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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中 ‘흑연전쟁’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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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연, 배터리 수명과 충전 속도를 결정하는 음극재의 핵심 소재

막대한 보조금 지원받은 中기업 ‘덤핑판매’로 경쟁질서 어지럽혀

美 흑연생산 업체들, 중국산 흑연에 최고 920% 관세 부과 요구

中, 지난해 12월부터 흑연에 대해 수출통제 조치 시행하고 있어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인 지난 11월16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신화/연합뉴스
페루 리마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간인 지난 11월16일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갖기에 앞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신화/연합뉴스

미국이 중국에 ‘흑연전쟁’을 선포했다. 전기자동차 배터리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인 흑연을 생산하는 미국 기업들이 막대한 국가 보조금을 통해 글로벌 경쟁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중국산 흑연에 대해 관세의 대폭적인 인상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 내 흑연 생산업체들을 대표하는 미 활성양극재생산자협회는 중국 기업들의 반덤핑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미 상무부와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제출했다고 블룸버그통신이 지난 18일 보도했다. 중국 정부의 거액의 보조금을 지원받은 중국 기업들이 흑연 가격을 덤핑 수준으로 끌어내려 미 기업들이 경쟁할 수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고 이 협회는 주장했다.

이에 따라 활성양극재생산자협회는 중국산 흑연에 대해 최고 920%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할 것을 정부에 요청했다. 에릭 올슨 협회 대변인은 “중국의 악의적인 무역 관행으로 흑연산업이 질식 위기에 처해 있다”며 “북미에서 이 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중국산 흑연제품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세 부과 여부는 내년 말 조사가 마무리된 이후 결정될 예정이다. 내년 1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출범한 후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2018년 1기 행정부 당시 중국산 인조 흑연을 포함한 수입품에 대해 25% 관세를 부과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극단적인 관세정책을 예고한 만큼 이번 조치의 강도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4월 9일 중국 상하이 정부와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메가팩토리 건설계약을 체결한 뒤 서명하는 모습. ⓒ 일론 머스크 트위터
지난 4월 9일 중국 상하이 정부와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메가팩토리 건설계약을 체결한 뒤 서명하는 모습. ⓒ 일론 머스크 트위터

상황이 이런 만큼 흑연을 둘러싼 미·중 간에 ‘전쟁’이 본격화될 것이라는 우려가 증폭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흑연에 대한 수출통제 조치를 시행하고 있다. 흑연은 민간과 군수 양쪽에 모두 사용될 수 있는 ‘이중용도 품목’으로 분류돼 해외로 수출되기 위해서는 엄격한 최종 사용자 및 용도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중용도 품목은 민간 또는 군사적 목적이거나 군사적 잠재력 확대, 특히 대량살상무기(WMD) 및 운반수단을 설계·개발·생산·사용하는 데 기여하는 상품과 기술, 서비스를 의미한다고 관영 신화통신은 설명했다.

트럼프 당선인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른 전기차 보조금 폐지를 예고한 상황에서 중국산 흑연에 대한 관세 인상이 현실화할 경우 미국산 전기차 가격이 크게 오를 것이라고 블룸버그는 내다봤다.

미국은 올해 상반기만 하더라도 중국산 흑연에 대해 관세를 면제해 왔다. 하지만 조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6월 테슬라 등의 요구를 불허해 현재 관세율 25%가 적용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이 같은 고율 관세가 부과되면 트럼프 당선인의 공약으로 예상되는 관세전쟁이 미·중 간 흑연산업에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미 전기차 보조금 지급 중단을 공언해온 차기 트럼프 행정부가 흑연에 대한 관세까지 올리면 미국 내 전기차 생산원가 인상도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금도 미국의 배터리 생산 비용은 중국보다 최소 20% 더 많이 든다.

아지즈 아한노우치 모로코 총리(왼쪽 다섯번째)를 비롯해 모로코 정부와 중국 흑연 음극재 생산업체 베이터루이(BTR) 관계자들이 지난 3월29일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BTR은 앞서 모로코에 5억 달러 규모를 투자해 음극재 생산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 BTR 홈페이지 캡처
아지즈 아한노우치 모로코 총리(왼쪽 다섯번째)를 비롯해 모로코 정부와 중국 흑연 음극재 생산업체 베이터루이(BTR) 관계자들이 지난 3월29일 투자 계약을 체결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BTR은 앞서 모로코에 5억 달러 규모를 투자해 음극재 생산공장을 짓는다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 BTR 홈페이지 캡처

반덤핑 관세가 본격적으로 부과되면 트럼프 당선인의 최측근으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가 이끄는 테슬라에도 큰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테슬라는 중국산 흑연이 들어간 배터리를 사용하며, 트럼프 1기 행정부 당시에는 중국산 흑연에 대한 미 정부의 관세 부과를 막기 위해 로비를 벌여 성공한 바 있다.

연필심에도 들어가는 흑연은 값싸고 흔한 광물로 여겨지는 흑연은 배터리 수명과 충전 속도를 결정하는 음극재의 핵심 소재다. 덕분에 전기차 배터리 필수 재료로 쓰이며 그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흑연은 전기차 배터리 음극재에서 부피 기준으로 가장 큰 구성 요소다. 전기차 배터리 개당 흑연 함유량은 20~30%에 이른다.

흑연은 전기차 배터리셀 제조 비용의 약 10%를 차지한다. 시장조사기관인 가이드하우스 인사이트의 샘 아부엘사미드 연구원에 따르면 흑연은 현재 전기차 배터리 원가의 10%가량이나 된다. 흑연 가격이 900% 오르면 총비용이 2배로 늘어나는 셈이다. 흑연보다 에너지 밀도가 4배 이상 높은 실리콘이 차세대 음극재 소재로 주목받고 있지만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천연 흑연을 채굴할 수도 있고 가공해서 인조 흑연을 만들 수도 있는데 두 가지 모두 중국이 최대 생산국이다. 실제로 배터리의 음극재로 사용되는 핵심 자재인 흑연은 중국의 장악력이 지배적이다. 전 세계 자연 흑연 생산량의 86%, 인조 흑연 생산량의 80%를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전기차 배터리용 광물들의 높은 중국 의존도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계가 이번 ‘흑연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이유는 중국 외에 이렇다 할 대안이 없는 까닭이다. 리튬·니켈·코발트 같은 다른 배터리 광물은 중국이 ‘최종 가공자’ 역할을 하기는 하나 실제로 채굴은 인도네시아·아르헨티나·호주 등 다양한 국가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흑연은 채굴부터 가공·정제까지 중국이 전 과정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 자료: 외신종합
ⓒ 자료: 외신종합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국산 흑연 수입을 대체하기 위한 미국 내 공급망 구축이 가속화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호주의 노보닉스(Novonix)가 북미 최대의 인조 흑연 제조시설을 테네시주에 건설하는데 미국 에너지부가 7억 5500만 달러(약 1조 1000억원) 규모의 조건부 대출을 지원키로 했다.

이런 행보는 전기차 배터리의 주요 구성 요소 공급망에서 중국의 지배력을 약화하려는 미국의 노력이 본격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FT는 노보닉스의 공장 건설은 전기차 산업에서 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자급 가능한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미국 정부의 주요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노보닉스의 테네시 공장이 완공되면 북미 최초의 대규모 인조 흑연 제조시설이 될 예정이며, 2028년 완전 가동 시엔 연간 32만 5000대의 전기차에 필요한 흑연을 공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노보닉스는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 일본의 파나소닉, 유럽의 스텔란티스와 공급 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크리스 번스 노보닉스 최고경영자(CEO)는 “중국의 (흑연) 시장 점유율은 95% 이상으로 압도적이며, 중국이 최근 배터리용 흑연의 대미 수출규제를 강화한 것은 국내 생산 확대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며 이번 프로젝트(테네시 공장 건설)가 전기차 공급망에서 중국의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대안 마련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 자료: SNE 리서치
ⓒ 자료: SNE 리서치

그렇지만 미국의 중국산 흑연 수입 규모를 대체하기에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지난해 미국은 모두 9만 1000t 이상의 흑연을 수입했는데, 이 중 7만t가량이 중국에서 수입됐다.

그렇다고 중국이 미국의 ‘관세 폭탄’에 순순히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 같다. 중국은 이미 지난해 12월 1일부터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원자로에 필수적인 흑연에 대한 수출통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중국의 조치는 자국 업체가 수출 신청을 하면 정부가 이를 심사한 후 승인을 하는 것으로 전면 수출 금지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통해 대중국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를 가하고 있는 서방에 경고를 날렸다는 게 전문가들은 대체적인 견해다.

만약 서방이 중국에 대한 규제 수위를 높인다면 중국도 점진적으로 통제 강도를 높일 수 있다는 신호를 줬다는 얘기다. WP는 “미국과의 경쟁에서 중국이 내놓은 가장 강력한 무기”라며 “화석연료를 끊고 녹색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미국의 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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