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공감과 경청’
바야흐로 공감의 시대이다. “너 T야?” 라는 말이 욕이 되었고. “왜 공감 안 해줘?”가 이별의 이유가 된다. 공감 능력이 곧 대인 관계능력이고, 지능으로 여겨진다. 오은영 박사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이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들을 대할 때 공감과 경청을 우선하고 감정을 읽어주는 것부터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려도, 물건을 부수고,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고 난동을 부릴 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훈육을 해야 하지만 아이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아이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공감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떠한 순간에도 강요나 강압은 안 되며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와 아이, 교사와 학생 사이의 관계가 깨지기 때문이다.
[소아청소년발달] 짜증내는 아이, 이유 묻지 말고 ‘공감’부터
중요한 것은 아이가 화를 낼 때 항상 이해하고 들어주는 것이다. 아이는 화를 내서 내가 요구했던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부모에게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결국 화를 내는 목적은 관계 회복이다. 그러므로 관계를 깨지 말자.
–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발달위원회(출처: 대한소아청소년과학회 홈페이지)
공감과 경청 우선주의는 학교에서조차 지배적이다. 아동의 연령이 어릴수록 더욱 공감과 경청이 강조된다. 그러나 중등 교사의 경우에도 교사의 핵심 역량 중 공감은 높은 중요성을 차지하고 있다. (「중등교사의 핵심역량 분석」, 2019)
공감과 경청 우선주의가 낳은 오류들
공감과 경청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치 공감과 경청이 교사의 기본적 태도이자 역량이라는 주장들은 수많은 오류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 가해학생 지도 방법에 대한 교육청의 가이드북을 살펴보자.
[신체폭행 학생 A와 교사와의 대화 – 예시]
교사 :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A학생 : 친구가 저를 먼저 놀려서 제가 화가 나서 때렸어요.
교사 : (상황 설명 유도) 친구가 어떻게 놀렸는데 화가 났나요?
A학생 : 친구가 저보고 ~~~라고 했어요.
교사 : (생각과 기분 물어보기) 친구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었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궁금한데 말해 줄 수 있나요?
A학생 : 너무 화가 났어요. 매번 놀리고 저를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요.
교사 : (공감하기) 친구가 만만하게 봐서 화가 났군요.
A학생 : 네.
– 「경기형 관계회복 프로그램 워크북」(2021)
이와 같은 기계적 공감과 경청의 대화법은 교육계에 널리 퍼져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학교의 센척하는 아이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했다고 운동장에서 다른 애를 무차별로 때렸다. 이 애를 진정시키려고 상담실에 데려갔는데 상담교사가 무조건적 공감과 경청의 대화를 시작했다.
“00야, 너 원래 잘 참는 앤데 그 아이 왜 때렸어? 어떤 기분이 들었어?”
“걔가 나를 무시하는 말을 해서, 기분 나빴어요.”
“‘아 그랬구나. 너는 자존심이 강한데 정말 기분이 나빴겠다. 하지만 그래도 한 번은 참지 그랬어. 너 남자답게 잘 참잖아.”
“네, 그럴 걸 그랬어요. 샘 제가 실수한 거 같아요.”
당연히 선생님들께 혼이 날 것을 예상하고 풀이 죽어 있던 아이는 상담교사가 자신을 치켜 세워 주자 기분이 풀려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겠다며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이 상담교사의 무조건적 공감과 경청은 이 아이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독이 되었을까?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보다 ‘신뢰’
공감과 경청은 상담사나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필수의 덕목이자 역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교실은 상담실도, 진료실도 아니다. 교사는 개별 아이들에 대한 공감보다 전체 학급 아이들의 역동을 살펴야 한다.
그런데 공감과 경청은 학교폭력 매뉴얼에도 포함되어 있다. 교사는 학교폭력이 일어나면 피해 학생, 가해 학생, 목격 학생 모두에게 공감과 경청을 해 주라는 것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아야 하는 학생들은 그 교사를 믿을 수 있는가, 나에게 공감해 주는가를 따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가해자에게 적용하면 복잡해진다.
공감은 매우 기본적인 것이다. 그러나 공감을 최우선으로 했을 때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딜레마는 ‘가해 학생에게도 공감할 것인가’이다. 공감이 우선이라면 가해 학생에게도 공감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가해 학생과 신뢰를 형성하고 가해 학생에게 충분히 공감해주면 가해 학생이 자신의 잘못을 모두 실토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공감은 주로 피해 학생에게 적용되고 가해 학생 중에서는 반성이 되는 아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상 상담교사들이 가해 학생 상담을 어려워하는 이유도 공정하고 객관적인 자세를 갖추지 못할 때의 역효과 때문이다.
그렇다면 피해 학생들에게 공감은 필수적인가? 피해 학생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은 공감보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관점’이다. 학생에게는,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 교사가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교사인지에 대한 신뢰가 더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감언이설로 신뢰를 얻고, 어떤 사람은 의사처럼 공정한 모습을 보이고, 또 어떤 사람은 공감을 통해 신뢰를 얻기도 한다. 문제 해결의 의지는 없는 교사가 공감만 해 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그저 감언이설이나 늘어놓거나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AI 상담사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동정심에 불과하다.
공감과 신자유주의의 결합
1995년 5.31 신자유주의 교육개혁은 ‘교육은 서비스’라는 생각을 사람들의 머릿속에 심어 주었다. 2011년 학생인권조례는 학생 개인이 공교육의 간섭 없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인권으로 포장했다.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생태계에서 공급자인 교사는 수요자인 학부모, 학생의 요구에 반드시 부응해야 존재가 되었다. ‘공감과 경청’은, 교사들이 학생과 학부모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교육 서비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교사들은 기계적 공감과 경청을 가면처럼 뒤집어 쓰고 살아간다. 무뚝뚝하거나 차갑게 말하면 ‘왜 친절하게 대하지 않나?’, ‘왜 아이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느냐?’ 는 민원이 생기기 때문이다.
AI교사로 살 것인가
문제는 이렇게 ‘공감, 경청’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부모와 교사를 아이들 감정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에게 무한한 공감과 경청을 요구할 때 교사의 선택지는 두 가지이다. 그대로 감정 쓰레기통 신세가 되는 것을 감수하거나 영혼이 없는 ‘기계적 공감과 경청’을 하는 것이다.
서이초의 교사가 돌아가신 것도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며, 학생들을 괴롭히는 학생에 대해서 공감해 달라는, 즉 감정을 이해해달라는 학부모의 무리한 요구 때문은 아니었을까. 고인의 수첩에는 반말이나 발차기 등 예의없는 행동을 하는 학생에게 강하게 훈육해야 한다는 다짐이 새겨져 있다. 다수의 학생들이 앉아 있는 공간에 정서적, 물리적으로 위험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해 훈육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교사는 용기를 낼 수밖에 없다. ‘왜 자꾸 우리 아이한테만 그러냐’의 학부모의 말과 ‘뭘 해도 그냥 놔두면 되냐’ 되묻는 고인의 기록은 교사가 학생을 훈육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 아이에게는 공감과 경청을 해달라는 학부모의 요구는 훈육을 해야 할 상황에 훈육을 어렵게 만들며 교사와 다른 학생에게 위협을, 교실을 해체시키는 위험에 빠뜨린다. 이렇게 공감 우선주의는 학생이 뭘 해도 내버려둘 수 밖에 없도록 교사를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때론 교사들은 가면을 쓴 채 기계적으로 공감과 경청의 매뉴얼을 따른다. 사실 무조건적 공감과 경청을 제일 잘 하는 존재는 로봇이다. 실제로 AI로 만든 챗봇은 화도 내지 않고,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무조건적 공감과 경청을 잘 해준다. 기업들은 챗봇이 소외된 인간들을 상대로 큰 돈을 벌어줄 거라 예상했다. 이미 ‘레플리카, 워봇, 쿠키’ 등의 챗봇 기업들은 각각 몇십만에서 몇백만의 유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이 챗봇 알고리즘의 기본 원리가 바로 ‘무조건적 공감과 경청’ 이다. 교사의 생활지도가 공감과 경청만 하는 것이라면 그냥 AI를 활용하면 된다. 그러나 작년과 올해 무조건적인 기계적 공감과 경청을 입력받은 AI 챗봇 앱과 대화하던 30대와 10대 사용자가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감의 신화에서 벗어나야
사실 공감의 신화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만큼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일대학교 심리학자 폴 불룸은 ‘공감의 배신’ 이라는 책에서 공감은 스포트라이트처럼 특정인에게 집중을 하게 만들어 지나친 경도된 시각을 통해 이성의 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의 입장에 스포트라이트 하여 공감한다. 학교에서 보면, 학교 가기 힘들다는 아이에게 훈육 없이 공감과 경청만 하다 결국 학교 부적응을 거쳐 학업을 중단하는 사례가 정말 많다. 또한 내 아이가 친구하고 문제가 생겨 슬프고 힘들다면서 자초지종을 따지지 않고 교사, 상대 학생, 학부모를 적대시 하며 무조건적 사과 및 강력한 제재만 요구한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으로 인한 다른 학생 및 교사의 고통에는 공감하지 않는 무자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프리츠 브라이트하우프트 지음)’ 라는 책에서는 더욱 신랄하게 공감의 신화를 부순다.
1) 공감은 흑백사고, 또는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방식을 불러 온다.
2) 갈등은 공감하지 않아 커지는 게 아니라 공감하고 있어서 커지는 것이다.
3) 사디스트들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즐기기 위해 다른 사람과 공감하려 엄청나게 노력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원하고 야기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가 일반 학생 그룹보다 공감 능력이 높다.)
4) ‘헬리콥터맘’은 다른 사람을 수단 삼아 자신의 체험을 넓히려는 부도덕한 공감의 예시다.
교칙과 훈육이 살아있는 교실에서 피어나는 신뢰와 공감
공감을 무조건적으로 반대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에 필요한 것은 공감보다는 ‘상호 신뢰’라고 볼 수 있다. 기계적 공감과 경청을 반복하는 교사를 학생들은 신뢰하지도 않는다.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을 열지도 않는다.
신뢰는 공감과 경청에서 싹트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교폭력의 피해 학생들은 피해의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문제를 해결해주는 교사, 즉 사실을 잘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주고 가해 학생이 잘못을 인정하여 자신의 명예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교사를 신뢰한다. 교사들이 학교 폭력 피해를 코로나 전염을 피하듯 예민하게 반응하며 피해 학생을 구출하는 일에 적극적이라면 그 때 신뢰가 생긴다. 이 때 반드시 공감이 필수적이지는 않다.
가해 학생들은 교사가 본인의 감정에 공감해주지 않거나 본인 말에 경청하지 않아서 자기 잘못을 숨기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가해 학생에게 공감과 경청의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오히려 가해 학생들은 잘못을 숨기고 타인의 탓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대개 가해 학생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고 활용한다. 다음은, 상황 판단이 우선이 아니라 감정을 들어주는 것이 우선이라는 경기도교육청(2018)의 「담임교사를 위한 학생 상담 가이드」의 일부분이다.
교실에서 화를 내며 욕설한 학생에 대해:
네가 이렇게 화가 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선생님이 도와주고 싶은데 같이 이야기 나눠보자. 아 그렇구나! 그래서 네가 많이 화가 났구나.
상식적으로 교실에서는 학생들의 학습권과 안전권, 교사의 수업권, 모두의 인격권을 위해 욕설을 해서는 안 된다. 화낼만한 이유를 들어주는 것이 아닌 상황을 판단하고 멈추라고 지시를 내리고 훈육부터 했어야 한다. 그런 후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는지 해명의 기회를 주는 정도여도 충분하다. 가해 학생에게 ‘네 감정은 소중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그러면 가해 학생이 교사를 신뢰하여 스스로 변화하려고 할 것인가. 가해 학생은 비록 자신이 처벌을 받았다고 해도 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을 수 있도록 정확히 알려주는 교사에게서 신뢰를 느낀다. 적어도 교사인 필자가 만나본 가해 학생들은 공감적 자세를 최소화했어도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반성하고 사과하는 길을 택했다. 피해 학생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 법과 도덕, 권리, 타인의 해석 등을 가르치며 학생이 가진 비합리적 신념을 깨는 방식의 접근 등 학생에게 교육함으로써 신뢰를 줄 수 있는 방법은 공감말고도 아주 다양하다. 그러니 교사에게 과잉 공감이 되지 않도록 공감을 무조건적 생활지도 방식인 것처럼 강요하지 말길 바란다.
평화로운 교실을 만드는 것이 우선
교칙이 잘 지켜지고 훈육이 잘 이루어지는 학교에서는 자연스럽게 교사와 학생 사이의 신뢰도 잘 형성되고 공감도 잘 이루어진다. 교칙은 교사의 권리, 학생의 권리가 지켜지도록 선을 정한 약속인데 훈육을 통해 이것을 유지하게 되면 학생 간, 교사와 학생 간 안전 거리가 생긴다. 타인이 나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신뢰의 바탕이 있는 학교에서는, 힘의 불균형과 관계없는 경미한 갈등과 오해는 역지사지와 같은 공감을 통해 극복이 가능하다. 그러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면서까지 자기 멋대로 하는 행동을, 공감한답시고 통제하지 못한다면 내가 당하지 않기 위해 남을 짓밟는 교실 해체의 수렁으로 빠져버릴 것이다. 아이들이 마음대로 행동하는 아수라장의 교실 속에서는 공감도 신뢰도 이루어질 수 없다. 교사가 공감과 경청을 잘 해야 교실이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훈육이 강화되고 교실이 평화로워져야 공감도 신뢰도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유주의 교육 개혁론자들은 외국의 유명한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우리 교육 안으로 들여 오면서 더욱 우리 교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공감’ 뿐 아니라 ‘다양성’ , ‘행복’, ‘스트레스’ 등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온 교육계의 신화들을 비판적으로 되돌아 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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