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찰칵’ 셔터음에 찰나를 기록한다. 대중들에게 사진이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포착해 재현하는 매개체로 잘 알려져 있다.
19세기 사진의 첫 등장으로 인해 미술계는 큰 변혁을 맞았다. 시각적 재현의 영역을 독차지했던 회화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정체성과 존재 이유에 대해 고민하고 탐구한 회화 작가들은 재현에서 탈피해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나 주관적인 시각 경험에 집중했다.
이처럼 사진은 회화가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하고 모사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존재 방식 자체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사진 자체는 단순 기록의 도구로 여겨지며 예술의 영역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향이 존재했다.
그러나 철옹성 같던 예술의 영역 또한 변화를 맞았다. 오늘날의 예술 작품은 희소가치를 가진 유일무이한 존재를 넘어, 작가의 고유한 메시지를 어떤 방식으로 구현해 내는지에 대한 문화적 산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인물 사진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알려진 서대호 작가는 사진을 회화, 즉 순수 예술(파인아트)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이를 뛰어넘기 위한 다양한 시도로서 신선한 시각 경험을 제공한다.
그는 국내외 기업 프로젝트를 통해 상업과 예술이 융합된 사진과 미디어 작업을 해 왔다. 30여 년간 이어진 작업을 기반으로 평범한 피사체를 특별하게 탄생시키는 그의 사진은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특히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넘나드는 컨셉추얼 발상으로 새로운 개념의 사진을 선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12일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열린 서대호 작가의 ‘기억에 다가서서’ 전시에 방문했다. 르무아 청담 갤러리가 주최하고 다가서서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서대호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으로서 원태연 시인과 이철원 작곡가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한 새로운 예술적 감성을 강조했다.
“사진 속 회화적 요소 구현, 리스크 있었지만 실험적 작업”
전시장의 첫 프레임은 원태연 시인의 시가 장식한다. 커튼을 걷고 어두운 전시장 안에 들어서면 색감 있는 조명과 함께 흰 벽에 가득 씌어진 ‘기억’에 관한 시가 관객을 맞이한다.
1990년대 연애시의 독보적인 감성시인으로 잘 알려진 원태연 시인은 다양한 노래의 작사가로도 공감을 얻어 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서대호 작가의 작품 곁에서 기억과 추억 앞에 날것인 감정들을 진솔하게 전달한다.
‘나를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냐’는 질문으로 시작한 시는 무심하게 이어져 ‘기억에는 온도가 없다’는 답변으로 끝을 맺는다.
이 같은 원태연 시인의 단상은 저마다 다르게 쓰이는 ‘기억’에 대한 감상이라는 점에서 서대호 작가의 작업 메시지와도 무관하지 않다.
서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기억의 잔상을 표현했다. 기억을 상징하는 다양한 색채의 조화를 통해 기억의 감정을 담아내고, 기억들이 하나의 완전한 형태로 모이고 연결되는 원형을 통해 이상적인 내면을 구현하고자 했다.
작품 속 인물의 얼굴이 가려진 이유는 의도적으로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기 위함이다. 어떠한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 없이, 오로지 인물이라는 최소한의 형태만으로 우리의 내면에 접근하기 위한 의도가 담겼다.
서 작가는 “다양하고 과감한 시도가 가능한 회화를 동경해 왔던 만큼 사진으로서 이를 뛰어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며 “이런 도전을 위해 모든 촬영을 직접 만든 세트로 했고 각각의 막들을 중첩시켜 조형 예술의 요소를 첨가했다”고 말했다.
이어 “사진 작업임에도 캔버스에 그림 같은 질감을 주고자 광목천을 판에 붙이고 페인팅해 세트를 만들었고 세트 규격과 모델 체형을 미리 계산해 최종 촬영했다”며 “실패할 경우 굉장히 리스크가 큰 작업이었지만 이런 실험적 시도를 통해 의도한 바를 좀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었다”고 부연했다.
원태연 시와 이철원 곡으로 더 특별해진 미술사진…“관객 호응”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선명한 사진적 요소에 강렬한 색채, 군더더기 없는 공간 구조의 결합으로 새로운 예술적 표현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 작가는 이번 전시에 대해 “현대 예술의 트렌드는 다양한 장치들을 결합해 새로운 것들을 제시하는 것이며 그런 점에서 내 작품은 미술과 사진의 교차점에 있다”며 “기억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함께 한 시와 노래를 통해 시각을 뛰어넘은 예술적 확장이 이뤄졌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기억에 다가서서 바라보는 관점을 가진 이번 작품을 위해 전시공간은 기억의 암실로 조성됐다. 작품마다 원형의 기억들을 만나고 개개인의 단편적 이야기의 기억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전시 조명에도 집중했다.
어두운 전시장에 포인트가 되는 다채로운 조명색과 함께 전시장에 흐르는 이철원 작곡가의 곡과 미디어아트 또한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기타리스트로도 잘 알려진 이철원 작곡가는 국내 일렉트로니카 1세대 작곡가다.
전시는 미술사진에 음악과 문학이 어우러진 오감 자극을 통해 관객에게 특별한 예술적 경험을 제공한다.
실제 서 작가가 작품에 활용한 세트 장치를 그대로 옮긴 포토존도 전시의 묘미다. 서 작가는 포토존에서 직접 사진을 찍어주며 관객과의 소통에 나섰다. 사진 촬영이 제한된 전시가 아니기에 관객이 저마다 사진을 찍고 찍히는 새로운 경험이 가능한 모습이었다.
이날 전시를 총괄 기획한 다가서서 구미연 대표는 “이번 전시의 포인트는 ‘기억’이다. 하나의 기억에서 연결된 행렬의 기억들이 있다. 이는 시간이 흐르며 흩어지고 파장을 이루며 시공간을 이루는 기억들로 변모된다”며 “기억은 있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기억나지 않는 기억에 다가서서 당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를 주최한 르무아 청담 갤러리 이서율 대표도 “사진의 정점을 찍은 서대호 작가가 기억의 잔상을 유니크하고 개념적으로 표현한 걸작”이라며 “총 24개의 기억이 담긴 작품을 통해 사진 회화 분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12일 오픈한 이번 전시는 이달 29일까지 예술의 전당 서예관에서 관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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