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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의회에 참석해 목청을 높인다.
“이슬람교도는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장해 우리 형제를 공격하고 죽이고 있다. 남자는 노예로 삼고 교회는 무너뜨리고 파괴되지 않은 곳은 모스크로 바꾸고 있다. 그들을 더 이상 용서하면 안 된다.” 8차례에 걸쳐 200년간 피의 보복으로 얼룩진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시작됐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 내세운 명분은 명료했다. 인간 세계의 거악을 제거하려면 신의 위임을 받은 성직자 계급이 앞장서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허울 좋은 정복 사업에 참여하기 위해 빈민 십자군, 템플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 병원 기사단, 튜턴 기사단 등이 깃발을 들었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왕들도 참전했다.
십자군 시대로 불리는 200년은 전쟁과 야만의 역사였다. 신의 이름을 차용해 영토와 권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죽어 나갔고 삶은 처참하게 무너졌다.
한국도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다. 과거 유럽의 십자군 전쟁이 비뚤어진 교리에 뿌리를 박고 있다면 한국의 십자군 전쟁은 굴절된 ‘정치 이념’에 기인하고 있다.
이권을 놓고 둘로 나뉜 상태에서는 항상 한쪽이 다른 쪽을 밀어내고 괴멸시키려 한다.
한국 정치에서는 보수를 표방하는 국민의힘과 진보를 내세우는 더불어민주당이 그렇다. 시대정신을 역행한 윤석열 대통령의 반동적인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 정국에서 상대방 증오와 척결은 극에 달한다.
윤 대통령은 수사기관의 소환 조사에 수차례 응하지 않고 있고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도 경호처의 물리력을 방패 삼아 무력화하고 있다. 새해 인사말에는 “실시간 생중계 유튜브를 통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고 있다. 정말 고맙고 안타깝다”며 지지층 결집을 부채질하고 있다. 서울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은 연일 탄핵 찬반 집회로 아수라장이다. 불구대천의 원수 대하듯 삿대질하고 경멸한다.
민주당과 민주당 지지 세력은 윤 대통령에 대한 신속한 탄핵을 압박하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탄핵 사유에서 내란죄를 철회하겠다”고 밝힌 것도 탄핵 심판을 최대한 빨리 진행해 조기 대선으로 직행하겠다는 의도를 깔고 있다. 이 같은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대통령은 따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고 있다.
국민의힘과 국힘 지지 세력은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신속한 사법 재판을 주장하고 있다. 이 대표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공직선거법에 대해 조속히 확정판결이 내려져야 한다고 맞불을 놓고 있다. 이 대표가 유죄 확정판결을 받으면 국힘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여야의 ‘편 가르기 정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광기를 띨 것이 뻔하다. 국민들도 내 편 네 편으로 나뉘어 한국 사회는 ‘정치적 38선’이 더욱 짙어질 것이다. 미국 CNN, 영국 BBC, 일본 NHK 등 외신은 갈라지고 찢겨진 한국 사회의 일그러진 현장을 실시간으로 내보내고 있고 해외 투자자들은 한국 경제에 불신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해법은 멀리 있지 않다. ‘법의 지배’라는 상식이 통하면 된다. 헌재가 8인 체제 회의에 들어간 만큼 탄핵 심판은 헌재 판단에 맡기면 된다. 여야가 구취 나는 정치 입김을 불어 넣지 않아야 한다. 윤 대통령 탄핵 심판이나 이 대표 후속 재판도 헌재와 법원, 법관이 좌고우면하지 않고 신속하고 공정하게 진행하면 될 일이다.
시대의 관용구인 상식과 정의에 맞게 윤 대통령 탄핵 심판과 이 대표 공직선거법 재판을 처리하면 된다. 꼼수를 부리고 굽은 샛길을 찾으려고 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국민은 갈라진다. 상대 세력에 대한 저주와 삿대질이 대한민국에 생채기를 내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정치를 넘어선 지혜, 바로 법의 지배다.
나라 경제는 비탈길을 굴러 내려가고 있고 눅진한 삶에 지친 국민들은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다. 지금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정치 시스템으로는 막다른 길에 내몰린 한국을 재건하기 힘들다.
여당과 야당은 우리 편이 얼마나 모였나 ‘집회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고 법의 지배를 따라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을 ‘정치 이념’ 십자군 전쟁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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