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면 부족은 느린 형태의 안락사다.”
세계적 신경과학자이자 수면 전문가인 매슈 워커는 “수면을 줄이는 것은 수명을 줄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워커는 저서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에서 “보통 잠자는 시간이 6~7시간 이하가 되면 면역계가 손상되고 암에 걸릴 위험이 두 배 이상 높아진다”면서 “수면 부족은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높이는 것은 물론 우울, 불안, 자살 등 모든 정신 질환 악화에 영향을 미친다. 게다가 일주일에 하루라도 수면이 부족하면 혈당 수치가 심각하게 교란된다”고 지적했다. 잠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전방위적이며 강력하다는 지적이다.
다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잠을 게으름과 동의어처럼 취급하면서 수면 부족을 예사로운 일로 넘기고 있다. 일부 유명인은 방송에서 성실하고 치열한 삶을 추어올리며, “잠은 죽어서 자면 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짜 잠을 제대로 안 잔다면 남들보다 일찍 영원히 잠들 수도 있다.
영국 워릭대학 연구진이 2010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하루에 6시간 이하로 수면을 취하는 사람은 6시간 이상 자는 사람보다 조기 사망할 가능성이 12% 높다. 수면 부족이 여러 가지 성인병의 발병 위험을 높였던 탓이다. 무려 130만 명을 대상으로 10년에 걸쳐 진행된 연구 결과다. 이처럼 충분한 수면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나고 있지만, 한국인의 수면 사정은 점차 나빠지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수면 장애를 겪는 사람은 2018년 91만606명, 2019년 99만8795명에 이어 2020년 103만7279명으로 100만 명을 넘어섰다.
불면증의 원인은 심리 상태, 생활 습관, 환경, 신체 질환 등 여러 가지다. 가장 흔한 것은 심리적 요인이다. 스트레스와 걱정에 물든 뇌는 쉽게 잠들지 못한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은 물론 아드레날린과 노르아드레날린 등 교감신경계를 자극하는 호르몬이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심장 박동수는 증가하고, 혈압은 올라가고, 호흡 속도도 빨라진다. 근육도 좀처럼 긴장을 풀지 못한다. 교감신경계가 활발해지면서 뇌도 활성화한다. 잠들면서 잠잠해져야 하는 감정과 관련된 편도체 영역, 기억을 회상하는 해마 영역의 활성도가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다.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이 차곡차곡 쌓여 잠으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이다.
불면이 계속되는 상태에서는 숙면의 파수꾼이라 할 수 있는 시상 역시 제구실을 못한다. 대뇌 깊숙한 곳에 있는 시상은 수면 중 감각 정보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소음과 같은 외부 자극에도 굴하지 않고 깊이 잠들 수 있는 것은 모두 시상 덕분이다. 얕은 잠으로 불리는 렘수면에서는 시상의 활동이 다시 활성화되어 꿈의 생생한 경험을 가능하게 하지만, 여전히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성은 낮다. 그러나 불면으로 교감신경이 활성화할 경우 시상 역시 감각 관문을 제대로 닫지 못한다. 외부 자극에 민감해지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깊은 잠으로 분류되는 비렘수면 시간에도 수면의 질이 낮아진다.
최근 숙면의 적으로 가장 지탄받는 것은 바로 청색광이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피시 등 전자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색광은 수면 호르몬인 멜라토닌의 생성을 줄이고 수면 주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이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이 적어도 잠들기 1시간 전에는 스마트폰을 멀리하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14년 하버드 의과대학의 브리검 여성병원 연구진은 각각 전자기기로 책을 읽는 그룹과 인쇄된 책을 읽는 그룹의 수면 건강을 조사했다. 연구 결과 전자기기로 책을 읽은 이들은 종이책을 읽은 이들에 비해 멜라토닌 분비량이 50%나 억제됐다. 전자기기로 책을 읽었을 때는 멜라토닌 농도가 증가하는 시간이 최대 3시간까지 뒤로 밀렸다. 게다가 수면의 질까지 낮아지면서 전자기기로 책을 읽은 이들은 다음날 낮의 컨디션도 저하됐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전자기기를 더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며칠 동안은 멜라토닌 분비 시간이 이전보다 90분 정도 뒤로 밀려났다는 점이다. ‘디지털 숙취’가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렘수면 시간을 줄어들게 하고, 다음날 피로와 졸음을 유발하는 등 신체 리듬을 크게 교란한 셈이다.
카페인과 술 역시 숙면을 방해하는 대표적 물질이다. 카페인은 각성 효과가 강해, 오후 늦게 마신 커피 한 잔이 밤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일부 연구에 따르면, 낮에 섭취한 카페인도 수면의 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술은 일시적으로 졸음을 유발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인 수면의 질을 떨어뜨린다. 알코올은 수면을 얕게 만들고 자주 깨게 한다. 우리가 술에 취해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따라서 다음날 피로감이 커지고 장기적으로 더 심각한 불면증을 불러올 수 있다.
수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수면 유도제와 수면제 사용도 늘고 있다. 수면 유도제는 수면 리듬을 조절하거나 수면을 촉진하는 약물이다. 멜라토닌 수용체 작용제나 일부 항우울제가 이에 해당한다. 최근 인기를 얻고 있는 멜라토닌 같은 경우는 수면 주기가 망가졌을 때 교정을 위해 사용하면 효과가 있다. 수면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작용이 적고 의존성 위험이 낮다.
수면제는 중추신경계를 억제해 수면을 유도하는 약물로, 크게 벤조디아제핀계 약물과 비벤조디아제핀계 약물이 있다. 심한 불면증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 대표적인 약물로는 졸피뎀(제품명 스틸녹스정), 로라제팜(아티반정), 트리아졸람(졸민정) 등이 있다. 1년 이상 장기간 복용할 경우 내성이나 의존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전문의와의 자세한 상담이 필수적이다.
물론 불면증에 대한 치료도 환자별로 달라야 한다. 정석훈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약을 처방하기 전에 의사도 환자도 개인의 상태를 먼저 면밀히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체질마다 수면 유지가 가능한 시간도 다르고 불면 양상도 다르다. 이런 차이를 보지 않고 하루 7∼8시간과 같은 일률적인 잣대를 들이대면서 무턱대고 약을 처방하고 약을 먹다보면 제대로 된 효과를 볼 수 없으며, 약을 남용하기도 쉽다”고 경고했다. 노화를 비롯해 우울증, 질병 등 다양한 이유로 불면이 생기는 만큼 개인별 불면의 이유를 먼저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약을 먹기 전에 본인의 기상 시간과 활동 시간을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낮에 잠을 많이 자거나 지나치게 일찍 잠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는 등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최근 수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몇 시간 잤는가’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집착과 걱정이 오히려 불면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다”며 “불면증은 대개 원인이라기보다는 정신적 불안이나 특정 질병 탓에 생긴 결과인 경우가 많다. 원인을 고치려 하기보다 결과에만 집착해 각종 호흡법을 익히고 건강기능식품을 챙겨 먹으면서 자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겨레 윤은숙 기자 / sug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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