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늘 생존 게임이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도, 지구 반대편의 낯선 땅 콜롬비아 보고타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선 지독해져야 한다. 어떻게든 먹고살기 위해서, 나만 바라보는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내달리는 것 밖에 방법이 없다. 오직 살아내기 위한 송중기의 처절한 얼굴이 스크린을 꽉 채우는 영화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 커다란 울림을 안기는 이유다.
31일 개봉하는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제작 영화사 수박)은 한국영화에서는 비슷한 시도를 찾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작품이다. 가까운 아시아나 아메리칸드림의 나라 미국도 아닌 생소한 남미의 국가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 정착한 한인들의 삶에 깊숙하게 들어간다. 먹고 먹히는 세계처럼 보이는 그곳에도 룰이 있고 정도 있다. 다만 단 한 명만 살아남아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한다. 희망과 비감이 교차하는 기회의 땅이 관객을 부르고 있다.
2024년 한국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보고타’는 탄탄한 시나리오로 기획 단계에서부터 이미 주목받았다. 보고타 현지 올 로케이션이라는 목표로 제작을 추진했고, 이에 송중기를 중심으로 이희준 박지환 조현철 김종수 권해효 등 쟁쟁한 배우들이 합류하면서 진용을 갖췄다. 연출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김성제 감독이 했다. “관객이 콜롬비아의 한복판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는 감독의 바람은 스크린에서 실현된다. 연말과 연초 극장가에서 ‘하얼빈’과 더불어 강력한 흥행 돌풍을 일으킬 작품으로 ‘보고타’가 주목받고 있다.
● 강점 (Strength) … 본 적 없는 리얼한 세계
이야기는 외환위기로 인해 기업들이 연쇄 도산하고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한 1997년부터 시작한다. 19살 국희(송중기)의 아버지 근태(김종수)는 봉제공장을 하다가 외환위기로 파산하자 가족을 끌고 미국 이민 길에 오른다. 미국으로 가기 전 잠시만 머물려던 보고타에 완전히 뿌리내리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근태는 보고타에서 터를 다진 한인 상인회의 실제 박병장(권해효)를 찾는다. 그와는 과거 베트남 전쟁에 함께 참전한 전우 사이. 근태는 박병장이 자신을 도울 거라고 호언장담하지만, 기대는 빗나가고 그때부터 어린 국희에게도 시련이 시작된다.
책임감 없는 부모를 대신해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국희의 끈질긴 생존본능은 박병장과 그의 수하인 수영(이희준)의 눈에 들고, 이후 12년에 걸친 국희의 파란만장한 삶이 빠르게 펼쳐진다. 극중 콜롬비아는 되는 일도 없지만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로 묘사된다. 법과 무법의 경계에서 국희는 박병장을 넘고, 수영을 딛고 일어나 점차 세력을 키워간다.
영화 ‘박열’과 ‘리틀 포레스트’ 등의 시나리오를 통해 실력을 증명한 황성구 작가가 집필한 ‘보고타’는 감히 상상하기도 어려운 콜롬비아의 한인사회를 배경으로 물러설 곳이 없는 사람들의 치열하고 처절한 생존기를 담는다. 인물들의 상황과 처지가 리얼하게 다가오는 데는 실제 그 세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에 정착한 한인들, 먹고 먹히는 험난한 세계가 치밀한 사전 취재와 현지답사를 거쳐 완성됐다.
김성제 감독은 시나리오 각색에 참여하면서 현지 교민들과의 인터뷰 등을 통해 리얼리티를 더했다. 국희는 물론 모든 캐릭터들에게 보고타는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공간이 아닌, 뿌리를 내리고 정착해야 하는 땅이다. 영화가 담은 리얼한 세계는 그렇게 탄생했다.
● 약점 (Weakness) … 인물의 연대기 집중해서 봐야
‘보고타’는 여러 사건과 여러 인물이 등장하지만 큰 줄기는 12년의 험난한 세월을 굳건하게 버틴 국희의 연대기다. 순간순간 드라마틱한 사건들이 터지면서 국희를 위협하지만 범죄 액션 장르 스타일의 쾌감이 아닌, 점층적으로 쌓아가는 긴장으로 감정을 뒤흔드는 영화다. 집중력을 요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관건은 관객이 국희에 얼마나 공감하는지에 달렸다. 송중기의 어깨가 그만큼 무겁지만, 개봉 전 언론 시사회를 거치면서 얻는 평가에 기댄다면 전망은 긍정적이다. 특히 극 초반 보고타에 막 도착한 국희 가족이 택시 강도를 당한 순간, 앞뒤 보지 않고 도둑을 잡기 위해 내달리는 송중기의 절박한 모습은 그대로 관객을 몰입하게 만드는 결정타가 된다.
해외 로케이션 당시 긴박하게 이뤄진 촬영 현장에서도 송중기는 김성제 감독은 물론 동료 배우들에 자극을 불어넣는 존재였다. 감독은 택시 강도 장면을 두고 “그때 국희가 주저할 수도 있고 울면서 달려갈 수도 있는데 송중기식으로 달려간다”며 “국희는 어리지만 패기를 장착하고 시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삶의 끝까지 몰린 인물이 어떻게든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절박함을 송중기는 ‘패기’의 얼굴로 표현했다. 배우로 한 단계 도약한 송중기를 만날 수 있다.
한 인물의 연대기는 돈과 성공을 향해 들끓는 욕망과 끊어낼 수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까지 아우리면서 확장된다. 이를 통해 영화는 단지 국희의 연대기나 성장기로만 표현할 수 없는, 낯선 땅에 정착한 한인들의 집요한 연대기로 풍부한 해석을 낳는다.
● 기회 (Opportunity) … 완성도과 극장가 활기
연말 극장가는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다. 24일 개봉해 이틀 만에 100만 관객을 모은 ‘하얼빈’이 지핀 열기다. 연중 일일 관객 수가 가장 많은 날이 성탄절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키면서 25일 하루에 156만명을 극장으로 불러 모았다. 올해 최다 일일 관객 수다. 당분간 ‘하얼빈’의 흥행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올해의 마지막 날 출격하는 ‘보고타’와의 동반 흥행이 예측되고 있다.
기대감은 영화의 완성도에서 비롯된다. 대부분의 촬영을 콜롬비아 현지에서 진행한 제작진의 고집스러운 뚝심은 영화 곳곳에서 베어난다. 제목 그대로 낯선 땅이지만 기회도 품고 있는 보고타에서 벌이는 국희의 분투가 나와 무관한 공간에서 벌어진 가상의 이야기가 아닌, 지금 내 삶에 빗대어 더 몰입하게 만드는 생존기로 다가온다.
김성제 감독은 2009년 일어난 용산 참사 소재의 영화 ‘소수의견’을 통해 이야기와 인물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완벽주의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그 영화에 매료된 건 송중기도 마찬가지였다. 빈틈을 주지 않는 감독의 시선은 이번 ‘보고타’로도 이어진다. 감독의 시선에 담긴 국희의 삶 그리고 보고타라는 세상이 스크린을 꽉 채울 때,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쾌감이 무엇인지 다시금 느껴진다.
● 위기(Threat) … 손익분기점 돌파 궁금증
‘보고타’의 순제작비는 125억원으로 알려졌다. 같은 시기 맞붙는 ‘하얼빈'(280억원)보다 낮아 부담이 덜하지만, 최소 300만명을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다. 영화의 흥행 여부를 판가름하는 첫 기준인 손익분기점 도달을 낙관할 수는 없는 상황. 물론 ‘보고타’뿐 아니라 동시기 개봉해 상영 중인 한국영화 모두가 안고 있는 숙제이기도 하다.
일단 ‘개봉일 특수’를 노려볼 만 하다. 31일 개봉해 공휴일인 새해 첫날까지 관객을 빠르게 모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시기에 ‘하얼빈’은 개봉 2주째에 접어드는 만큼 신작 효과는 ‘보고타’가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초반 관객 동원을 좌우한다는 사실이 ‘하얼빈’으로 또 한번 확인된 상황에서 그 흥행 바톤을 ‘보고타’가 이어받는다.
개봉에 맞춰 송중기는 그야말로 ‘총공’에 나선다. 개봉 다음날인 1일부터 첫 주말인 4일과 5일까지 서울 주요 극장들을 직접 찾아 무대인사를 갖고 관객과 가깝게 만난다. 영화를 내놓는 배우들이 얼마나 친근하고 활발하게 관객과 소통하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반응과 스코어가 갈리는 분위기에서 송중기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출연을 결정하고 작품이 공개되기까지 무려 4년을 쏟아부은 작품에 임하는 송중기의 각오가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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