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 겨울 시간이 멈춘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 대룡시장통 한 귀퉁이. ‘드르륵’ 미닫이 유리문을 여는 순간, 팔걸이에 널빤지를 걸치고 그 위에 키 작은 아이를 앉혀 상고머리를 깎던 투박한 이발소 의자 2개가 눈에 들어왔다.
가죽 띠에 ‘쓰~읔’ 비비며 날을 세운 누런 스펀지 위의 면도기, 타일 조각이 엉성하게 박힌 콘크리트 세면대도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나무로 짠 걸치기에 팔뚝을 포갠 뒤 머리를 푹 숙이면 빨랫비누로 거품을 내고, 파란 플라스틱 조리개로 물을 뿌려 머리를 감기던, 영락없는 추억의 이발관이었다.
‘교동이발관’ 주인장이었던 지광식(86) 할아버지는 분단의 아픔과 함께 60년을 훌쩍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그는 6·25전쟁 후 교동으로 피란 내려왔다. 어렴풋한 기억 속엔 그가 뛰놀았던 고향, 연백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가끔 꿈에서 고향 땅을 볼라치면 그놈의 몹쓸 향수병이 도져 며칠씩 앓아누운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새벽밥 먹고 20리(8㎞)나 떨어진 호동국민(초등)학교에 다녔어. 집 앞엔 끝도 안 보일 정도로 푸른 논이 펼쳐져 있었고, 주위엔 큰 산도 있었지. ‘소금부락’이라고 불렀던 염전에는 하얀 소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는데…”
당시 연백은 곡창지대였다. ‘연백사람이 서울에 안 오면 서울 사람들은 굶어 죽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지 할아버지 가족도 연백에서 2만6500여㎡(8천여 평)에 농사를 지었다. 당시 귀했던 트럭도 집에 있어 연백에서 개성을 거쳐 서울에다 쌀을 내다 팔았다. 어린 시절, 동네 사람들이 잘살았던 자신의 집안을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쟁이 터지고, 남으로 피란 온 지 할아버지 가족은 교동에 둥지를 틀었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수 있겠지…” 휴전선으로 갈리기 전 그는 부모님과 함께 배를 타고 연백에 건너가 장을 보기도 했다. 미군 부대의 군무원과 친했던 그의 아버지는 남한에서 페니실린을 구한 뒤 북한에 들어가 인삼이나 금으로 바꿔오곤 했다.
휴전선이 생기면서 통행이 끊겼다. 그러던 어느 날, 북한에서 부친이 붙들렸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총에 맞아 객사하고 말았다.
지 할아버지의 어머니와 4형제는 생계가 막막해졌다. 어머니는 두부 장수로 나섰다. 섬이라 간수를 구할 데가 없어 물지게로 바닷물을 퍼 날랐다.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지펴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지 할아버지도 이발관에 취직했다. 하지만 머리 깎기는커녕 손님 머리 감기나 물 기르기 등 잔심부름만 했다. 이발관은 매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동네에 3~4개의 우물이 있었지만, 손님이 많아 물이 달릴 정도였다. 지 할아버지는 2㎞여 떨어진 동네로 가서 물을 길었다. 잔심부름하며 어깨너머로 머리 깎는 기술을 익혔다.
교동 사람인 지금의 부인을 만나 아들딸 낳고, 손자와 손녀도 보며 살갑게 살지만, 눈앞에 보이는 고향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눈을 뜨나 감으나 임종조차 못 지킨 아버지와 고향 생각뿐이다.
“북녘땅을 밟을 수 있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은 것이 무어냐고? 두말할 것 있나, 내가 낳고 자란 우리 집 한 번 가보는 게 소원이지.” 지 씨가 70년 가까이 연백을 코앞에 둔 교동이발관을 지켜왔던 이유였다.
교동이발관에서 지 할아버지의 빗질과 가위질을 더는 볼 수 없다. 3년 전 큰딸과 막내딸이 교동이발관 자리에 국숫집을 차렸다.
/박정환 선임기자 hi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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