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을 몇 년 앞둔 1940년을 전후한 시기. 이때는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던 시기로 우리나라의 입장에선 암흑기 속의 암흑기에 해당한다. 내선일체를 비롯하여 조선인은 성과 이름을 강제로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우리 말 사용 금지와 1941년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따른 공출(供出), 징병, 징용, 학도병, 정신대 등 인적·물적 수탈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이다. 이런 엄중한 시기에 연평도의 천주교 활동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1920~1940년대 종교활동은 독립운동
지난 호에서 살펴봤듯이 이 시기에 있었던 대표적 가톨릭 활동은 청년회와 절제 운동이 특징이었고, 독립운동의 일환이었다. 이 활동은 3·1운동 이후 해성강습소 설치나 야학을 통해 초등교육의 토대를 마련하면서 전개한 문맹 퇴치 운동, 그리고 영세를 받은 청년 신자를 규합해 부흥청연회를 조직하여 섬내 풍속교정, 구습타파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점차 신자의 증가는 조직 구성의 확대로 이어졌고, 남자는 금주·금연, 여자는 절미(節米)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 운동은 신자들이 취한 소극적 경제 운동이자 영혼 구원과 함께 사회적 구원도 감당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사회운동이었으며, 3·1운동 이후 교육과 산업 발전을 통한 독립운동 즉 실력양성 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전덕규가 있었다.
▶ 광복 전후의 연평도 천주교
연평도의 천주교 활동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견고한 종교 조직이자 사회 조직을 겸하였다. 대표적 사례가 상가(喪家) 돌봄과 교회 상여(喪輿)를 만들어 지역 사회와 함께했다. 상가가 발생하면 연도(煉禱)를 바치고, 밤새워 궂은일을 함께 했으며 신자들이 직접 상여를 매고 출관에서 하관 예절까지 경건한 교회 예식을 거행하여 섬에서는 예절과 엄숙한 분위기에 주민들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교회 상여를 만들어 신자들이 상을 당했을 때 대여하여 함께 어려움을 나누었다.
한편, 1940년에 조직한 가톨릭 청년회는 선교와 신자 재교육을 통해 유대감과 신앙심을 북돋웠으며, 청년회 간부 전덕교, 이태화, 김원식은 교회 발전을 위해 헌신하자는 뜻에서 ‘의화삼형제(義和三兄弟)’를 맺어 교회의 원활한 활성화가 이루어졌다.
특히 일제의 엄중한 시기에 방유룡 신부의 후임으로 안학만(安學滿), 김철규(金哲珪) 신부가 해주 본당에 부임하면서 연평도를 방문하였다. 특히 김철규 신부는 언변이 능통해 외교 능력이 좋았으며, 당국과 원만한 소통을 통해 교회의 종(鍾) 공출을 막고 성당을 보존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이후 광복과 함께 38도선이 생기면서 해주에 나가 살던 신자들이 다시 들어오게 되고, 연평도 천주교는 조직 재편성을 하게 됐다. 1947년에는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의 방문을 계기로 교우와 교회는 큰 복을 받게 됐고, 1948년에는 전응택의 선종에 이어 교회 발전에 큰 공이 있던 이만호가 2대 공소회장으로 추대됐다.
/김석훈 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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