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물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
와인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는 프랑스의 위대한 문호,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비록 짧은 한 문장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가장 오래된 음료 중 하나인 와인은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것을 보면 말이다.
인류의 위대한 순간에도 마찬가지다. ‘노인과 바다’로도 유명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샤또 마고(Chateau Margaux)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그를 위로한 건 어쩌면 한 잔의 와인일지도 모른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역시 원정에 나설 때마다 와인을 넉넉히 챙겨갔다고 한다. 그가 가장 좋아한 와인은 부르고뉴산인 쥬브레 샹베르땡(Gevrey-Chambertin).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전쟁터를 닮아 거칠고 강인한 맛이 특징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것으로만 인식하던 와인은 어느새 우리 일상 속에서도 깊이 자리 잡았다. 날을 기념하기 위해 좋은 와인을 곁들이는 것은 한국에서도 이제 예삿일이 아니다.
단순히 발효한 포도로 만든 음료라 칭하기엔 와인은 복잡하고 오묘하다. 원산지, 숙성 연도, 심지어 그 토양에 따라서도 맛이 천차만별이다. 와인을 수십 년간 마셨던 이들도 그 방정식이 너무 복잡하여 스스로 전문가라 칭하는 것도 피할 정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는 이들이 있다. 바로 소믈리에다.
그중 마스터 소믈리에(Master Sommelier·MS)는 가장 영예로운 자리다. 1969년부터 현재까지 합격자는 전 세계적으로 300명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취득 과정도 어렵다. 눈을 감고 특정 와인을 마신 후 생산 연도, 품종 등을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와인에 있어서는 ‘득도’한 이들만 얻을 수 있는 칭호기도 하다. 그 중 한국에 와인의 매력을 널리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가 있다. 이름은 데니스 켈리, 미국을 대표하는 마스터 소믈리에 중 한 명이다.
데니스 켈리 MS는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산 와인에 집중하고 있다. 그가 와인 커리어를 처음 시작한 곳이기도 하지만 그 기후도 맛있는 와인을 만들어 내기에 최적의 장소 중 하나기 때문이다. 해안 근처라 캘리포니아산 와인 중에는 해풍(海風)을 머금고 있거나, 미국의 광활한 대지를 닮은 풍부한 맛을 지닌 것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더 좋은 음료를 소개하고 싶다는 뜻을 담아 법인 ‘베터 베버리지 컴퍼니(Better Beverage Company)’를 설립하기도 했다. 현재 포트폴리오엔 캘리포니아의 매력을 한껏 품은 11종의 와인이 수록돼 있다. 지난 10월 그랜드 인터콘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안성재 모수 셰프와도 협업한 디너 페어링 코스는 단 1분 만에 매진되기도 했다.
이 중 눈여겨 볼 와인 중 하나는 ‘슈퍼 네서세리(Super Necessary)’다. 첫 모금에서 검은 체리와 흑자두 같은 잘 익은 과실향이 먼저 느껴지며, 이어 민트와 유칼립투스의 허브 향이 아지랑이같이 피어오른다. 과일의 단맛과 허브향이 어울리는 와중에 그린 페퍼(Green Pepper)의 톡 쏘는 맛도 살짝 가미돼 복합미를 더한다.
시볼드(Seabold)의 샤도네이 와인도 주목할만하다. 첫 향에서 잘 익은 노란 사과, 복숭아 향이 느껴지는 게 특징이다. 뒤이어 은은한 헤이즐넛과 아몬드의 고소하고 달콤한 여운이 입안을 감돈다. 레이어(layer)이라고도 부르는 맛의 층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특히 목 넘김 후 살짝 걸치는 커피 향이 매력적이다.
앞으로 데니스 켈리 MS는 캘리포니아 외에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와인을 널리 알리는 것이 목표다. 그가 그중 한국을 주 무대로 삼은 것은 한국의 와인 사랑과 잠재력을 믿고 있어서다.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베터 베버리지 컴퍼니를 통해 단순 와인뿐 아닌, 자신에게 맞는 좋은 음료를 찾아가길 바라는 것이다.
―자기 소개 부탁드린다.
“마스터 소믈리에인 데니스 켈리다.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나 오하이오로 이주했다. 어릴 적 음악인의 꿈을 지녔으나, 고급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것이 더 적성에 맞았다. 이후 와인의 세계에 빠져들게 됐다. 현재 캘리포니아 주 팔로 알토의 미슐랭 1스타 프로타쥬(Protégé)의 오너로도 활동 중이다.”
―와인 세계에 빠지게 된 계기도 궁금하다.
“2004년 나파 벨리에서 본격적인 와인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곳은 와인 문화가 깊이 자리 잡은 곳이었고, 주변 사람들 모두 와인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었다. 당시 내가 일하던 레스토랑에서 존중받기 위해서라도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무렵 밥 베스(Bob Bath)라는 마스터 소믈리에를 만나게 됐다. 그를 통해 와인의 복합적인 매력을 알게 됐다. 또 다른 마스터 소믈리에인 더그 프로스트(Doug Frost)와 같은 분들의 조언도 큰 영향을 미쳤다. 비록 39세의 늦은 나이로 와인 경력을 시작했지만 2012년 마스터 소믈리에 시험 전 세계 191번째로 습득하며 내 커리어의 중요한 전환점을 맞았다.”
―베터 베버리지 컴퍼니에 대한 설명 부탁드린다.
“올해 설립된 회사로 고품질의 캘리포니아 와인을 한국에 소개하기 위해 설립했다. 향후에는 시장을 넓힐 계획도 있다. 캘리포니아산 소량 생산되는 고품질 와인을 중심으로 레스토랑, 호텔, 소매점 등을 통해 공급하고 있다. 일전 프렌치 런드리(미슐랭 3스타)에서 10년 넘게 헤드 소믈리에로 일했었는데, 그때 맺었던 와인 생산자들의 와인을 취급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와인이라고 자부한다.”
―사업 시장으로 한국을 고른 이유가 궁금하다.
“한국인들의 와인 사랑은 대단하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동안 팔로 알토에서 와인 클럽을 운영했는데, 많은 한국인들이 와인에 대한 열정을 보여줬다. 또한 한국은 흥미로운 음주 문화도 갖고 있다. 술을 마실 때에는 그 경험을 온전히 즐기려 한다. 술 자체를 즐기다 보니 이곳이라면 통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베터 베버리지 와인은 어떤 종류들이 있는가.
“앞서 말했듯 훌륭한 와인 생산자들의 와인이 주를 이룬다. 먼저 존 알반(John Alban)는 미국에서 론 품종 (Rhône Ranger)을 개척한 선구자 중 하나다. 특히 시라(Syrah)의 경우 농익은 블루베리 등의 깊은 과실 향과 후추의 매콤함도 느낄 수 있다. 또 좋은 동료이자 친구기도 한 크리스 밀러(Chris Miller)의 와인도 있다. 그도 역시 마스터 소믈리에다. 크리스 밀러의 와인은 가격이 대부분 100달러 아래지만 품질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이번 피노 누아는 붉은 과일의 향과 부드러운 타닌을 즐길 수 있다. 시볼드 샤르도네는 첫 향에서 난초와 사과, 복숭아 향 등을 느낄 수 있다. 헤이즐넛의 맛도 나는 것이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슈퍼 네서세리는 우리가 직접 생산한 와인이다. 첫 모금부터 체리와 검은 자두의 잘 익은 맛과 민트 향을 느낄 수 있다 슈퍼 네서세리는 20년 넘게 쌓아온 나의 내공과 훌륭한 인적 자원을 통해 만든 와인이다. 한국 고객들을 염두에 두고 만든 와인인 만큼, 입맛에도 맞으리라 생각한다.”
―좋은 와인을 고르는 팁이 궁금하다.
“좋은 와인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와인의 ‘테루아(Terroir)’를 이해하는 것이다. 와인은 그 쓰인 포도가 자란 지역의 토양, 기후, 환경에 따라 품질에 큰 영향을 받는다. 와인 초보자들에겐 샤블리(Chablis)처럼 깔끔하고 상큼한 화이트 와인도 좋다. 레드 와인이라면 보졸레(Beaujolais) 같이 가볍고 과실 향이 풍부한 와인도 추천한다. 캘리포니아의 피노 누아는 부드러워 모두가 즐기기에 좋다. 또한 처음엔 오크 향이 강한 와인보다는 과실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와인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무엇인가.
“운명(Epiphany)처럼 느껴진 와인은 있었다. 바로 ‘이기갈 코트-로티 라 물린 (E. Guigal, “La Mouline,” Côte-Rôtie)’이다. 2005년으로 기억한다. 당시 손님에게 와인을 디캔팅 해주고 있었는데, 와인에 대해 물어보자 손님이 아무 말도 없이 마셔보라는 듯이 지긋이 쳐다보더라. 한번 마셔봤는데, 그 맛과 향이 너무 좋아서 잊을 수 없다. 비싼 와인이기도 해서 그 이후 접하진 못했다. 그러나 다시 마실진 모르겠다. 실망할 수도 있어서 사실 조금 두렵다. (웃음) 당시의 온도, 분위기, 모든 것이 완벽했기에 또 마신다 해도 그때의 감동은 못 느낄 것 같다.”
―이번 들여온 와인 중 한국 음식과 잘 어울리는 종류를 추천해 준다면.
“아드와 (Adroit) 와인을 추천한다. 오렌지가 가미된 내추럴 와인(natural wine)이다. 내추럴 와인은 맛이 좀 거칠고 정형화 되지 않은 ‘펑키 (funky)’함을 지니는데, 이게 한국의 숙성 발효한 음식들과 잘 어울린다. 김치, 장아찌와 곁들여도 좋다. 숙성된 해산물도 궁합이 좋다. 볼드 와인사의 카리냥(Carignan) 와인도 추천한다. 블랙베리의 맛이 충분히 느껴지는 와인인데 후추 향도 풍부해 삼겹살, 불고기와도 잘 맞는다. 이 와인을 만든 크리스 밀러 역시 이 와인을 맛보자마자 한식 바비큐를 떠올렸을 정도다.”
―자신의 삶을 와인에 비유한다면 어떻게 설명하고 싶은가.
“흥미로운 질문이다. 하나를 꼽자면 샴페인으로 하고 싶다. 샴페인은 다양하면서도 복합적인 스타일을 갖고 있다. 내 인생과 비슷하다. 캘리포니아로의 이주, 음악가로서의 여정, 세계 최고 레스토랑에서의 경험, 마스터 소믈리에까지 다채롭고 풍부한 삶을 살아왔다. 또 즐거운 날이면 샴페인을 터트리지 않는가. 그런 행복 속에서 살아왔다고 믿고 싶다.”
―소믈리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조언 한 마디 부탁드린다.
“소믈리에가 되고 싶으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라고 조언하고 싶다. 독서, 팟캐스트를 통해 이론을 배우고, 다양한 와인을 실제로 마시며 미각을 넓혀라. 좋은 멘토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와인의 세계는 방대하기에, 언제나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마시고 싶은 와인이 있다면 무엇인가.
“도멘 죠르주 & 크리스토프 루미에 뮈지니 그랑 크뤼 (Domaine Georges & Christophe Roumier Musigny Grand Cru)를 고를 것 같다. 우아하고 고급진 맛이 최고다. 향도 뛰어나고, 매혹적이며 오감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한국 독자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린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 오게 돼 매우 기쁘다. 앞으로 좋은 와인을 자주 소개해 주고 싶다. 분명 후회 없는 선택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보내주시는 관심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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