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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친구랑 다큐멘터리 같은 걸 보는데,
장애인 아들을 가진 엄마가 나왔어요.
되게 힘들어하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 하는 모습이 나왔거든요.
근데 그 친구가 그걸 보더니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자식을 안 사랑하나?
모성애가 없는 거 같아.’ 이러는 거예요.
그 순간 ‘너는 장애인과 살아봤니?’라는 말이
바깥으로 나올 것 같더라고요.
사회적으로 장애인 가족은 오로지
장애인 가족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있어요.
모든 가족이 장애인을 정말 사랑해야 하고,
잘 보살피고 그런
‘그려진 장애인 가족의 모습’ 같은 거 있잖아요.
그러다 보니 장애인 복지가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다가도 순간순간
‘나 편하려고 이런 생각을 하나?
오빠를 위하는 척하지만
결국 나를 위해서 이런 생각을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아무래도 복지가 잘 마련되면
오빠를 부양하는 제 부담이 줄어드니까요.”
“그런 생각이 나쁜 건가요?”
“아뇨. 안 나쁜 것 같아요. 근데… 그게 너무 나쁜 것처럼 느껴져요.”
“최근에 갑자기 깨달은 건데,
제가 결혼을 포기하고 있더라고요.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제가 계속 저희 오빠를 돌봐야 하니까요.”
“깨달은 순간 어떠셨나요?”
“담담했어요. 그냥 내가 이것까지 포기했구나 싶었던 거죠.”
“가끔 엄마의 마음이
오빠한테 기울어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오빠는 흰 살 생선이랑 고기를 좋아하고
야채를 안 좋아해요.
야채 중에서도 어떤 걸 더 좋아하고 어떤 걸 안 좋아하는지도요.
엄마는 그걸 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제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 지는 잘 모르세요.
밥을 먹는데, 제가 안 좋아하는 반찬을
자꾸 먹으라고 하시는 거예요.
‘엄마 나 이거 안 좋아하잖아.’ 하고 말하니까
엄마가 ‘너 이거 안 좋아했어?’ 하시더라고요.”
“남들에게 동생 얘기를 하는 걸 꺼렸어요.
부끄러웠던 건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감을 잘 못 하기 때문이에요.
동생하고 유럽 여행을 간 적이 있어요.
북유럽에 있는 미술관에 갔는데, 정말 좋은 곳이었거든요.
저는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동생은 옆에서 노트를 꺼내서
포켓몬 그림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이 좋은데 와서 그러고 있는게 짜증나서 막 싸웠었죠.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하면, 놀라요.
‘장애인인 동생에게 화가 났다고?’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래서인지 어릴 때는 동생 이야기를
진정한 친구를 판별하는 리트머스 종이처럼 썼어요.
‘내가 동생 얘기를 한다는 건,
너가 내 진정한 친구라는 거야’라는 식이죠.
공감할 데가 없다는 건
여전히 비장애 형제들이 겪는 어려움이에요.
물론 맨날 싸우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동생이 귀여워 보일 때도 있어요.”
“아빠가 장애가 있는 동생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기관에 보내자’는 말을 한 적이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이고 아들인데
그렇게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었어요. 정말 미워했었죠.”
“지금은 달라졌나요?”
“제가 한글을 깨우칠 때
아빠가 동요를 전지에다가 써서
벽에 붙여 놓고 같이 읽어보고,
그 다음에 제가 혼자 읽어보고,
다 읽을 줄 알게 되면
전지를 뜯어내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갔었어요.
이런 기억을 더듬어보면 아버지는 참 다정한 분이셨어요.
지금도 그런 면이 분명히 있고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늘 그런 생각을 해요.
아빠도 아들에게 어려움이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일은 처음이었을 거잖아요.
분명히 쉽지 않았고 힘들었을 거예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저와 싸운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야, 너네 오빠 장애인 등록 한다며?
이제 공식적으로 바보되는거냐?’.
그때 오빠가 자폐성 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저를 공격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그래도 저는 오빠의 병을 숨기지 않았어요.
엄마가 늘 말했거든요.
오빠가 남들과 다른 건 장애가 있어서 그런거고,
장애는 부끄러워하거나 숨길게 아니라고요.”
“어머니의 말씀을 계속 마음에 품고 사셨군요.”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얘기지만,
어릴 적엔 오빠의 장애를 저를 높이고 방어하기 위해 썼어요.
‘나는 이런 역경과 고난을 잘 이겨내고 살아가는
훌륭한 사람이야’라는 거죠.
그렇게하면 사람들이 제 앞에서는
장애를 놀림거리로 삼지 않았고,
저를 장하게 봐줬거든요.
그런 제 자신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 대학에 왔어요.
그때 반수를 결심해서 학교 사람들과는
한 학기만 지내면 됐죠.
적응을 못 하더라도 그냥 떠날 수 있으니
처음으로 오빠 얘기를 안 꺼내 봤어요.
그래도 괜찮더라고요.
나 자체로 나가도 괜찮은 거였어요.”
“이건 제가 미국에 교환학생을 갔을 때
오빠가 보낸 카톡이에요.
카톡을 보면 엄마가 시켜서 보낸 건지,
오빠가 스스로 보낸건지 바로 티가 나거든요.
이건 오빠가 직접 보낸 거였죠.
처음으로 몇 달 넘게 떨어져 있던 땐데,
제가 정말 많이 생각났나 봐요.
바로 캡처해서 간직하고 있어요.”
“자폐성 장애를 가진 동생이 있어요.
모든 일의 중심에 동생이 있었죠.
글짓기 대회를 나갈 때도 동생에 대해 썼고,
진로를 정할 때도 동생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정신과 의사나 사회 복지사가 되겠다고 했어요.
부모님의 칭찬을 받는 것도 동생을 잘 돌봤을 때였어요.
선생님의 칭찬도 언제나
‘아픈 동생을 뒀는데도 의젓하게 참 잘 하는구나’였고요.
성인이 돼서도 동생 생각밖에 없었어요.
뭔가를 즐길 때면,
또래 친구들은 다 누리는 것이었는데도
사치처럼 느껴졌어요.
‘동생하고 부모님은 힘든데, 나만 이러고 있어도 되나?’싶었죠.
몸은 밖에 있어도 생각은 언제나 가족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이십대 후반이 됐어요.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뚜렷한 이유없이 정말 너무 힘든 거예요.
그래서 심리 상담을 받으러 갔어요.
그 자리에서 알게 됐죠.
그때까지 저는 ‘장애인의 언니’로만 살아왔다는 걸요.
‘제 자신’이 아니고요.
그 날 이후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됐다는 기분이 들어요.
장애인의 언니로서 해야할 일이 아니라
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고,
걷고 싶은 길을 걷기 시작했거든요.”
“심리 상담에서 어떤 말을 들었나요?”
“대단한 말을 들은 건 아니에요.
그저 동생이 아니라 온전히 ‘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리였을 뿐이에요.
별 말도 안 했는데 눈물이 났어요.
처음이었거든요.
동생이 아닌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을 대한 건.”
“제 동생은 저와 두 살 터울이지만
발달장애인이라 수나 돈 계산 같은 것도 전혀 못 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보살핌이 필요해요.
그러다 보니 때로는 동생이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해요.
제가 어쨌든 평생을 책임져야 하니까요.
최근에 상담을 받았는데,
저의 가장 큰 두려움이
동생보다 먼저 죽게되는 것이더라고요.
근데 그것보다 더 큰 감정은,
동생이 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거예요.
동생이 제게 주는 정서적 충만함이 참 크거든요.
동생은 함부로 나를 판단하지 않아요.
덕분에 저도 동생 앞에선 매우 솔직해질 수 있죠.
내가 어떤 모습을 보여도
동생은 나를 나로서 받아 들여주니까요.
그래서 바라보고 있으면 행복하고, 애틋하고, 편안해요.
전적으로 나를 수용하는 존재가 있다는 건 정말 큰 행운이에요.”
“엄마는 지금 제 나이 정도에 오빠를 낳았어요.
오빠의 발달 수준이 어린 아이와 비슷하니까
엄마는 작년에도 올해도, 내년에도
세 살인 아들을 이제껏 키워오신 거예요.
오빠에게는 어린 아이처럼 울고,
떼쓰는 게 대화방식이에요.
엄마는 그런식의 대화를 28년 동안 하신거죠.
아이가 점점 성숙해지는 육아를 5년만 해도 힘들다는데,
엄마는 거의 30년 동안을 육아때문에
본인의 삶을 살지 못하신 거 잖아요.
그게 안타까워요.
오빠가 처음 시설에 가고 나서는
생각보다 엄마가 ‘오빠가 보고 싶다, 잘 있을까’
같은 감정표현을 잘 안하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
‘우리 엄마 정말 강한 사람이구나’ 느꼈는데,
최근에는 ‘우리 아들 보고 싶다.’
이런 말씀을 자주 하시더라고요.
우리 엄마도… 이제 조금 늙으셨나봐요.”
“최근 학교 프로그램으로
한 달 반 정도 미국에 다녀왔어요.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집을 비운 게 처음이었어요.
미국에서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께 연락이 많이 오더라고요.
밥은 잘 먹는지, 아프지는 않는지요.
그런데 저한테는 전화 한 통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날 카톡이 한 통 왔어요.
확인 해보니까
‘오빠가 유투브 켜달라고 하는데
네가 없어서 어떡하니’ 라는 내용이었어요.
너무 실망해서 답장도 안하고
그냥 카톡방을 나가버렸죠.
나는 ‘집에서 오빠를 위해 필요한 사람일 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오빠한테 보이스톡이 한번 왔었어요.
오빠랑 3주만에 통화하는 거였는데,
오히려 오빠는 내가 없어서 불편하다는 말은 없고
‘보고 싶다고, 언제 오냐’ 묻는 거예요.
제가 집을 비우기 전에 오빠에게 유튜브 켜는 법
같은 것들을 조금씩 알려주고 갔거든요.
‘잘하고 있어?’ 하니까 ‘
네가 알려준대로 잘 하고 있어’ 하더라고요.
오빠가 제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진짜 동생으로서 나를 보고 싶어 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눈물이 엄청 났어요.
뭔가를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나’라는 사람으로서도
오빠한테 되게 중요하구나 느껴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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