1944년 7월20일 독일국방부의 반히틀러 세력은 ‘발키리 작전’이란 이름 아래 라슈텐부르크 지역에 있던 야전사령부(늑대소굴Wolfsschanze)에서 히틀러를 폭약으로 죽이려다 실패했다. 본회퍼 형제는 그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붙잡혀 죽었다.

클라우스에게 사형 판결을 내린 다음날(1945년 2월3일), 프라이슬러는 또 다른 피고인들에게 사형 언도를 내리려고 베를린 포츠담광장에 가까운 특별재판소 앞에 왔다가 때마침 연합군의 공습을 받고 죽었다. 프라이슬러에게서 사형 판결을 받은 동생의 감형을 호소하려고 마침 그곳에 왔던 한 의사는 특별재판소 안마당에 놓인 시신이 ‘미치광이 롤란트’ 임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베를린 시민은 “죄 많은 프라이슬러가 자신의 범행 장소 바로 앞에서 신의 심판을 받았다”고 속삭였다.

‘피의 재판소’ 만든 히틀러

나치 특별재판소는 히틀러의 작품이다. 정치범들을 다루는 독일 사법부의 판결이 너무 솜방방이라고 마음에 들지 않아 했던 히틀러는 독일 총리에 오르고 15개월 뒤인 1934년 4월 특별재판소를 만들었다. 정치적 반대세력을 겨냥한 사법적 도구였기에 작은 저항에도 처벌은 가혹했다. 사람들은 그 재판소를 가리켜 ‘피의 재판소’라 불렀다. 독일 언론인 귀도 크놉이 히틀러의 충견(忠犬)들을 다룬 책(Hitlers Helfer, 1998)에서 관련 대목을 보자.

[기존 사법부를 불신하고 있던 히틀러는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피의 재판소’를 만들었다. 히틀러는 제국의사당 방화사건(히틀러 총리 취임 한 달 뒤인 1933년 2월)에 대한 판결이 너무 가볍다고 여겼다. (일부 피고에 대해) 라이프치히 대법원에서 ‘기각’ 판결을 내리자 매우 화가 나 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최고 법원으로부터 국가반역죄에 관한 모든 소송사건뿐 아니라 정치와 관련한 모든 소송에 대한 재판 권한을 박탈했다.](귀도 크놉,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히틀러의 조력자들」, 울력, 2011, 329-330쪽).

히틀러의 시각에서는 ‘나치 특별재판소 최고의 임무는 법에 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사회주의(나치)의 적대자들을 섬멸하는 것’이었다. 1942년 8월20일 특별재판소장에 임명된 프라이슬러는 히틀러의 입맛에 딱 맞는 사형집행인이었다. 그는 재판소장에 임명되자마자 히틀러에게 충성 편지를 보냈다. “특별재판소는 총통 각하께서 직접 사건을 판단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면서 판결을 내리고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귀도 크놉, 328쪽).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 이래로 한국의 사법부가 독재자에게 보였던 저자세를 떠올리는 문장이다.

▲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재판에 앞서 나치식 경례를 특별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가운데). ⓒ위키미디어
▲ 1944년 7월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재판에 앞서 나치식 경례를 특별재판소장 롤란트 프라이슬러(가운데). ⓒ위키미디어

‘히틀러 부역자’, 슈미트와 하이데거

1940년대 초 독일군 점령지역이 넓어지면서 처리해야 할 유대인과 전쟁포로의 숫자도 덩달아 크게 늘어났다. 나치의 박해가 전쟁범죄 수준에 이르게 됐다. 여기서 하나 떠오른 물음. 히틀러의 유대인 절멸 정책을 비롯한 전쟁범죄 행위가 독일 법체계로는 문제가 안 됐을까. 벤저민 카터 헷(뉴욕시립대, 역사학)에 따르면, 전혀 문제가 안 됐다.

[법학자들은 헌법적 합법성이라는 오래된 개념 대신 ‘총통 권력’이라는 새로운 법개념에 관해 이야기했다. 나치는 독일의 주요 법률, 특히 형법과 민법을 모조리 새로 개정하겠다고 말했지만, 개정을 마무리하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직접 만든 법조차 히틀러가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데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벤저민 카터 헷, 「히틀러를 선택한 나라」, 눌와, 2022, 305쪽).

헷 교수는 제국의회 방화사건(1933)을 비롯해 1930년대 독일 베를린에서 벌어졌던 형사사건․재판을 다룬 여러 권의 책을 써냈다. 변호사이기도 한 그는 나치 정권 아래서 독일 사법부와 법조계가 “히틀러가 무슨 말을 하든 법적으로 끼워 맞추느라 애를 썼다”면서 그 대표적인 인물로 카를 슈미트(베를린대, 법학, 1888-1985)를 꼽았다.

슈미트는 나치 당원이었고 “독일 법이 유대 정신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는 궤변을 펴는 등 지도자(Führer) 히틀러의 초법적 권력을 옹호했다는 비판이 따른다. 독일 법학계의 친나치 지식인으로 슈미트가 있었다면, 독일 철학계엔 마르틴 하이데거가 있었다(하이데거의 친나치 행각에 대해선 연재 33 참조).

합리적 이성을 지닌 독일인이라면 지금도 부끄럽게 여기는 대목이지만, 독일 법조계는 (마르틴 하이데거가 몸담았던) 독일 학계와 마찬가지로 ‘히틀러 독재와 전쟁범죄의 부역집단’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 대목에서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와 1980년대 전두환 군사정권을 찬양·미화했던 한국의 법조계와 지식인들의 얼굴이 겹쳐온다.

다음 주엔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노예노동으로 부려먹으며 돈주머니를 불렸던 ‘히틀러의 기업가들’ 재판을 살펴본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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