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이팬에 식용유 대신 올리브유를 살짝 두른다. 먹기 좋은 크기로 자른 가지와 닭가슴살을 가지 겉이 그을릴 정도로 중불에 볶는다. 굴소스로 간을 맞추고 설탕 대신 알룰로스를 넣으면, 직장인 이예림(25)씨의 저속노화 음식, ‘가지 닭가슴살 볶음’이 완성된다. 중화요리에 가까운 맛을 느낄 수 있어 병아리콩밥이나 잡곡밥을 먹을 때 반찬으로 곁들인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저속노화 식단’ 유행이 거세다. 노년 내과 의사인 정희원 서울아산병원 교수가 지난해 초 엑스(X·옛 트위터)에 렌틸콩과 귀리, 현미로 만든 밥을 저속노화 식사법이라며 소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정 교수가 지난달 만든 저속노화 식단 커뮤니티에는 두 달 새 2만5천여명이 참여했다. 커뮤니티 멤버들은 각자가 만든 저속노화 식단 사진을 찍고, 들어간 식재료 목록을 공유한다. 이씨는 “건강한 식단 하면 예전에는 중년·노년층을 대상으로 한 종합편성채널 먹거리 프로그램이 떠올랐는데, 최근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저속노화 식단은 인스타그램에 올라올 법한 사진이 많아 트렌디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밋밋한 ‘건강식’이, 자랑 삼고 싶은 2030의 ‘힙한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저속노화 식단은 노화를 촉진하는 음식을 ‘줄이는’ 데서 시작한다. 식단에서 줄여야 할 음식은 설탕과 같은 단순당, 흰 쌀밥과 빵 등으로 대표되는 정제 곡물, 붉은 고기와 동물성 단백질 등이다. 튀김류, 버터, 마가린, 치즈 등도 줄여야 할 식단이다. 대신 푸른 잎 채소와 통곡물, 콩류, 견과류, 베리류 등을 더 섭취할 것을 권한다.
다만 저속노화식단에 꼭 이런 재료만 써야 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는 건 아니다. ‘덜 엄격하다’는 점은 건강한 식사에 들어서는 문턱을 낮춘다. 저속노화 식단을 실천 중인 이들은 흰 쌀밥을 콩이 들어간 잡곡밥으로 바꾸거나, 당이 적은 그릭 요거트와 견과류 등을 함께 먹는 식으로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5월부터 저속노화 식단에 합류한 직장인 박상진(32)씨는 “흰 쌀밥 대신 잡곡밥을 먹게 된 게 제일 큰 변화”라며 “잡곡밥에 상추와 오이, 두부, 적양배추 등을 넣고 간장과 섞어 먹으면 편하다”고 했다.
저속노화 식단을 시작한 20∼30대들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많다. 직장인 지현주(26)씨는 “7월 건강검진 결과를 보니, 공복 혈당이 약간 높게 나와 식단 관리의 필요성을 느꼈다”며 “요즘 20대도 당뇨병에 걸릴 확률이 이전 세대보다 높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주변에서도 혈당 조절에 관심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20∼30대 만성질환 환자는 갈수록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를 보면, 2022년 20대 당뇨 환자가 2018년보다 47.7% 늘어 전체 연령대에서 증가율이 가장 높았다.
지씨는 아침에는 그릭요거트에 시중에서 파는 견과류 한 봉을 잘게 부숴 섞어 먹는다. 점심과 저녁은 양배추 안에 주먹밥과 쌈장을 넣은 ‘양배추 참치 쌈밥’, 잡곡밥에 야채와 오리고기 정도를 넣는 ‘오리고기 포케’ 등을 주로 먹는다. 채소는 ‘어글리 어스’라는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업체가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못난이 채소 목록 가운데 필요한 것들을 골라서 받아 보는 서비스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에 못생겼지만 건강한 채소를 구할 수 있다.
식단을 바꾼 이후 몸에 변화가 나타났다. 직장인 최재훈(37)씨도 음료수나 빵 등 가공식품과 흰 쌀밥을 줄이는 비교적 단순한 방식으로 저속노화식단을 실천하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몸의 변화는 컸다. 최씨는 “가족력으로 당뇨가 있어 혈당 조절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튜브에서 미국과 한국 의사들 영상을 보고 (저속노화 식단을) 시작하게 됐다”며 “흰 쌀밥을 안 먹으면서 낮 시간대 식곤증이 사라졌다. 저속노화 식사를 멈췄다가 해보니 그 차이를 더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간의 여러 건강 식사법에 견줘서도 저속노화 식단이 특히 인기를 끄는 배경엔 ‘공유’가 있다. 이예림씨는 친구와 ‘원물(가공을 많이 거치지 않은 음식) 모임’을 꾸려 서로 식재료를 선물하거나 새로운 조리법을 시험해 본다고 했다. 박상진씨는 블로그에 식단 일기를 올린다. “다른 사람이 뭘 먹는지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데, 내가 먹고 맛있었던 걸 다른 사람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이렇게 한 달 동안 뭘 먹었는지 기록하고 공유해두면 추억하기도 좋은 것 같고요.”
비교적 간단한 조리법에 다양한 요리가 가능한 저속노화식단에도 벽은 있다. 각자의 저속노화 레시피를 소개한 청년들이 전한 가장 큰 어려움은 ‘현실’이다. 일과 약속에 쫓기다 보면 식재료를 사서 조리하거나 끼니를 챙기는 행위 자체가 쉽잖다. “최대한 애쓰고 있긴 한데 매번 지키지는 못해요. 약속 있으면 술과 고기도 먹고요.” 박씨가 말했다. 질병관리청의 국민건강통계를 보면, 아침 식사를 거르는 결식률은 2013년 23.9%에서 2022년 34%까지 올라갔다. 특히, 2022년 조사에서 20대(19∼29살)는 10명 중 6명(59.2%)이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그나마 꾸준히 건강한 밥을 챙길 수 있는 각자의 비법은 뭘까. 박씨는 “직장과 집이 가깝고 퇴근이 늦지 않다”는 ‘축복 같은 상황’을 전제로, 냉장고에 1주일 치의 식재료만 넣어두는 것을 추천했다. “냉장고에 일주일 치 식재료만 넣어두고 오늘은 뭘 해먹고 내일은 뭘 해먹고 하는 계획이 머릿속에 들어오게 한다. 이렇게 먹어서 냉장고 식재료를 다 소진해야겠다고 계획을 짠다”며 “그렇게 일주일 치 식재료를 딱 해치우면 미션을 성공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지현주씨에게도 식단의 단위는 일주일이다. “일주일 치 먹을 양을 준비해 소분해 놓고 (2가지 메뉴를) 월·수·금과 화·목 식으로 번갈아 가며 식단을 짜는 게 식단을 지속하는 데 좋은 것 같다”고 했다.
한겨레 임재희 기자, 고나린 기자 / lim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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