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내란사태 국면에 노동조합의 존재감이 전에 없이 주목받고 있다. 12월7일 윤 대통령 첫 탄핵안 표결이 이뤄지던 국회 앞, 양경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의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는 선언은 이번 국면을 대표하는 슬로건이 됐다. 이와 함께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가 오프라인과 온라인의 광장을 달구고 있다. 전국금속노동조합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2월3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금속노조는 곧바로 성명을 냈다. 제목은 “저항하라, 금속노조는 선봉에 선다.” 금속노조는 “윤석열이 3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지금부터 금속노조는 저항의 최전선에 선다”고 썼다. “재갈을 물린다 해서 입을 다물지 않으며, 족쇄를 채운다 해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곤봉으로 때린다고 해서 가만히 맞지 않는다.” 성명은 “19만 금속노조는 투쟁으로 민주주의를 지켜낼 것이다”로 끝맺었다.
열두 문장의 성명은 SNS에서 ‘밈(meme)’이 됐다. SNS에서는 셀 수 없는 공유와 함께 “아프다” “뜨거운 눈물이 난다” “기개 멋있다” 등 다채로운 반응이 나왔다. 한 누리꾼은 “나에겐 (1980년 5·18민주화운동 때) 전남매일신문 기자 성명 이후로 뇌리에 콱 박힐 성명문일 듯”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노조의 말이 언론 기사 속 문장이 아닌 성명서 자체로 주목을 끈 이례적인 경우다. 이후 성명들도 SNS에 오르내린다. 한화오션 조선하청 노동자의 “이대로는 살 수 없다”, 옵티칼하이테크 해고 노동자의 “노동자는 쓰다버리는 소모품이 아니다” 등 문장들이다.
집회가 열리는 광장에선 금속노조의 무지개 깃발이 화제다.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선 금속노조 로고를 박은 무지개 깃발을 보고 “부끄럽지만 울컥했다, 초현실적이다(퀴어 아티스트 이반지하)”라는 반응이 나왔다. 트위터(X)에선 13일 현재까지 “나도 봤어 무지개 금속노조” “금속노조 무지개 깃발이라 괜히 감동”이라며 인증샷이 이어진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7~10일 화제의 성명과 깃발 뒤에 있는 활동가들을 인터뷰했다. 금속노조 김한주 언론국장은 성명을 작성했고, 김민정 여성국장은 2년 전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무지개 깃발을 첫 제안했다. 지금과 같이 뜨거운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이들은 “사람들이 표출하지 못했던 차별과 고통의 응어리들이, 성명에 나타난 정체성과 만난 것 같다”고 했다. 깃발이 보여준 노조 안팎 성소수자를 가시화하기 위한 노력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비상계엄에 대응하는 금속노조 성명은 윤 대통령의 계엄 선포 뒤 1시간가량 만에 발행됐다. 김한주 언론국장은 계엄 선포 사실을 기자 전화로 접한 뒤 현실 감각을 되찾는 데 10분이 걸렸다고 했다. “몸이 떨려오고 호흡이 어려웠다. 치가 떨렸다”고 했다. 국회 정문 앞 천막농성 중인 자동차판매연대지회에 생각이 미쳤다. 김선영 자동차판매연대지회장은 이미 페이스북 라이브를 켜고 “장갑차가 들어서고 있다, 계엄군이 지금 들어오고 있다”고 중계하고 있었다.
김 국장은 “계엄선포와 포고령이 내려진 뒤, 그 다음을 상상했다”며 “언론이 통제되고, 노동자는 잡혀가고, 어쩌면은 1980년의 광주처럼 사람을 총으로 쏴 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우리가 1987년 6월 항쟁을 겪고, 7·8·9 노동자 대투쟁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이 계엄을 거부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빼앗기겠구나. 공기처럼 누려왔던 민주주의를, 공포가 닥쳤다고 해서 위축되면 긴 시간 동안 빼앗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김 국장이 성명에서 “위축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그는 “그날 국회로 달려간 사람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 생각한다”며 “이 성명은 당일에, 바로 나가야 했다”고 말했다. 쓰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금속노조 차원의 입장은 중앙집행위원회에서 토론하고, 도출하고, 정돈해 낸다. 하지만 이번 성명은 지도부 확인을 거쳐 즉시 발행했다.
보통은 100회가 안 넘는 금속노조 게시판 조회수가 이번엔 7000회를 넘어섰다. SNS에선 성명을 ‘필사하겠다’, ‘외우겠다’는 반응도 나왔다. 이 같은 화제몰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고 했다. 김 국장은 “늘 그래왔듯 금속노조의 정체성을 성명으로 전했을 뿐인데, 지금까지 각자가 받아온 차별과 고통, 부당함의 응어리들이 금속노조 정체성이 나타난 성명과 맞닿아 터져나온 것 아닐까”라고 짐작했다.
“집회 무대를 보면서 얼마나 절박했으면 이 응어리들이 터져나온 걸까 생각했다. 여성 발언자가 눈물을 흘리며 얘기하고, 자신이 당해왔던 고통과 부당함을 말한다. 2030 여성과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무대에서 ‘생존’의 이야기를 꺼낸다. 밤새 자유 발언이 이어진다. 지금까지 표출하지 않았던 응어리가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다’는 문장과, ‘선봉에 설테니 저항하자’는 제안에 반응한 게 아닐까.”
금속노조는 내란사태 이튿날인 4일 바로 전 조합원 총파업(하루 2시간) 투쟁 지침을 내렸다. 보통은 금속노조에서 사업장을 넘나드는 총파업을 하려면 전국 사업장을 돌며 교육과 설득을 거쳐야 한다. 하지만 중집 단위에서 만장일치로 정치 총파업을 결정했다. 노동위에서 쟁의권을 확보하지 않았음에도 선언한, 이른바 언론이 말하는 ‘불법 파업’이었다.
김 국장은 이 결정을 두고 “노동자가 가진 가장 큰 힘은 생산을 멈추는 힘이다. 전 사회에서 가장 큰 발휘할 수 있는 힘은 노동자의 총파업이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중집에서도 이견이 없었다고 본다”고 말했다. 현대차와 기아차, 한국지엠 등 주요 사업장이 참여했다.
금속노조의 무지개깃발도 최근 한 달 새 유명해졌다. 실은 금속노조가 2년여 전부터 써왔다. 김민정 금속노조 여성국장은 윤석열 정부 출범 초기, 5월17일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에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 거리 행진 때 처음 무지개 깃발을 날렸다고 설명했다.
김민정 국장은 당시 무지개 깃발과 무지개 깃발 모양의 뱃지 굿즈를 제안했다. 시안을 만들고 사무처 내부 투표를 거쳐 지금의 금속노조 로고를 무지개 바탕 위에 그린 깃발이 제작됐다.
금속노조는 18만여명 조합원 중 여성이 6%다. 무지개 깃발이 SNS 이용자들에게 반가운 충격으로 다가온 배경 중 하나다. 그러나 무지개 깃발과 성중립 숙소 마련이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금속노조는 2021년 모범단협안에서 규정한 배우자 범위를 사실혼과 동성혼으로 넓혔다. 이에 앞서 줄곧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해왔다.
김 국장은 “금속노조는 민주노총이 그래왔듯이 여성위원회를 중심으로 성소수자 관련 사업을 벌여왔다. 무엇보다 금속노조에도 당연히 성소수자 조합원이 존재한다”며 “현수막과 깃발은 (금속노조 밖 성소수자와) 연대이기도 하지만 노조 내부에 성소수자 조합원이 있음을 알리는 메시지이기도 하다”고 했다. 그는 “제조업 벨트가 있는 경상권의 현장 전반에서 성소수자 이슈가 떠오르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무처와 중앙에선 눈여겨 보고 기뻐하고 있고, 이 물살을 타고 더 적극 사업을 벌이고 싶다”고 했다.
최근 집회에선 발언자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소개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일이 됐다. 8년 전 박근혜 퇴진 집회에선 볼 수 없던 풍경이다. 김민정 국장은 “그 모습을 보며 성소수자인 시민들이 지금까지 말할 기회가 너무 없었다는 것을, 동의 받거나 말해도 안전하다고 생각할 만한 장소가 없었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이번에 열린 광장은 성소수자인 시민들이 자신이 드러나도 괜찮은 자리, 안전한 자리라 생각하는 것 아닌가 싶다. 흔히 ‘세월호 세대’라 말하는 청년 시민들이 스스로 정체성을 드러내고 괜찮고, 드러냄으로써 주체가 돼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들은 내란사태 뒤 인상 깊은 장면으로 ‘낮은 곳에서 함께 싸우는 연대’를 꼽았다. 한화오션이 고용한 용역 직원들이 하청노동자들이 세우려는 농성텐트를 폭력으로 훼손하자 시민들이 달려왔다. 남태령을 찾았던 2030 여성들이 농성장에 자리를 펴고 같이 밤 샜다. 하루에 수백 건 후원이 쏟아지고, 1년이 된 경북 구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 고공농성에 물이 부족하다고 SNS에 올리니 시민들이 보낸 생수가 창고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김한주 국장은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와 같이 차별받아온 이들과 하청 노동자와 해고 노동자가 손 잡는 모습은 내가 금속노조에서 활동하며 꿈꿔왔던 장면”이라며 “함께 싸우는 연대가 돌이킴 없이 계속되기 바란다”고 했다. 김민정 국장은 “한 발언자가 ‘당신들이 지지하는 정권이 당선돼도 노조는 계속 싸워줄 수 있다’고 한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며 “금속노조는 언제든 사측, 자본,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워왔고, 또 싸울 준비가 돼 있다. 그렇기에 비상계엄을 통한 내란사태와 같은 갑작스런 국면에 곧바로 맞설 수 있었고, 시민들도 여기에 호응한 것 아닐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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