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26일 “헌법재판소 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겠다”며 임명를 위한 전제조건으로 ‘여야 합의’를 내세웠다.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이 권한대행의 국회 몫 헌법재판관 임명에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대통령의 중대한 고유권한 행사는 자제하라는 것이 우리 헌법과 법률에 담긴 일관된 정신”이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하며, 역으로 탄핵심판을 지연시키려는 여권에 적극적으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 대행은 이날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긴급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국회가 선출한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할 수밖에 없는 근거로 △황교안 권한대행의 사례 △여야 합의 없이 임명한 사례 없음 △여야 입장이 이전과 달라짐 등 크게 세가지를 거론했다.
하지만 세가지 근거들 모두 헌법재판관 임명을 보류하기 위해 억지로 꿰맞춘 탓에 구멍이 많다. 우선 한 대행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직무정지 당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헌재의 탄핵심판 결정에 영향을 주는 임명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헌재 결정(탄핵 인용)이 나온 뒤 헌법재판관을 임명했다”고 말했다.
황 대행이 대법원 몫인 이정미 헌법재판관의 후임자인 이선애 재판관을 헌재 결정 이후인 3월29일에야 임명한 사실을 언급한 것인데, 당시 이선애 재판관 임명이 늦어진 건 대법원의 후임자 추천 자체가 늦어지며 일정이 지연된 데 따른 것이다.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는 그해 3월13일 만료되는데, 대법원은 3월6일에야 이선애 재판관을 지명했다. 게다가 이정미 재판관의 임기는 탄핵심판 결정(3월10일)보다 3일 더 남아 있는 상태였다.
또 “여야 합의 없이 임명된 헌법재판관은 단 한 분도 안 계셨다”는 한 대행의 말과는 달리, 이날 국회에서 선출된 헌법재판관 3명은 모두 여야 합의로 추천됐다. 한 대행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이 각각 마은혁·정계선 재판관과 조한창 재판관을 추천하기로 사전에 합의한 사실은 무시한 채, 여당이 이제 와 반대하고 있다는 점만 들어 임명 보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이를 두고 “여야 합의를 핑계 대는 것은 궁색하고 옳지도 않다”며 “임명 행위는 애초 여야 논의의 대상이 아닌데도 이를 합의해달라는 것은 국회의 헌법재판관 선출권을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여당의 참여 여부를 떠나서 국회가 선출해서 보내왔는데 한 대행이 임명하지 않으면 부작위에 의한 위헌적인 행동이 된다”며 “권한대행이 여당 편을 드는 모양새”라고 지적했다.
한 대행은 이 과정에서 “헌법재판관 충원에 대하여 여야는 불과 한달 전까지 지금과 다른 입장을 취하였다”며 12·3 내란사태 이전 헌법재판관 추천에 소극적이던 야당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과 직무정지에 따른 국정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헌법재판소 9인 정상 체제가 돼야 한다는 국가기관의 입장 등을 무시하는 궤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한대행의 1차적 의무는 헌정 질서를 빨리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라며 “가장 시급한 게 헌법 수호의 직무를 수행하는 헌법재판소가 제기능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야 합의나 전례를 들어서 안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비판했다.
한겨레 이승준 기자 /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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