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통일의 주역이 누구였을까 생각해 보면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이곳 진천 길상사는 바로 그 김유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입니다. 그분과 쿠니가 친분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직계 후손이라 할 수도 없는데 굳이 길상사를?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쿠니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는 여행과 의미 있는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기에 여행가의 입장에서 진천 가볼 만한 곳일까를 생각해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길상사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진로 1411-38 길상사
진천 가볼 만한 곳 흥무대왕 김유신 사당 진천 길상사 영상 1분 22초.
주차장 참 넓다.
뭣하러 이렇게 큰 주차장을 만들어 놓은 걸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행사를 하게 되면 엄청나게 많은 분들이 방문할 테고 그때를 예측하여 넓은 주차장이 탄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당이 있는 곳이라면 당연히 홍살문을 지나야 할 테고,
이 아름다운 길을 걸어야 한다.
길지 않은 길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왼쪽으로 걷는 길이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른쪽 아스팔트 포장 길은 차도이고 이 부분부터는 왼쪽 걷는 길로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누군가 리딩을 하지 않는 한 어떤 방문자가 걸어갈까 의심이 드는 대목.
쿠니는 비가 오락가락하니 질퍽한 땅을 피해 그냥 아스팔트를 따라 걸어올라 왔다.
이곳까지 와보니 주차장이 또 있다.
왼쪽으로 화장실이 있고 오른쪽으로 재실이 있는데 오른쪽 한 칸은 정면 한 칸 측면 3칸의 사무실로 개조했다.
해설사분이 근무하며 요청 시 해설을 해주시거나 문의가 있을 때 안내해 주시는 듯한데 쿠니는 그냥 패스.
정면으로 외삼문이 보이고 가장 오른쪽 문이 열려있으므로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저 앞의 석계단을 오르기 전 오른쪽에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왼쪽의 비석은 길상사 중건 사적비이며 그 오른쪽에 김만희 공적비다. 중건 사적비는 알겠는데 김만희라는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고 당장 알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대충 패스하고 지나친다.
쿠니가 호기심 때문에 불필요한 시간을 많이 소비하는 편이긴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마음이 가지 않은 상황에 대해 빠르게 지나쳐 버리는 습관도 있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그냥 중앙으로 걷는 것을 당연시할 텐데 실은 중앙의 길은 신도라 하여 사람이 아닌 영혼이 지나는 길이다. 요즘에 그런 소릴 하면 뭔 시답잖은 소릴 하는 거냐 하겠으나 그냥 상식 정도로 알아두셔도 좋겠다.
그래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길로 접근 2기의 비석을 지나쳐 다시 중앙 석계단으로 향한다.
계단 끝자락에 외삼문 지붕만이 보인다.
계단을 다 오르니 또 한 층의 평지가 나오고 그 끝에 외삼문이 있으며 오른쪽 문만 출입문으로 개방되어 있다.
길상사(吉祥寺)라는 단어가 좋은 단어인가 보다.
길할 길(吉), 복 상(祥), 사당 사(祠)를 붙여 놓았으니 상서롭고 복 있는 사당이란 의미가 되려나?
길상사를 찾아보면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검색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다. 말사는 보통 본사와 멀지 않은 곳에 있게 마련인데 전남 순천의 법보종찰 송광사의 말사가 서울 한복판에? 정확한 건 모르겠고 송광사를 처음 창건했을 때 사찰명이 길상사였다고 하니 그것도 하나의 이유일지 주된 이유일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부연하자면, 속리산 법주사 역시 창건 초기 사찰명이 법주사였다 하며 전국의 여러 곳에 길상사라 부르는 사찰이 부지기수(不知其數)다.
외삼문의 열린 문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다시 석계단이 보이는데 이전 계단이 탁 트인 형태였다면 이번 계단에는 나무 몇 그루가 보인다.
석계단 위로 솟은 두 그루의 나무가 튼실해 보이니 앞으로도 수백 년간은 저 나무와 함게 하게 될 듯.
계단을 다 오르면 내삼문인 진호문(鎭護門)이 보인다.
진호문(鎭護門)이라…
진압하고 돕는다라는 뜻인데 이는 난리(亂離)를 평정(平定)하거나 또는 난리(亂離)를 예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름드리나무가 짙은 그늘을 만들고 있는 사당 내삼문 앞.
신라 때부터 사당을 세워 봄과 가을 향과 축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임진왜란 때 불 타 사라지고 철종 2년인 1851년에 죽계사를 지어 제사를 지내다가 이마저도 고종 원년인 1864년 사라졌다.
이후 고종 3년인 1866년 후손들이 계양묘를 지어 제사를 지냈으나 1922년 발생한 홍수로 무너졌고 1926년 후손 김만희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에 길상사를 세웠다. 이후 1959년 개축, 1975년에 정화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내삼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흥무전이 보인다.
저 뒤로 협문이 있고 정면으로 김유신 장군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오른쪽으로도 협문이 있고 그곳엔 흥무왕 신성비가 세워져 있다.
김유신은 관창, 사다함과 함께 신라의 3대 화랑이라 불리며 많은 공을 세우고 진평왕에서부터 문무왕에 이르기까지 다섯 왕을 섬기며 신라 권력, 정치의 중추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다. 김유신은 사후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追尊) 되었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흥무전의 자태가 당당하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검색을 통해 알아보시면 재미나다. 그리고 그가 화랑이 되면서부터의 이야기를 조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다양한 전투에서 공을 세우게 되고 장군으로 승진을 해서도 백제의 침공을 막아내고 백제의 성을 함락시키는 등 그 공적이 대단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라는 세력의 우두머리이자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의 반란군과 대치하던 선덕여왕의 사망에 이어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설득하고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과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을 진압하는 등 그전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그러한 불세출의 장군 사당을 뒤로하고 내삼문으로 향한다.
내삼문 앞에 서서 바라보는 석계단과 나무 그리고 어우러진 풍경이 멋지다.
사당이라 하는 의미를 배제하고 바라보면 참으로 멋진 여행지란 생각이 들 정도다.
진천 길상사,
한 번쯤은 가봐야 할 진천 가볼 만한 곳이 아닐까.
여행을 하며 역사적 의의와 보물이나, 국보 등의 국가유산 또는 글로벌하게 세계유산의 존재 여부가 여행의 목적지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보다 그냥 분위기가 좋아서, 느낌이 좋아서 등의 이유도 여행하기에 좋은 장소, 여행을 하고 싶은 장소를 선택함에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한 면에서 이곳 진천 길상사는 내포한 의의를 떠나 진천 가볼 만한 곳이라 소개해도 좋을 곳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