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으로 마주하니 더 반갑네요. 요즘 새 이름으로 이런저런 자리에 서는 기분은 어떤가요
익숙지 않아요. 주변에서 다들 감독이라 부르니 ‘감독인가?’ 싶죠(웃음). 정신없어요. 배우 할 때나 연출할 때나 그저 사람들이 콘텐츠로 재미를 좀 느끼셨으면 좋겠는데, 그것만 생각하면 이름이 뭐든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아요. 그저 문화예술인의 일인 거니까.
어두운 골목에 있는 조명 가게에 특별한 사람들이 찾아오며 시작되는 이야기죠. 〈조명가게〉에서 원영 역을 연기한 주지훈은 “김희원은 배우로서 현장에 함께할 때와 감독으로서 함께할 때 크게 다르지 않았다”라고 증언하더군요
연기할 때도 제 연기가 작품의 전체적 그림에서 어울리는지 늘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전체 흐름에 관한 의심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감독일 때도 마찬가지죠.
연출을 전공하긴 했지만 ‘김희원 은퇴설’이 농담처럼 돌 정도로 감정선과 디테일에 호평이 이어지더군요. 대중은 “그 김희원이 그 김희원이었어?” 하며 제대로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놀라시겠죠. 제 주변에서는 한 번도 시리즈를 연출해 본 적 없는데 왜 지금, 뜬금없이 〈조명가게〉를 하냐고도 물었어요. 동시에 그럴 줄 알았다고, 저를 잘 아는 분들은 “언젠가는 할 줄 알았다”고도 해요. 그런 기대감이 부담일 때도 있었고, 괜히 했다가 창피당할 것 같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다들 의아했을 겁니다. 동명의 웹툰 원작자 강풀이 직접 대본을 쓴 〈무빙〉을 성공시킨 이후 이 중요한 흐름에서 왜 김희원과 협업했을지(웃음)…
그러니까요. 어느 날 강풀 작가님이 “〈조명가게〉 한번 해볼래요?” 하셨어요. 저는 그러다 “아, 해볼까요?” 했습니다. 어영부영 말이죠. 처음에는 제 연출작을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너무 쉽게 결정하는 거 아닌가 싶었어요. 제작사 대표님도 마찬가지였는데 다들 쉬운 결정 아니라고, 믿음이 간다는데 도대체 뭘 보고 믿음이 갔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엄청 고민하다 ‘그래, 한번 해보자’ 싶었습니다. 사실 저 재밌으려고 했어요.
고민이 컸던 이유는 뭐였습니까
콘텐츠는 그 크기를 떠나 함부로 세상에 나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주의거든요. 재미없으면 괜히 사람들 시간 빼앗고, 경제적으로도 낭비예요. 그래서 의심을 거듭했어요. 과연 이 작품을 내가 연출하는 것이 먹힐까, 그렇다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데뷔작이 누적 1억5000만 뷰의 〈조명가게〉라니. 쉽지 않았겠습니다. 원작을 영상화하는 것도 과제지만, 공포와 휴머니즘을 서로 튀지 않게 지탱해야 한다는 점, 원작의 긴 호흡을 OTT에서 속도감 있게 펼쳐내야 하는 것까지도요
처음 대본을 받았을 땐 정말 쉽지 않겠다고 생각했죠. 멋진 글이지만, 화면으로 옮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현실과 정신세계를 오가는 세계관이기에 헷갈리는 지점도 있었고요. 이 작품에 어떤 철학으로 다가가는 것이 맞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시리즈물이라는 특성을 살려 편마다 전략을 잘 짜보기로 했죠. 1화를 보면 2화가 보고 싶어야 하고, 3화는 ‘어… 어?’ 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극의 흐름을 타야 계속 보게 될지 연구를 거듭했어요. 흐름을 놓치지 않는 것이 과제였습니다. 1화는 ‘스릴러’처럼 보이고, 2화는 궁금하기만 하면 안 되니까 ‘호러’로 눈길을 붙잡으려 했죠. 3화는 ‘스펙터클’로 이어가다 4화에서 ‘정답’을 주기로 했습니다. 계획한 대로 시청자들이 반응해 줘서 기뻤어요. 생각을 정확하게 읽어 준 것도 신기했고요.
등장인물이 많기에 4화까지 그들의 서사를 차곡차곡 쌓는 대신, 호러 문법으로 초반 눈길을 사로잡은 전략은 통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은
정서에 관한 것이죠. 시청자들이 무서웠다가, 조금 슬펐다가, 사랑을 느꼈다가, 신이 났다가 하는, 그런 정서를 부여하는 일 말이에요. 물론 그림이 좋거나 미장센이 의미심장한 것도 좋지만, 제 기준에서 그런 건 곁가지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가?’ 이 지점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시리즈 한 편으로 시청자가 무서움을 느끼고 눈물 짓는다는 게 쉽지는 않잖아요. 나름 계획은 했지만, 사실 시청자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예측하겠어요.
첫 촬영을 앞두고는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늘 이상은 높고, 현실은 어디쯤인지 잘 모르겠고, 어느 선에서 ‘오케이’를 해야 정확할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촬영 끝까지 그것을 기준으로 삼을 테니까요. 정해진 컨셉트와 콘티 그리고 현실적인 부분까지 아울렀을 때 가장 최선은 어느 선인지,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어느 적정선을 ‘딱’이라고 말해 줘야 할지…. 첫 촬영 전에는 그 고민이 너무 커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웃음).
그래서일까요? 배우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은 건 불필요한 신 하나 없이 프리 프로덕션부터 굉장히 철두철미하게 촬영이 진행됐다는 점입니다. 효율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나요
현장에서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죠. 세팅을 마친 후 현실적으로 몇 컷을 찍을 수 있을지, 그렇다면 세팅당 시간이 얼마나 걸리며, 그 커트 안에서 감정이나 뉘앙스를 다 담을 수 있을지 계산을 철저하게 했어요. 경제적 부분을 떠나 시간이 지연되면 다들 체력이 무너지고, 심적으로도 지치니까 정해진 시간 내에 최선을 뽑는 일이 중요했거든요.
가장 공들였거나 마음에 드는 장면은요? 개인적으로는 흐름상 ‘1막’의 종결에 해당하는 부분이자 이야기 교차점이 되는 4화의 마지막 시퀀스, 김광석의 곡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흐르며 중환자실 환자들의 얼굴을 원 테이크로 보여주는 신입니다만
세트를 조금씩 부숴가면서 찍은 장면이에요. 천장이 다 막혀 있으니 세트 윗부분을 걷어내야 카메라가 움직이거든요. 부숴가면서 찍은 다음 부순 부분을 CG로 메우는 방식이었는데, 카메라 워킹을 디자인하고 계획하고 찍을 때까지 며칠 걸렸어요. 배우들 없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좋을지, 카메라가 빠졌을 때 어떤 부분을 CG로 메울지 사전에 철저히 연습했습니다. 덕분에 배우들은 1시간 반 정도 푹 자듯 누워 있었죠(웃음). 모든 신에서 그랬어요. 5화 버스가 추락하는 장면도 버스 세트를 직접 돌려가며 시뮬레이션을 거듭했습니다. 어떤 부분은 실사로 찍어 이어 붙였고요. 다리에 실제로 비를 뿌리면서요.
그 외에도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다면
6화에서 지영(김설현)과 현민(엄태구)의 추억이 서려 있는 벚꽃 길이 예쁘게 잘 나와서 기억에 남습니다. 원래 낙엽 길에서 찍으려다 낙엽이 ‘훌러덩’ 하고 떨어져버리는 바람에 미리 구해둔 장소를 못 썼거든요. 급하게 벚꽃 길로 바꿨어요. 하필 벚꽃 축제 기간이라 사람이 많아서 촬영이 어려웠는데, 축제가 끝나자마자 3일 만에 장소를 구했어요. 마지막 촬영 날이었는데 와, 그거 못 구했으면 어떻게 했을지 지금도 끔찍해요. 사실 제게는 모든 장면이 다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죠.
학교와 병원, 조명 가게와 골목길을 비롯한 세트 디테일은 그 시대가 모호할 뿐 아니라, 너무 환상적이지도 않고 현실 같지도 않게 꾸려졌습니다. 어떻게 실마리를 찾아간 건가요
골목길도 시뮬레이션을 먼저 만든 후 그 시뮬레이션과 비슷한 길을 찾았어요. 거기서도 찍고 세트에서도 찍었죠. 미술감독과 한참 얘기하고, 돌아다닌 것 같아요. 저희가 찾아낸 현실의 길에서 특수 효과로 어느 정도의 판타지를 부여하는 것이 좋을지 논의하다 3D 그래픽으로 실물화했습니다. 200~300m 정도, 실제 걷는 속도와 뛰는 속도를 계산해서 만들었어요. 그 위에 10cm 정도 시멘트를 깔았죠. 미술 팀은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을 정도로(웃음) 애착을 보여줬어요. 비를 뿌리는 장면이 많아서 시멘트 밑에다 배수 처리 시설을 해놨는데, 아무리 세트지만 겨울이라 쉽게 얼어버리고, 얼면 배수관이 막히니까 24시간 전체 난방을 돌리고, 배수되는 양을 초과하면 삽으로 퍼내고…. 암튼 전쟁 같았어요.
같은 ‘전우’이기도 한 강풀 작가와는 전작 〈무빙〉에서 배우와 작가로 호흡했고, 이번에는 감독과 작가로 만났는데.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지기도 했나요
작품은 소통이에요. 제 기준에서 소통이란 정말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내고, 어떻게든 붙어 있어야 하는 일이죠. 그리고 단어 하나하나의 가치관을 계속 맞춰가는 일이기도 하고요. ‘어두운 골목길을 걸어간다’는 표현에서 떠올리는 어두운 골목길이란 저마다 다를 테니까. 그래서 새벽 2시에도 갔다가, 아침 7시에도 갔다가. 하여튼 강풀 작가 작업실에 엄청 갔어요. 틈만 나면 가서 얘기를 정말 많이 했죠. 갔다가도 뭐 하냐고, 커피 한잔하자고 또 가고. 작가님은 뭐 재밌었다지만 귀찮았을 거예요(웃음). 작가님은 제가 내는 의견을 순간적으로 ‘탁’ 받은 뒤 곧장 글로 써내요. 또 그의 여러 작품을 보면 아시겠지만, 사람의 정서를 기막히게 담아내죠. 제가 연기자다 보니까 직접 연기해 가며 감정이 잘 나오는지, 대본을 어떻게 고치면 좋을지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정말 디테일한 것까지요.
그런 의미에서 배우들과 소통은 훨씬 더 원활하지 않았나 싶어요. 아무래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그간 몸소 체감했을 테니까
배우들에게는 용기만 주면 돼요. 어떤 작품이든 연기를 잘하려는 욕심이 엄청난 사람들이거든요. 그 욕심을 끌어내주면 그만이죠. ‘방향은 이러하니 그 다음부터는 그냥 알아서 해’라고 주문하면 부담은 느낄지라도 스스로 무언가 창조하려고 노력하거든요. 때로는 그게 맞는지 아닌지 불안해하는데, 그럴 때는 불안함을 잠재우고 확신을 심어주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연출의 일입니다. 물론 이건 다 제 기준입니다(웃음). 맨 처음 연기를 본 다음에 감정이 잘 안 나온다면 “알잖아? 여기서 살짝 좀 세게 하면 재밌겠다” 정도로 살짝 방향만 터주는 정도죠. 사실 〈조명가게〉에는 연기를 못하는 배우가 없어요. 다만 작품에 ‘확’ 들어오는 데까지 시간이 걸릴 뿐이니 들어오게끔 길을 터주는 거죠. 배우를 오래 해서 그런지 부담을 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웃으면서 하는 일이잖아요.
특히 버스 정류장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지영 역의 김설현 배우가 유독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그런 낮은 목소리와 톤을 쓰는 건 처음 봤거든요
많은 분이 이번 작품에서 참 잘했다고, 그간 보던 김설현과 느낌이 다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목소리 톤을 낮추고 말의 속도도 느리게 하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제대로 소화했죠. 뭐든 곧바로 수용하고 굉장히 열심히 하는 친구예요. 춥고 힘들어도 전혀 지치지 않고 솔선수범하는 배우란 걸 이번 기회에 알았어요.
〈조명가게〉는 장르적 재미도 물론이지만, 메시지의 울림도 큰 작품입니다. 산 자와 망자,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경계에 대한 생각을 평소에도 해왔나요? 귀신 같은 존재를 혐오스럽게 묘사하지 않는다는 철칙도 강풀 작가와 세운 걸로 압니다
생각은 하지만 답은 없죠. 사후 세계를 누가 알겠어요?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메시지는 “의식이 없는데 그 의지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라는 대사와 결이 같아요.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란 우리 시선에서 정의한 것일 뿐이죠.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어쩌면 그들은 그 안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거든요. 움직이는 것이 산 것이냐, 죽어 있는 것이 산 것이냐 하는 건 우리 시각의 판단이고, 제가 보는 어떤 피사체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의식이 없는 사람이든 죽은 사람이든 나름대로 살아 있다는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이런 고차원적인 얘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웃음). 4화 마지막 장면에서도 중환자들이 편안하게 누워 있지만 그 평온한 표정 뒤에서 그들은 어두운 골목길을 치열하게 오가죠. 그들을 두고 하는 의료진들의 말과 대비시켜 보여주기 위해 롱테이크 기법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해요. 순간순간을 소중하게 느꼈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굳이 강조하진 않았지만, 그런 뜻으로 찍었습니다.
오늘 감독님의 반짝이는 눈을 여러 번 본 것 같습니다. 연출의 꿈은 계속 품고 있었나요
꿈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나…. 꿈, 중요하죠. 이루려고 애써도 안 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하지만 그 직전까지만 가봐도 저는 이룬 것으로 봐요. 그 시간이 헛되지 않다고. 그런 기준에서는 감독 준비를 계속했어요. 그렇다고 열심히 한 건 아니고, 그냥 했어요. 언젠가 하게 되면 재밌겠다 싶었는데 운이 좋았죠. 모르겠어요. 꿈을 이룬 건지는. 도대체 내 꿈이 뭔지 아직 모르겠어서.
촬영하면서 돌이키고 싶거나 ‘괜히 했다’ 싶은 순간도 있었나요
그런 적은 없었어요. 진짜 행복했어요.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들었는데, 그냥 매일매일 정신없이 행복했어요. 그러니 지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스태프에게도 궁금해서 “야, 너네 아픈 데 없냐? 너네도 재밌지?” 이렇게 물어볼 정도로. 그 친구들은 애써 그렇다고 했는지 몰라도 하여튼 다들 재밌었다고는 해요(웃음). 다행이죠.
나의 연출 철학이 있다면 단 한 가지로 무엇을 꼽겠습니까
내 생각은 반드시 틀릴 수 있다. 이 점을 항상 기준으로 삼습니다. 배우들의 관점이 맞을 수도, 스태프나 마케팅 팀 등 여러 상대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전제예요. 그래야 늘 좀 더 객관적이지 않을까요.
한국영화의 전성기부터 K콘텐츠가 OTT 흐름을 타고 전 세계적으로 무구해진 이 흐름을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모두 목도해 왔습니다. 어떤 작품을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까
정서를 움직이는 작품이죠. 멋있는 그림도 좋고 스펙터클도 다 좋은데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다음 행보는 배우인가요
모르겠어요. 차기작도 없어요. 배우가 됐든 연출이 됐든, 재밌는 거 하고 싶어요.
약 2년 반의 시간을 함께한 〈조명가게〉를 “인생에 모든 걸 쏟아부은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이 시기가 앞으로의 삶에 어떤 도전이자 기억으로 남을 것 같나요
뭐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거예요. 앞으로 연출할 기회가 또 있을지, 인간의 삶은 모르는 거지만 〈조명가게〉로 보낸 시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요. 흥분하며 살았어요. 매일 무언가를 생각하고, 매일 무언가를 느끼면서. 여태 살면서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던 것 같아 약간 무섭기도 해요. 자고 일어났더니 2년 반이 없어졌어요. 참으로 노력했던, 행복했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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