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한국사에서 도자기처럼 음식을 담는 목적의 용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와 고조선시대부터다. 빗살무늬 토기가 유명한데 삼국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개성적인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1.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토기를 생산했다. 토기란 500도 이상의 고열에 구워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며 제조해야 하기 때문에 고대국가가 생산하려면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하다.
음식을 담는 용기 목적의 그릇 외에도 이동용 변기 호자, 수레모양 토기, 기마인물형 토기 등 다양한 모양이 유행했다. 특히 한반도 남부는 특유의 이색적인 토기 문화를 보여줬고 가야토기, 신라토기라는 장르를 개척했다.
2.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당삼채의 영향을 받아 신라삼채가 유행함. 유약을 발라 굽는 제법 진일보한 시도지만 당삼채에 비하면 발색 퀄리티가 높진 않다.
발해: 마찬가지로 삼채가 유행했다. 발해삼채는 신라삼채보다 완성도가 높다. 전체적인 발색도 좋고 당삼채에 비교할만큼 퀄리티가 높다고 평가된다.
신라가 발해보다 석조기술이 더 뛰어났다면 발해는 삼채 제조기술이 뛰어난거 같다.
3. 고려시대
한국 도자기 역사상 최대의 리즈시절. 학자들은 고려청자의 태동기는 통일신라 말~고려 초로 추측하는데 중국의 도자기를 수입하다가 도자기를 자체 생산하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됐다.
고려는 개발기술을 발전시켜서 120년 만에 수준높은 청자 문화를 이뤘는데 도자기 연구자들은 이를 한국 도자기사에서 한강의 기적에 견줄만한 압축성장이라 평가한다.
향로만 해도 투각칠보문 향로, 기린 향로, 사자형 뚜껑 향로 등 다양한 작품이 있다. 사자향로만 봐도 섬세한 묘사력이 느껴진다.
나중엔 상감기법까지 적극적으로 개발해서 독자적인 청자문화를 꽃피우는데 ‘상감운학문 매병’이라는 최고의 걸작까지 만든다. 고려의 청자 애호는 상당해서 청자 바둑판, 청자 의자, 청자 기와 등 온갖 것을 청자로 만들었다.
청자 종주국이던 송나라에서도 “고려청자의 비색은 다른 곳에선 흉내내고 싶어도 흉내낼 수 없다”고 하거나, 남송태평노인이 천하의 십대보물에 송 청자가 아닌 고려청자를 넣는 등 중국에서도 우리보다 더 뛰어나다고 감탄하던 시절이다.
4. 조선시대
조선은 고려 시절 들어온 백자기술을 바탕으로 분청사기의 과도기를 거처 조선백자를 만들었다. 코발트 안료로 푸른 그림을 그려넣은 청화백자가 유행했는데 원나라, 명나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수묵화 같은 느낌의 자연물을 그려 넣으면서 조선 특유의 백자 문화를 발전시켰다.
고려청자 전성기 때처럼 세계에서 압도적 1티어는 아니었지만 1.5티어 정돈 됨. 당시에 다들 제조기술이 없어서 백자 생산국이 별로 없었다. 조선 정도면 수준 높은 기술을 보유했고 여러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변화가 생기는데 전쟁으로 인해 사회 인프라가 파괴되고 도공들이 납치되면서 도자기 기술이 쇠퇴했다.
나중에 전쟁의 피해를 복구했지만 사치를 지양하는 조선 특성상 기술이 발전하긴 어려웠고 주변국에 비해 도자기 기술은 정체되고 대중의 수요도 도자기에서 유기로 넘어가면서 옛날 만큼의 부흥은 이루지 못한다.
청나라의 도자기들
결국 조선은 나중에 청나라와 일본이 세계시장에서 도자기를 팔아치우며 거액을 벌어들일 때 홀로 ‘가난했고, 못 만들었고, 안 만들었다’ 라는 처참한 상황을 직면했다.
조선은 전쟁의 여파로 도자기 산업이 주춤한 것도 있고, 애초에 예전부터 세계의 도자기 무역에도 관심이 없어서 수출용 도자기를 만들지 않고 내수용 도자기를 주로 만들었다.
번외)
조선 후기에 조선이 세계 도자기 무역에서 소외된 것은 확실히 아쉬운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한국 도자기는 뒤쳐져 있던 시절보다, 선도하고 앞서 나가던 적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 세계의 문화적 취향은 미니멀리즘에 맞춰져 있다. 따라서 조선백자도 한국 문화에서 적극 활용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조선후기에 등장한 달항아리, 철화백자도 특유의 매력이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토기, 고려청자, 조선백자를 문화콘텐츠에 적극 활용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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