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스코틀랜드 길버트 아데어의 소설 ‘더 홀리 이노센트’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몽상가들’로 영화화
2024년 9월 한국에서 창작뮤지컬 ‘홀리 이노센트’로 재탄생
재치 있는 연출, 젊은 배우들의 아름다운 연기와 노래로 완성
명작은 계속된다.
스코틀랜드 소설가이자 시인, 시나리오작가이자 평론가였던 길버트 아데어(1944~2011)의 소설 ‘The Holy Innocents’(더 홀리 이노센트)는 2003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1941~2018)에 의해 영화 ‘The Dreamers’(이하 ‘몽상가들’)로 만들어졌다.
여러 영화감독의 제안이 있었으나 주저하던 작가 아데어는 감독 베르톨루치의 제안에는 바로 응낙했고, 손수 영화라는 새로운 그릇에 맞게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개봉 당시, 영화 ‘몽상가들’은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청춘의 예술적 자유와 정치·사회적 고뇌, 유아적 껍데기를 깨고 끝내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대담하게 아름다우면서도 침울하게, 몽환적이면서도 명징하게 표현해 큰 박수를 받았다. 1960~70년대를 호령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베르나로도 베르톨루치가 영화 ‘마지막 황제’(1987)에 이어 다시금, 오랜만에 거장의 면목을 확인시켰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2024년 한국, 프랑스 ‘68혁명’이 발발한 1968년 파리를 배경으로 한 젊은이들의 성장 이야기가 창작뮤지컬 ‘홀리 이노센트’(대본 천유정·한재림, 연출 천유정, 작곡 이나오, 제작 PAGE1)로 거듭났다.
길버트 아데어는 영화 ‘몽상가들’의 각본을 쓴 후 소설 ‘The Holy Innocents’의 아쉬웠던 부분을 수정해 영화 타이틀 그대로 ‘The Dreamers’를 제목으로 재발간했다. 국내 창작뮤지컬이 제목을 영화나 아데어 작가의 수정본 타이틀이 아니라 ‘홀리 이노센트’로 한 것에서 소설 원작을 작품의 바탕에 두고 있음이 보인다.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는 프랑스 누벨바그(새로운 물결) 시대의 여러 영화가 무대 위 스크린에 펼쳐지며 막이 오른다. 그리고 파리 시네마데크(상영관) ‘프랑세즈’에서 미국 헨리 킹 감독의 로맨스 ‘제7의 천국’(1937)을 관람한 미국인 유학생 매튜와 파리지엥 쌍둥이 남매 테오- 이사벨이 영화에 관해 대화하며 본격 출발한다.
매튜는 영화의 원작이 된 무성영화, 프랭크 보제이기 감독의 ‘제7의 천국’(1927)이 주인공들의 진심이 잘 드러나 더 좋다고 얘기하고 테오와 이사벨은 무성영화도 찾아보는, 자신들과 같은 시네필(영화광)을 만났음에 환호한다.
왜 프랑수아 트뤼포나 장 뤽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 대표 감독의 영화가 아니라 미국영화를 세 사람의 만남에, 이야기의 시작에 포진했을까. 제7의 천국은 사실 7층 다락방이다. 하수구 청소부 치코는 자신의 가난한 다락방을 ‘별들과 가까이에 있는 천국’이라고 생각하고, 다이안은 이렇게 깨끗한 영혼을 지닌 청년 치코를 사랑한다. 전쟁이 발발하며 두 사람은 헤어지고 순수한 영혼의 다이안은 치코를 한없이 기다린다.
Holy Innocents, 신성하게 순진무구한 사람들 혹은 순수한 영혼의 결정체. 어쩌면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 제작진은 매튜와 테오-이사벨에 남매에게서 ‘제7의 천국’ 주인공들을 보았는지 모르겠다. 가난한 연인들의 다락방은 점점 생활비가 떨어지며 끼니를 때우기 힘들게 된 세 사람의 은신처이고, 갖은 역경을 뚫고 사랑을 이뤄내듯 마침내 문밖으로 나가 참된 자유와 다 함께 잘사는 공평한 사회를 위해 깃발을 드는 용기에서 동일한 ‘순수’가 겹친다.
프랑스 68혁명은 정치 체제를 바꾸지 못했으나 사회·문화적으로 소외된 이들이 좀 더 부상할 수 있는 사회혁명으로서 성공했다고 일컬어진다. 프랑스뿐 아니라 미국,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일본의 사회·문화·인권 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대표적으로 체코 ‘프라하의 봄’도 그 연장선에 있다.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는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단 4명의 젊은이의 얘기로 압축했다. 순수한 매튜는 테오에 쉽게 경도되기도 하고 이사벨을 흠모하는가 하면, 순수한 만큼 정의롭다. 테오는 짐짓 제일 어른인 척하지만 실상 가장 유약하다. 이사벨은 혼란의 시대에 겁먹은 테오와 매튜를 품는 어머니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예측 불가의 악동이다. 테오의 대학교 친구 자크는 누구보다 먼저 길거리로 나서는 뜨거운 영혼의 소유자다.
시네마데크가 불타면서 시작된 1968년 파리의 소요, 노동자까지 가세한 총파업으로 번지며 헉명의 기운으로 뜨겁던 시대. 제작진은 네 젊은이의 어울림과 충돌, 갈등과 화해를 속이 비치는 시스루 커튼이라는 간단하면서도 매혹적인 장치와 쌓아 올린 의자들, 이동하는 식탁으로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장편소설의 내용을 가지치기해서 핵심 뼈대를 세우고, 다채로운 영화 속 공간에 견주어도 손색없게 아이디어로 무대를 꾸미고, 적재적소에 필요한 만큼만 인상적 노래를 배치하는 등 ‘재치 있는’ 제작과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무엇보다 이 압축과 재치가 생략과 꼼수로 느껴지지 않도록 젊은 배우들이 아름다운 연기로 작품을 채웠다. 매튜 역의 유현석 윤은오 최재웅, 테오 역의 윤승우 문유강 김재한, 이사벨 역의 정우연 선유하 이은정, 자크 역의 박희준 고수민.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다.
뮤지컬 ‘홀리 이노센트’를 보면 영화 ‘몽상가들’이 다시 보고 싶어지고, 원작 소설도 읽고 싶어질 것이다. 그렇게 또 명작의 생명력은 영원을 향해 나아간다. 지난 8일 막을 내린 초연, 두 번째 시즌도 틀림없이 다시 올 것을 믿는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