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소매시장 규모는 약 514조원으로 전년 대비 1% 내외 성장에 그친 것으로 추산된다. 올해도 탄핵 정국과 미국 트럼프 정부 2기 출범, 초고령사회 진입, 이상기후, 최저임금 인상 등 복합 위기로 인한 저성장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올해 소매시장 성장률 전망치를 0.4%로 예상하기도 했다. 조선비즈는 새해를 맞아 저성장 시대에 맞는 유통은 무엇이고, 우리 유통업계는 어떤 기회를 잡아야 할 지 진단해 본다. [편집자주]
高品質(고품질)·Everyday Low Price(매일 저가)
지난달 18일 오후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오케이(OK) 스토어 긴자점’에 들어서자, 큼직한 슬로건이 눈에 들어왔다. 전 세계 명품 매장이 밀집된 곳이자, 일본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에 있는 슈퍼마켓치곤 평범한 동네 슈퍼 같았다. 2023년 10월 문을 연 오케이 긴자점은 1년간 매출이 출점 초에 비해 20% 증가했다. 일본 한 유통 전문지는 이곳을 꼭 가봐야 할 슈퍼마켓으로 선정했다.
◇매일 저가격… 日 신선식품 최저가 슈퍼마켓 돌풍
지하 1·2층, 총 2140㎡(650평) 규모의 오케이 긴자점은 신선 강화형 할인 슈퍼마켓이다. 청과, 정육, 생선 등 신선식품을 기존 슈퍼마켓보다 저렴하게 팔고, 가공식품은 자체 브랜드(PB) 상품을 늘려 가격을 낮췄다.
지하 1층 매장에 들어서자, 과일과 채소 판매대가 나온다. 신선 강화 매장답게 상품 하나하나에 ‘산지’와 ‘가격’이 쓰인 안내판이 붙어 있다. 팽이버섯은 나가노현산, 브로콜리는 가가와현산임을 표기하고 생산자와 영양소, 요리법 등을 소개했다. 가격은 팽이버섯 한 봉에 155엔(이하 부가세 포함), 지바현산 당근 개당 72엔, 아오모리현산 사과는 3개에 609엔이었다.
생선 판매대에는 노르웨이산 연어와 칠레산 은연어, 러시아산 킹크랩, 파푸아뉴기니산 블랙 타이거 새우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생선들이 냉동 상태로 진열돼 있었다. 영하 50도에서 냉동했다는 초저온 참치도 있었다. 직접 손질한 회도 판매했다. 모둠회 9종 세트 가격은 2076엔. 정육 매대에서는 국내산 최고 등급 소고기와 돼지고기, 스페인산 이베리코 돼지고기와 말고기 등 수입산 고기를 취급했다.
신선식품 매대와 함께 고객이 붐비는 곳은 지하 2층 델리(즉석식품) 코너다. 1069엔짜리 모둠 초밥부터 430엔짜리 카츠동(돈가스 덮밥) 도시락, 100~300엔대 반찬 등이 다양하게 진열됐다. 332엔짜리 로스카츠(등심가스)는 연간 640만 개가 판매된다고 한다. 한 판에 1028엔인 피자를 집어가는 이들도 많았다. 긴자 지역은 점심값이 최소 1만원이 넘어 점심엔 도시락을 사러 오는 직장인이 많다고 한다.
폐점 시간이 가까워 오자 일부 즉석식품은 가격을 할인했지만, 그 외에 매장 상품들은 모두 정상가에 판매했다. 애초에 최저가로 책정했기에 할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업이익률 5.9%… 인기 비결은 ‘고품질·EDLP’
1982년 개업한 오케이는 도쿄와 수도권을 중심으로 160여개 매장을 운영하는 지역(로컬) 슈퍼마켓이다. 이온몰, 이토요카도 등 전국구 마트와 비교하면 규모가 작지만, 높은 성장률을 보이며 최근 간사이 지방까지 점포를 확대했다.
지난해 3월 기준 (주)오케이의 연 매출은 6230억엔(약 5조8582억원)으로 전년 대비 약 13%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336억9000만엔(약 3168억원)으로 26% 늘었다. 영업이익률은 6%로 2~4% 수준인 동종 업계 평균 영업이익률보다 높았다.
고성장의 비결은 좋은 먹거리를 지역 최저가로 파는 것이다. 모든 할인점이 최저가를 내세우지만, 언제나 저렴하게 파는 곳은 드물다. 니노미야 료타로 오케이 사장은 지난해 8월 일본 TBS와의 인터뷰에서 경영방침인 ‘고품질 에브리데이 로우프라이스(Everyday Low Price·EDLP)’를 매일 철저하게 실천하는 것을 인기 비결로 꼽으며 “고객들이 오케이에 가면 손해 보지 않는다는 마음으로 쇼핑하도록 대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니노미아 사장에 따르면 경기에 상관없이 소비자가 좋은 물건을 싸게 사고 싶어하는 건 보편적인 감정이다. 명품 거리에 문을 연 긴자점의 경우 처음엔 의아하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개점 후 1년간 영업이익률이 8.7%로 알려졌다.
오케이는 경쟁사 점포보다 1엔이라도 비싸면 점포 권한으로 가격을 더 낮춰 판다. 협력사들과 납품가 협상이 어려웠던 개업 초기엔 자사 이익을 깎아서 ‘매일 저가격’ 방침을 고수했다. 전단지 광고비도 아껴~. ///
품질에서도 투명성을 내세운다. ‘장마의 영향으로 상추의 품질이 평소보다 좋지 않으니 당분간 다른 상품을 사라’는 식의 메모를 붙이는 ‘어니스트(honest·정직) 카드’가 대표적이다. 이런 방침은 고객들에게 신뢰를 줬고, 오케이는 작년까지 일본생산성본부(JCSI)의 ‘고객만족도 지수’에서 15년 연속 슈퍼마켓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일본은 고령화와 1인 가구 증가로 슈퍼마켓 업계의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대형 유통업체인 세븐앤아이홀딩스의 경우 대형마트 이토요카도의 매각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토요카도는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기업의 모태 사업이었지만, 계속된 적자 끝에 사업을 매각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런 만큼 오케이의 성장 사례는 업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내에도 신선식품 상시 할인점 등장… ‘이마트 푸드마켓’ 개점
국내 마트 업계에도 ‘오케이식’ 판매 전략이 도입되는 모양새다. 국내 1위 대형마트 사업자인 이마트는 지난달 대구 수성동에 신선식품을 강화한 그로서리(식료품) 하드디스카운트스토어(HDS) ‘이마트 푸드마켓’을 선보였다. 말 그대로 신선식품을 상시 저가로 파는 매장이다.
이마트가 이런 시도를 한 이유 역시 실적 부진에 있다. 1인 가구 증가와 고령화에 더해 쿠팡을 위시한 전자상거래(이커머스)의 성장으로 국내 대형마트는 성장에 직격탄을 맞았다. 이마트의 경우 2023년 창사 이래 첫 적자를 냈고, 지난해엔 처음으로 희망퇴직을 단행했다.
이마트는 대형마트(이마트)와 슈퍼마켓(이마트에브리데이) 법인을 합병해 사업의 효율을 높이고, 분기별로 가격 ‘역주행 프로젝트를 진행한 데 이어, 신선식품 특화 할인점을 통해 성장 활로를 찾고 있다. 30~50%의 침투율을 보이는 국내 이커머스 시장에서 식료품 침투율은 20% 수준인 만큼, 승산이 있다는 판단에서다. 같은 맥락에서 롯데마트는 ‘그랑그로서리’, 홈플러스는 ‘메가푸드마켓’이라는 이름으로 신선식품 등 식료품을 강화한 매장을 강화하는 추세다.
이마트에 따르면 이마트 푸드마켓의 신선식품은 기존 할인점보다 20~50% 저렴하다. 주요 상품을 연간 단위 물량으로 계약해 매입 단가를 크게 낮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개점 첫날 시중보다 30%가량 싸게 내놓은 딸기는 2000팩이 팔렸다.
우유, 휴지 등 가공식품과 생활생필품은 협력사와 개발한 유통·제조업체브랜드(PNB) 상품 ‘이유 있는 싼 가격’ 시리즈를 선보였다. PNB는 유통업체 PB와 제조업체 브랜드(NB)의 중간 형태로 특정 유통업체에서만 판매하는 상품이다. 또 세제, 주방, 청소용품 등 비식품 분야는 필수 제품만 취급하면서 1990원, 2990원, 3990원 등 균일가로 판다.
이마트 관계자는 “신선식품과 델리가 호응을 얻으면서 개점 후 매출이 목표치보다 1.5배 더 나왔고, 생필품도 목표 대비 매출 2배를 달성했다”면서 “이마트 푸드마켓은 대형마트도 슈퍼마켓도 아닌 ‘상시 저가’를 지향하는 새로운 업태이자 미래형 매장”이라고 강조했다.
업계의 저성장 기조가 지속되면서 절약 지향형 업태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질 전망이다. 윤은영 대한상공회의소 유통물류진흥원 책임연구원은 “독일 슈퍼마켓 알디가 선호도가 높은 상품을 중심으로 초저가 PB 상품을 개발해 EDLP를 실현했다면, 오케이는 신선식품 강화라는 일본식 EDLP 전략으로 성공한 사례”라면서 “다만, 이들은 EDLP 사업만 하는 회사다. 이마트처럼 여러 업태의 사업을 할 경우 기존 사업의 지위가 떨어지는 카니발리제이션(자기잠식)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