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현지시간) 100세의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생전에 한반도와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었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76년 6월 23일 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된 뒤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대선공약으로 제시했다. 박정희 군사정권 하의 한국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주한미군 철수론을 꺼내 든 것이었다.
그 여파로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혈맹’으로 발전한 한미동맹은 최대 위기에 봉착했다. 1977년 1월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같은 해 3월 주한미군을 4∼5년 안에 단계적으로 철군시키고 전술핵무기까지 철수한다는 세부 계획까지 제시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인권상황을 문제 삼는 카터 행정부를 향해 “내정간섭을 중단하라”며 극도의 불신과 배신감을 표출했다.
이런 가운데 카터 전 대통령의 첫 방한 기간인 1979년 6월 29일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선 주한 미군 철수 문제 등을 놓고 한미 정상간 정면충돌이 빚어지면서 양국 정상회담 역사 사상 ‘최악’이라는 오명을 안았다.
2018년 11월 공개된 백악관 외교 기밀문서에 포함된 당시 회담 대화록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단독 정상회담 자리에서 주한미군 철수 및 한국의 인권 상황을 놓고 격한 설전을 주고받았다.
당시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던 박 전 대통령에게 핵무장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나아가 긴급조치 9호 해제 등 인권문제까지 거론하며 박 전 대통령과 두시간 반 동안이나 격론을 벌였다.
그는 80년대 초 신군부 치하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고(故)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구명운동에 나서는 등 한국내 인권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퇴임 후에도 한국과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그의 시선은 한반도의 군사적 대립 구도와 긴장을 이완하고 평화적 무드를 조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카터 전 대통령이 한반도 문제의 전면에 다시 등장한 것은 북핵 1차 위기가 극에 달했던 1993년 6월이었다.
북한이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거부한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미국의 영변 폭격설까지 대두되면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때 ‘평화의 전도사’를 자임하면서 북한 김일성 국가주석과 북핵 문제에 대한 담판을 짓겠다며 빌 클린턴 행정부에 방북 승인을 요청했고, 방북이 성사됨으로써 그는 김 주석과 처음으로 대좌했다.
이에 앞서 김 주석은 지난 1976년 카터 전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 직후 파키스탄 줄피카르 알리 부토 총리를 통해 ‘북미 직접 대화’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낸 사실이 훗날 비밀해제된 미국 정부의 관련 전문을 통해 확인되기도 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김 주석의 대화 요청 서한이 전달된 뒤 17년만에 전직 미국 대통령 신분으로 김 주석을 만나게 된 셈이다. 1994년 6월15일부터 3박 4일간 평양을 방문해 김 주석과 두 차례 면담했고 그 결과를 곧바로 CNN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카터 전 대통령이 김 주석과 합의한 내용은 ▲ 3단계 북미회담을 재개한 뒤 영변 핵시설에서 무단 인출한 핵연료봉의 재처리를 유보하고 ▲ 경수로를 제공할 경우 흑연감속로를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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