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상록(87) 씨는 칠십 평생을 전류리 어부로 살아왔다. 김포 대곶에서 태어난 뒤 열일곱 나이에 자리 잡은 전류리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쌓여 가는 나이만큼 변해가는 전류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나이 열일곱에 그는 처음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졌다. 당시 2.5t 목선을 타고 온몸으로 노를 저었다. 그물도 나무껍질을 삶아 만든 것이었다.
“조강(祖江)에 한번 그물을 던지면 목선이 가라앉을 정도로 물고기가 넘쳤어.” 철 따라 갖가지 물고기가 그물에 달려 나왔다. 황복·웅어·참게·뱅어·새우·장어·메기·깨나리 등 팔뚝만 한 것부터 손가락만 한 것까지 한 그득이었다.
5월 초~6월 보름은 복 중에서도 으뜸인 황복이 물 반, 고기 반이었다. 맛이 좋아 임금님 수라상에 올랐다는 웅어도 4~5월이면 발에 차였다. 황복과 웅어 모두 양식이 불가능한 회유성 어종도 산란 철에 조강으로 떼를 지어 올라왔다.
뱅어는 가마솥에 넣고 팔팔 끓여 말리면 그윽한 향내가 나 술안주로 그만이었다. 참게는 한 마리에 1만5000원에 거래되기도 했다. 쇠고기 1근도 그 값에 맞먹지는 못할 때였다.
잡은 고기는 굳이 시내로 내다 팔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외지인과 객들이 안달하며 몰려들었다. 당시 어민들은 연간 5000만 원을 벌었다. 심 씨가 기억하는 조강은 그야말로 ‘황금어장’이었다.
그러던 전류리에 6·25전쟁 후 강에 어로한계선이 그어졌고, 전류리 포구 아래쪽 200여m에도 부표가 띄워졌다. 배에는 가로, 세로 1m 크기의 빨간 깃발을 달아 군대의 통제를 받았다. 배엔 엔진도 달지 못했다. 월북을 막는 수단이었다.
1980년대 말 한강에 수중보를 세우는 등 각종 개발의 물결이 일었다.
“밀물 때면 물발이 엄청 세 서울 쪽으로 배가 떠밀려 갈 정도였지. 지금은 물골이 메워져 물살도 약해졌어.”
수중보와 일산대교, 김포대교 등 각종 공사로 조강에 흙이 쌓이기 시작하면서 물발이 약해졌다. 썰 때 8m에 달하던 강 수심이 지금은 조금 때 걸을 수 있을 정도로 흙무덤이 됐다. 정화조를 거치지 않은 각종 오·폐수가 조강으로 흘러들어 집에선 창문도 열지 못할 만큼 악취가 심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웅어나 황복 등 회유성 물고기는 길목이 막혔고, 모래 채취로 부유물이 일면서 아가미에도 앙금이 끼었다. 종류와 크기에 상관없이 물고기는 급격히 줄었고, 어민들도 더 이상 뱃일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김포시는 전류리 포구 어민들의 1년 총 어획량을 조사하기도 했다. 선박과 어업권에 대한 보상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어민들이 평생 피땀 흘려 가꿔온 터전을 고작 돈 몇 푼 쥐어주면 되는 것인 줄로 알지!” 심 씨는 가슴이 먹먹했다.
김포 최고령 어부 심씨는 가업을 이은 둘째 아들과 ‘태창호’에 오르고 공판장도 운영한다. 그동안 전류리 포구도 많이 변했다. 황복도 간간이 모습을 비친다.
/박정환 선임기자 hi21@inche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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