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 뉴스1 김일창 기자 |
(서울=뉴스1) 김일창 기자 = 올해가 아니어도 좋다. 내년이 안 되면 내후년, 그것도 아니라면 인생 어느 순간 달빛 아래 창덕궁을 거닐어 보자. 도심의 소리가 완벽히 차단된 호젓한 시간 속에서 인생 최고의 호사(豪奢)를 경험할 테니 말이다.
해가 막 저문 오후 7시, 굳게 닫혀있던 창덕궁 돈화문이 활짝 열린다. 어둠이 짙게 깔린 궁 내부로 들어서 청사초롱을 하나씩 들고 본격적인 길을 나선다.
돈화문과 진선문 사이 금천을 가로질러 놓여있는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인 금천교를 건너고 진선문을 지나니 이내 창덕궁의 중심 인정전이 고요하게 관람객을 맞는다.
‘어진 정치를 펼친다’라는 뜻의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왕의 즉위식과 조회, 외국 사신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치르던 공식 의례 공간이다.
창덕궁 희정당. ⓒ 뉴스1 김일창 기자 |
태종 5년인 1405년 창덕궁을 지을 때 완공된 인정전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경복궁 근정전을 대신해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의 역할을 했다.
다른 궁과 달리 나무 바닥이 깔려 있고 서양식 천과 커튼, 전등이 달려있는 점이 특이점이다. 1907년 순종이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긴 후 전돌에서 마루로 바꾸고, 전구가 설치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고 한다.
인정전을 빠져나와 왕의 비공식적인 집무실인 희정당으로 향했다. ‘화평하고 느긋하여 잘 다스려지는 즐거운 정치’라는 의미인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0년 경복궁의 강녕전을 옮겨 재건했다.
궂은 날씨에도 순종의 어차가 정차할 수 있도록 돌출된 부분이 있단 점이 다른 건물과 다른 점이다. 건물 내부는 볼 수 없지만 카펫과 유리창문, 샹들리에 등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창덕궁 낙선재. ⓒ 뉴스1 김일창 기자 |
다음 행선지는 낙선재.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던 이곳은 다른 건물과 달리 단청을 하지 않아 소박하지만 창틀의 모양이 다른 점에서 개성을 살렸다.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헌종의 안목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다.
낙선재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눈보다 귀가 먼저 즐겁다. 낙선재 후원에 우뚝 서 있는 육각형 누각 상량정에서 라이브 대금 연주가 달빛아래 청아함을 극대화한다. 몸을 돌리니 불빛으로 가득한 서울 시내가 한눈에 들어오니 과거와 현재 그 어디쯤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절로 든다.
임금이 사랑한 정원, 한국 정원의 진수를 경험할 수 있는 창덕궁 후원으로 향하자 한 폭의 그림 같은 부용지와 주합루가 한눈에 들어온다. 많은 관람객이 달빛기행의 백미로 꼽는 순간이다. 특히 영화당에서 흘러나오는 라이브 아쟁산조가 어우러져 “인생 최고의 호사”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임금과 왕비가 신하들의 호위를 받으며 부용지를 거니는데, 멈춰 있을 때는 사진 촬영이 가능하다.
창덕궁 상량정. ⓒ 뉴스1 김일창 기자 |
자리를 옮겨 왕의 만수무강을 염원하며 세운 불로문을 지난다. 하나의 판석을 디귿(ㄷ) 모양으로 깎은 뒤 다듬고, 돌문에 전서체로 ‘불로문’을 새겼다. 이 문을 지나는 사람은 무병장수한다고 전해진다.
숙종의 연꽃 사랑을 담은 애련(愛蓮)지와 애련정은 아담하고 소박하다. 숙종은 이름을 지으며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해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달빛기행의 마지막은 아버지 순조에 대한 효명세자의 효심이 담긴 공간인 연경당에서 박접무와 보상무 등 전통예술공연을 관람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올해 14년째를 맞는 창덕궁 달빛기행은 매년 상반기(4월~6월)와 하반기(9월~10월 중순) 두 번 열린다. 경쟁률은 상당하다. 한국문화재재단에 따르면 올해 하반기 달빛기행 경쟁률은 31.6:1이다. 예매권은 일반적으로 행사 시작 약 2주일 전에 신청할 수 있고, 추첨을 통해 선발된다. 한 계정당 두 매까지 응모할 수 있으며 참가비는 1인당 3만원이다.
창덕궁 부용지. ⓒ 뉴스1 김일창 기자 |
창덕궁 연경당에서 펼쳐지는 전통예술공연. ⓒ 뉴스1 김일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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