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내가 사는 곳을 ‘우리 동네’라고 얘기했지만, 그곳을 진짜 ‘우리 동네’라고 느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집과 멀리 떨어진 기숙사 학교에 다녔는데, 기숙사 주변은 어쩐지 ‘우리’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스무 살에 서울로 올라온 이후엔 더더욱 서울의 어느 곳도 우리 동네로 느껴지지 않았다. 사는 곳 정도이지 내가 마음을 붙이고, 편안하게 느끼는 동네가 아닌 곳. 내가 사는 곳이 집이 아니라 방 한 칸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사를 자주 다니면서 매번 적응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상황이 나를 그렇게 느끼게 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거기 우리 동네야”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된 건 친구들과 가까이 살기 시작하면서였다.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도, 만나고 싶을 때 걸어가서 만날 수 있는 친밀한 존재가 있다는 것이 내게 주는 안정감은 생각보다 컸다. 동네에서 자주 만나니 당연히 자주 가는 카페나 음식점이 생겼고, 거길 ‘단골집’으로 부르면서 동네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메뉴도, 탁자 모양이나 위치도, 주문하면 나오는 음식의 맛도 모두 익숙해서 편안한 공간. 다소 쌀쌀맞은 서울의 어딘가에 내가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집 말고 하나 더 있다는 것, 좋아하는 사람들을 그 공간으로 초대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와인 바 ‘클로스’는 내게 그런 단골집 중 하나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면 바로 보이는 작은 와인 바였는데, 내추럴 와인을 잔으로 판다는 것 때문에 한 번 두 번 가기 시작한 게 단골로 이어졌다. 언제나 좋은 음악이 흐르고, 무엇보다 조금 무심한 사장님이 만들어놓은 적당한 거리가 좋았다.
하루는 회사에서 일하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퇴근해 지하철역을 딱 나왔는데, 클로스의 통창으로 음악 들으며 와인 마시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쩐지 그냥 집에 가기 싫어서 바에 자리를 잡았다. 평소처럼 와인 한 잔을 시키고, 수첩을 꺼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왜 마음이 너덜너덜한지,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 지금 겪고 있는 일터의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마음 가는 대로 쓰다 보니 수첩 몇 장을 넘겼다. 마치 일기를 쓰러 온 사람처럼 주문한 와인도 마시지 않고 손으로 글을 쏟아냈고, 그러고 나니 뭔가 마음에서 ‘쑥’ 빠져나갔다. 사람 사이에 있지만, 또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단골집이 있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런 마음속에 머물지 않도록 꽤 나를 잘 보살피고 있잖아!’ 환경이 갑자기 변하기 어렵다면, 나를 챙기고 회복시켜 또 잘 살아보자고 다독였다. 적절한 때에 맛있는 것도 사먹고, 와인도 마시면서 나아진 기분으로 향이 좋은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다. 행복했다.
위에 내가 ‘단골집 중 하나’였다’고 쓴 이유는 얼마 전 클로스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2년 전 우리 동네에서 다른 동네로 클로스가 이사 갈 때도 속상했지만, 그래도 다른 동네에 있는 단골집이어서 괜찮았다. 매주는 아니겠지만, 생각날 때 들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클로스가 문을 닫는다는 공지를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정말 오랜만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느꼈다. 여기서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은 클로스여서 가능했는데, 이젠 그걸 할 수 없다는 게 슬펐다. 단골집은 그곳이 내게 고유한 경험을 주기 때문에 단골집이 되는 것이므로. 오늘의 선곡과 추천받을 와인과 강아지 알바생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모든 것이 편안하게 배치돼 있지만 잘 보면 어느 하나 예쁘지 않은 게 없는 공간을 확인하는 것. 아쉬운 마음에 찾아온 손님들로 마지막 날까지 북적북적한 걸 보면 아마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서울 어딘가에 많았던 모양이다. 이 슬픔은 남은 단골집에 자주 가는 것으로 승화해야지! 이사를 해야 해서 낯선 동네에 떨어져도, 그 동네를 우리 동네라고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이젠 몇 가지 안다. 그중 하나를 알려준 내 고마운 단골집 클로스, 안녕.
홍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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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 임팩트 사업팀장이자 프로N잡러. 〈나는 오늘도 내가 만든 일터로 출근합니다〉 등의 책을 썼고, 밀레니얼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서비스 ‘빌라선샤인’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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