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 동성연애자들을 마구잡이로 모으고 있습니다.” “시진핑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중국에서 집회 참여하지 말라고 했더니 인원이 반의 반으로 줄었습니다.” 지난 5일 서울 한남동 윤석열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보수단체 집회에서 나온 발언이다. 중국인들이 대대적으로 탄핵집회에 개입했다는 음모론이 거세지고 있다. 음모론의 피해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증명했음에도 의혹은 부풀려졌다.
중국개입설들 따져보니
지금까지 확산된 중국 개입 관련 주장들 중 타당한 근거를 갖춘 건 없다. 현재까지 확산된 음모론은 집회 참가자가 들고 있던 중국어로 된 우유갑 △중국 대학교 옷을 입은 집회 참가자 사진 △한국을 정복하려 한다는 스티커를 부착한 차량 △외국인이 3분의 2였다는 연예인의 발언 등이다.
지난달 7일 탄핵소추안 표결 국면에서 우유갑으로 만든 초가 방송뉴스에 포착되면서 온라인 공간에서 ‘중국인 개입’ 논란의 시발점이 됐다.
서울 망원동에서 제로웨이스트샵(쓰레기를 최소화해 친환경 제품을 판매하는 곳) 알맹상점을 운영하는 고금숙 대표가 직접 글을 올려 해명하고 나섰다. 대만을 다녀온 매니저가 현지에서 마신 밀크티와 듀유 종이갑을 재활용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집회에 가기 전부터 이 유유갑으로 집회물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SNS에 올렸다.
정명희 알맹상점 매니저는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메시지로 ‘중국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라’, ‘주민등록증 보여달라’는 메시지가 많이 왔다”며 “화교나 중국동포가 아니냐는 공격도 많았다”고 했다.
정명희 매니저는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진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다수는 사실인지 아닌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며 “심증을 확인시켜줄 만한 이야깃거리가 더 필요했고, 부풀리는 게 핵심 같았다. 이름을 걸고 유튜브를 하는 이들도 개의치 않더라. 해명을 해도 의미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한편으로 이게 빌미가 돼서 나쁜 영향을 끼치면 어쩌나 걱정도 들었다”고 했다
구독자 29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감동란은 알맹상점측의 해명이 나오자 “해명은 무슨 중국어로 적힌 플래카드가 버젓이 있는데”라며 ‘중국어 플래카드’ 논란을 촉발시켰다. 한자로 쓰인 플래카드 사진이 근거로 제시됐다. 확인 결과 이는 도쿄 촛불집회에서 사용된 일본어 플래카드였다. 이 역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의 촛불집회 사진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지난달 7일에는 집회에 참석한 배우 정찬씨가 “집회에 외국인이 3분의 1이었다”고 말했다는 주장을 담은 게시물이 확산됐다. 참가자조차 외국 개입을 시인하는 것처럼 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정찬씨가 쓴 글은 집회 전 여의도에 전시회를 보러 갔는데 외국인이 3분의 1에 달했다는 내용으로 집회와는 무관했다.
윤 대통령 체포 국면에서 다시 중국인들이 집회에 대대적으로 참여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곳곳에서 한자 간자체로 쓰여진 스티커가 붙은 한 차량의 사진이 화제가 됐다. ‘扫韩行动组’(소한행동조)라는 스티커였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한국을 제거하는 행동조라는 해석과 함께 정치적 작전을 수행하는 간첩 조직이 있다는 음모론으로 이어졌다. 소한행동조는 면세점 물품 구매를 도와주는 곳이었다. ‘소한행동’은 한국을 제거하겠다는 게 아니라 ‘한국을 싹쓸이할 정도로 물품을 구매한다’는 의미다.
박성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가 검증 기사를 썼지만 포털에서 ‘소한행동조’라고 검색하면 음모론을 제기하는 블로그, 카페, 커뮤니티 글들이 뒤덮는 수준이다.
김민전 국민의힘 의원은 ‘탄핵 집회에 참석한 중국인’ 사진이 붙은 글을 공유하면서 출처 불명의 정보가 급속도로 확산됐다. 사진에는 한자로 된 대학교 엠블럼이 있는 점퍼를 입은 사람이 나온다. 글쓴이는 “언론은 한국 말하는 화교에게 다 넘어갔다”고 했다. 이 엠블럼은 칭화대의 것으로 보이는데, 칭화대는 한국 유학생이 많은 학교다. 사진이 언제 어느 장소에서 찍혔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진위 논란이 일자 김민전 의원은 게시물을 삭제했다.
지난 5일 주한중국대사관이 자국민에게 정치집회에 참여하지 말라는 공지를 내자 이날 윤 대통령 지지집회 사회자는 “시진핑이 무릎을 꿇었다”고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공지인데, 보수진영에서 진실을 알려 중국 정부의 공작을 굴복시킨 것처럼 해석한 것이다.
정치인과 언론 거치며 대대적으로 확산
수세에 몰린 윤 대통령 지지자들이 중국 개입설을 믿으며 윤 대통령 탄핵 및 체포 저지 명분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인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끼어들고 있는 것은, 바로 친중 정부가 들어서길 바라고 있다”(성창경TV)는 식이다. 해외에서도 주목한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4일(현지시간) “윤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극우 유튜버들의 음모론이 상당히 유사하다”며 “좌파 정치인들이 중국과 북한에 나라를 넘길 것이라는 악의적 비난으로 집회를 고조시키고 있다”고 했다.
문제는 이 같은 음모론이 널리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인과 일부 언론이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김민전 의원은 “가는 곳마다 중국인들이 탄핵 소추에 찬성한다고 나서고 (중략) 이것이 바로 탄핵의 본질”이라고 했다.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도 지난 5일 “탄핵 찬성 집회에 중국인들이 대거 참여한다”는 글을 올렸다. 이보다 앞서 윤 대통령이 ‘중국 간첩’ 문제를 강조하는 담화문을 내기도 했다.
언론의 경우 일부 매체가 음모론을 직접 주장하는 반면 주요 보수언론은 선을 긋고 있다. 김민전 의원 발언에 관해 지난 5일 채널A는 “외교적 문제로 이어질 수 있는 일에는 신중함도 필요하다”고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4일 사설에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팩트체크에 나서거나, 비판하거나 사안 자체를 다루지 않는 언론도 적지 않다.
다만 언론의 관행적 ‘따옴표’가 문제를 확산시키곤 한다. 지난 5일 「김민전 “중국인이 탄핵 찬성 집회 참여한 근거” 사진 공유」(TV조선), 「“중국인들 탄핵찬성 집회 참석, 尹 외롭다”던 김민전, 관련 사진 공유」(뉴스1), 「“탄핵 찬성 집회에 중국인 포착”…사진 공유한 김민전 의원」(한국경제) 등의 기사가 쏟아졌다.
신미희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본질을 희석하기 위해 여러 위기가 조장되고 있는데 그 일환으로 보인다. 이주민에 대한 혐오까지 결합됐다”며 “일부 인사나 국회의원들이 혐오, 허위조작정보를 발언하게 되면 검증하거나 비판을 해야 하는데 일부 언론이 확성기 역할을 하고 있다. 언론이 발언을 다룰 수는 있지만 단순히 받아 쓰느냐, 비판을 하느냐는 큰 차이”라고 했다.
같은 방식으로 내란을 일으킨 당사자들의 일방적 입장이 언론을 통해 확산되는 면도 있다. 윤창현 언론노조 위원장은 지난 6일 언론단체 긴급회견에서 “극단적 매체가 여론 조작에 나서면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이 이를 언급하고, 극우 집회와 다수 언론에서 이를 ‘국회의원의 말’로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극우집단을 세력화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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