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에는 무려 2000년의 세월을 따라 전해져 내려오는 러브스토리가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언급된 가야 수로왕과 허황옥의 사랑 이야기는 현재 김해 관광의 한 축을 담당하는 중요한 소재다.
이야기를 간추리자면 이렇다. 2000년 전 가야 김수로왕과 결혼하라는 하늘의 계시를 받은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이 배를 타고 가야로 왔다. 허황옥은 수로왕과 결혼해 아들 10명과 딸 2명을 낳고 157세의 나이에 가야 땅에서 생을 마감했다. 신화 속에나 등장할 법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를 활용해 김해시는 도시 곳곳에 관련 명소를 개발 중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 중 하나가 가야테마파크다.
가야테마파크는 2023~2024 한국관광 100선에 선정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2013~2014년부터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지’를 테마로 명소 100곳을 선정하고 있다. 아직 전국적으로 이름난 관광지는 아니지만 정부 기관이 전국 100선 중 하나로 골랐다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전국이 봄꽃으로 화사하게 물든 3월 말, 수로왕과 허황옥의 거짓말 같은 사랑 이야기를 들으러 직접 김해로 떠났다.
◆ 김해 최초 ‘한국관광 100선’ 뽑힌 가야테마파크, 직접 가보니
가야테마파크로 가는 길에 온통 꽃 난리가 벌어졌다. 만개한 벚꽃이 차가 닿는 곳곳에서 이방인을 맞아줬다. 이웃 도시 부산이나 진해와는 달리 김해에서는 한적하게 꽃놀이를 즐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야테마파크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김해공항에서 차로 30분을 달려 가야테마파크가 자리한 분성산(326m) 자락에 들었다. 김해시청을 사이에 두고 서낙동강과 마주하고 있는 분성산은 신어산(630m)과 이웃한다.
2015년 문을 연 가야테마파크는 현재 김해문화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다. 테마파크의 전신은 드라마 세트장이다. 2010년 방영한 드라마 ‘김수로’ 촬영을 위해 세트장을 처음 지었다. 주요 시설은 가야왕궁이다. 가야를 주제로 만든 공연이 펼쳐지는 공연장도 있고 각종 유물을 볼 수 있는 전시관도 마련했다. 가야 왕관 만들기, 활쏘기, 도자기 빚기 체험도 가능하다. 익사이팅 사이클, 집라인 같은 스릴 어트랙션도 있다. 가야테마파크 1년 방문객수는 24만명 정도다.
가야를 주제로 펼쳐지는 공연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가야왕궁은 이 시대 사람들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다. 가야왕궁이 어떻게 생겼는지 역사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신라시대 궁궐을 참고해 만들었다. 가야왕궁은 왕과 왕비의 처소 그리고 집무실로 나뉜다. 궁 내부에는 가야의 역사, 수로왕과 허왕후의 러브스토리를 주제로 전시를 꾸며놨다.
왕의 집무실 태극전 앞마당에서는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지난해 시범사업으로 시작한 ‘캠프닉’이 반응이 좋았다고. 왕궁을 배경으로 미디어아트도 진행했다. 권민혁 가야테마파크 홍보 담당은 “가야 역사 콘텐츠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역사 공부를 한 다음 가야테마파크에서 즐기면서 각종 관련 체험을 하면 더 좋다”고 말했다.
가야왕궁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태극전에 들자 이영주 김해시 문화관광해설사가 이야기를 보탰다. “‘삼국유사’에는 6개의 가야 이야기가 나오지만 일본이나 중국에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12개에서 많게는 24개의 나라로 구성된 연맹체였다고 합니다.” 가야는 42년부터 562년 신라에 흡수되기 전까지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연맹체였다.
김수로왕은 연맹체 중 가장 힘이 셌던 금관가야를 세운 인물이다. 김해 김씨의 시조 김수로왕은 탄생부터 남다르다. 알에서 태어났다. 6개 알에서 각각 사람이 태어났는데 그중 첫 번째가 김수로였다. 6명은 각각 6개 가야국의 왕이 됐다.
가야왕궁 전시의 한 축을 담당하는 건 허황옥이었다. 허황옥은 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인도에서 머나먼 가야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왕궁 한쪽에 펼쳐진다.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허황옥을 주제로 꾸민 전시관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48년 인도 아유타국 왕, 즉 허황옥의 아버지가 꿈에서 계시를 받는다. 가야라는 나라로 가서 김수로왕을 만나 결혼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2달의 긴 항해 끝에 허황옥은 신하 여럿과 함께 가야 땅 ‘망산도’에 도착했다. 같은 계시를 받은 수로왕이 신하를 보내 허황옥 일행을 맞이했고 둘은 혼례를 치렀다.
2000년 전 인도 여인과 가야 남자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진 걸까. 세기의 사랑에 대한 해석은 저마다 분분하다. 개인적으로 허황옥이 한 번에 인도에서 가야로 온 것은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타당하게 들렸다.
아유타국이 월지족에게 공격당하자 허황옥을 포함한 왕족은 중국 사천 지방에 정착을 하게 된다. 허황옥이 가야에 올 때 ‘한사잡물(漢肆雜物)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한사잡물은 ‘중국 한나라의 사치스러운 여러 물건’을 뜻한다. 아야타국이 망하고 허황옥의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했고 중국에서 다시 가야로 넘어온 것이다.
허황옥을 주제로 꾸민 전시관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이영주 해설사는 “아마 둘이 중국에서 만나 정혼을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수로왕 역시 북방에서 온 이주민 출신이었다는 해석도 있으니 더 신빙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수로왕은 나라 세우고 난 후 7년 동안 혼인을 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후사를 위해 결혼을 강요했지만 수로왕은 “왕비는 하늘이 정해줄 것이니 기다려라”는 말만 반복했다. 7년 동안 결혼하지 않은 건 이미 정혼자가 있었기 때문이고 그 주인공이 바로 허황옥이 아닐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알면 알수록 아리송했다.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역사 여행’을 생각하고 왔는데 퍼즐 조각을 맞추듯 상상력을 발휘하고 의미와 상징을 해석해야 하는 ‘스토리텔링 여행’이 돼버렸다. 처음엔 혼란스러웠지만 어느새 점점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답은 없다. 상상하는 대로 이야기를 꿰어나가면 된다. 마치 ‘열린 결말’ 같았다.
가야왕궁의 봄 풍경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 하늘 가까이로 떠나는 김해 여행
가야테마파크 상공을 가로지르는 익사이팅 사이클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왕궁에서 나와 머리도 식힐 겸 몸을 쓰기로 했다. 테마파크 상공을 가로지르는 ‘익사이팅 사이클’을 탔다. 높이 22m 상공에 매달린 줄을 따라 자전거를 타는 스릴 액티비티다.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줄에 연결된 자전거에 오르면 출발 준비 완료. 하늘에서 자전거를 타고 바라보는 가야테마파크의 모습은 훨씬 정겨웠다. 발아래엔 초가를 올린 테마파크 건물이, 테마파크를 감싸 안은 분성산 곳곳에 만개한 벚꽃 나무가 봄바람에 살랑거렸다.
익사이팅 사이클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가야테마파크가 2000년 끊겨버린 역사를 간직한 곳이라면 분산성은 가야에서 시작해 조선 후기까지 이어져 온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장소다. 분산성은 산 정상을 돌로 쌓아 두른 테뫼식 산성이다. 삼국시대 만들어진 산성이 전부 테뫼식으로 만들어졌다. 산성 서쪽에서 발굴된 가야 토기 등 유물로 미루어볼 때 가야 때 처음 산성이 세워졌을 거라고 짐작한다.
분산성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산성 총 둘레는 923m 정도 된다. 가야테마파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 동문터다. 동문에서 출발해 해은사~충의각~봉수대~서문~보존구간~북문까지 호젓한 산책을 즐길 수 있다. 해은사는 허황옥이 무사히 가야에 도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전해진다. 규모가 아담한 사찰에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해은사와 주변 산책로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분산성은 오랜 역사에 비해 비교적 깔끔하게 정비된 모습이다. 지금 볼 수 있는 성곽 대부분은 임진왜란 후에 한 번, 고종 때 한 번 다시 쌓은 것이다. 서문을 통과하면 ‘보존구간’이라는 팻말을 볼 수 있는데 약 30m 되는 구간이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보존구간이 끝나는 지점이 옛날 북문이 있던 곳이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분산성은 최근 김해 ‘노을 맛집’으로 이름났다. 용 비늘같이 구불구불 이어지는 산성 뒤로 지는 석양이 무척 아름답다고 SNS를 통해 입소문이 퍼졌다. 시간대가 맞지 않아 노을은 보지 못했다. 박무 때문에 하늘도 탁했다. 대신 꽃구경을 했다. 부산스럽지 않아 좋았다. 김해 토박이들이 쉬쉬하는 숨겨진 마을 명소라는 말이 이해됐다.
분산성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 가야테마파크와 함께 가볼 만한 여행지
수로왕릉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한국관광 100선에 꼽힌 가야테마파크와 연계할 수 있는 여행지로는 수로왕릉과 왕비릉, 수로왕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구지봉 등을 추천한다. 김해 구도심 서상동에 위치한 수로왕릉은 사적 제73호로 지정됐다. 너른 평지에 마련된 왕릉 건물 대부분은 조선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이다. 수로왕릉에 대한 기록도 여럿 남아 있다. 문무왕 첫해에 대대적으로 정비한다는 내용이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1614년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는 임진왜란 때 벌어진 수로왕릉 도굴 사건도 나온다. 무덤을 덮은 봉산은 임진왜란 후 만들어졌다.
수로왕릉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수로왕릉 바로 옆에는 김해시에서 운영하는 한옥체험관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수릉원이다. 가야무덤 300기 정도가 발견된 곳을 공원으로 꾸며 누구나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만남을 테마로 꾸몄다. 왕릉과 가까운 공원 입구에 허황옥 동상을 세웠다.
수릉원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수로왕릉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수로왕비릉이 있다. 봉산 아래쪽에는 ‘타사석탑’ 있는데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중요한 문화재다.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아유타국에서부터 배에 싣고 온 것이랬다. 1800년대에 제작한 김해부내 지도에도 석탑이 있던 곳이 표시돼 있다. 붉은빛의 석탑은 여기저기 훼손된 자국이 많다. 어부들이 석탑에서 돌을 떼다가 바다에 나갈 때 부적처럼 몸에 지녔다고 한다. 후대에 들어 석탑의 성분을 분석했더니 국내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석질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왕비릉 / 사진=홍지연 여행+ 기자
수로왕릉과 왕비릉을 보고 나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왕과 왕비의 무덤이 서로 떨어져 있는 이유가 뭘까. 이영주 해설사는 세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당시 합장 풍습이 없어서 따로 묻었다는 것, 둘째는 타국에서 온 왕비가 죽어서라도 멀리 고향 땅을 바라볼 수 있도록 언덕 위에 묻어줬다는 것이다.
“마지막 가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어요. 당시 가락국은 해양세력과 철기문화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나라였어요. 해양세력이었던 왕비의 권력이 강력했죠. 가락국 2대 왕비는 당시 허황옥과 함께 왔던 신하의 딸이었고 3대 왕비 역시 인도 출신이었어요.”
무덤 가까이 있는 비석을 유심히 보자. 인도 출신 허황옥이 중국에서 왔다는 가설에 힘을 보태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비석에 보면 ‘보주(普州)’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데 중국 쓰촨(四川)성에 허씨 집성촌이 있거든요. 그곳 옛날 이름이 보주라고 합니다.”
허황옥이 도착했다고 알려진 망산도도 실제 창원시 진해에 있다. 하지만 이영주 해설사는 “기록상 망산도가 진해의 망산도가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김해공항 근처 전산마을이 있는데, 전산의 옛 지명이 망산도였거든요. 아마도 이곳이 아닐까 싶어요.”
이쯤 되니 허황옥이라는 정체 모를 인물의 정체를 밝혀내는 미션을 수행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대는 무려 2000년을 넘나든다. 김해 여기저기 흩어진 단서를 모아 그에게 한발 한발 다가가는 ‘시간 여행 + 스토리텔링 여행’에 묘하게 빠져들었다.
홍지연 여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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