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머나먼 이국땅,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로 이민을 오게 된 소년 국희(송중기)는 모든 것이 낯설다. 지리 교과서에서 읽은 커피의 나라라는 정보 외에는 다른 지식이 없다. 공항에 도착한 국희는 그저 엄마 옆에 앉아, 자신만 믿으라는 아빠 근태(김종수)를 기다릴 뿐이다. 더벅머리의 국희는 경계심 가득한 눈망울로 주변을 살피며 ‘스페인어 첫걸음’이라고 적힌 책을 품에 꼬옥 품고 있다.
아빠는 미국으로 가기 전 ‘톨게이트처럼 잠시 머물다 갈 나라’라고 설명하지만 어쩐지 국희는 그 말은 영 못 미덥다. 이 어수룩한 소년은 의도치 않게 긴 시간 동안 낯선 땅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면서 변화한다. 생기와 열정이 잔뜩 밴 모습에서 건조하고 냉정한 얼굴로 바뀐 소년은 그렇게 청년이 된다. 1997년부터 2008년까지 10여 년의 시간 동안,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융화되며 생존해 나가는 국희의 일대기를 다루는 영화 ‘보고타'(감독 김성제·제작 영화사 수박)는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는 부제처럼 처절하고 치열하다.
● 송중기의 얼굴 위에 얹어진, 소년 국희의 일대기
계획은 처음부터 삐거덕댄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던 길에 만난 오토바이 강도는 총으로 위협하며 국희의 아버지가 지닌 가방을 갈취한다. 국희는 겁도 없이 강도를 쫓아 필사적으로 달린다. 결국 놓치고 말지만,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국희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의 시선이다. 국희의 분통 터지는 외침에도 그저 지켜보기만 하는 주민들을 통해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앞으로를 암시한다.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게 된 국희는 보고타의 전경을 내려다본다. 빽빽한 건물과 이국적인 풍경은 국희가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공간이다. 동전의 양면처럼 새롭게 시작해 희망을 얻을 수도, 모든 것을 잃어 절망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김성제 감독은 전작 ‘소수의견'(2015)에서 보인 날선 시선처럼, 콜롬비아 현지 로케이션으로 담은 아름답지만 생경한 풍광을 점차 낯설지 않은 곳으로 바꾸어 놓는다.
또한 감독은 수미상관처럼 극 말미 안개가 가득한 보고타의 시내를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30대의 국희를 비추는 이미지를 통해 묘한 씁쓸함을 남긴다. 이와 함께 일기장에 문장을 써내려가듯,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는 국희의 내레이션은 그가 어떻게 변화하는 지를 관객에 전달하는 일종의 안내자 역할을 한다.
국희의 삶은 박병장(권해효)을 만나며 송두리째 뒤집힌다. 박병장과 베트남전 전우인 아버지는 그 인연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큰소리 친다. 세관 출신 장인을 둔 박병장은 밀수로 의류를 값싼 가격에 들여와 시장의 상권을 잡고 있는 우두머리이자, 이곳에 머무르는 작은 한인 사회 공동체를 통솔하기도 한다. 절도범을 쫓아갔다는 국희의 무모한 행동에 박병장은 “여기서는 뭐 털렸다고 쫓아가면 안 돼”라는 주의를 준다.
“무능력한 아버지와 무기력한 어머니”로 인해 국희는 빠르게 적응하며 자신이 살 길을 찾아 나선다.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박병장의 아내가 운영하는 옷가게에서 착실하게 일하던 국희는 그의 신임을 얻어 의류 사업을 위한 밀수를 도우며, 때로는 무모하게, 때로는 지독하게, 때로는 험하게,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시류에 탑승한다.
한국에 돌아가기보다 콜롬비아에 남아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는 국희는 더는 순진한 소년이 아니다. “되는 일도 없지만 또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 아싸라비아 콜롬비아”라는 국희의 내레이션처럼, 그는 자신을 감싸던 외피를 한겹씩 벗어내며 어른이 되어간다.
● 작은 공동체, 한인 사회의 이권 다툼과 치열함
‘보고타’는 단순히 국희의 성장 서사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김성제 감독은 머나먼 이국땅에 자리를 잡고 뭉쳐있는 작은 한인사회 공동체의 결합과 붕괴에 집중한다. 박병장과 수영(이희준)으로 갈라진 두 집단에서 그들은 치열하게 이권 다툼을 한다. 그 중심에서 국희 역시 어떤 영역으로 진입하고 빠져나올지를 갈등한다. 아버지의 선택으로 콜롬비아에서 살아가지만, 이제 국희는 자신의 판단으로 무언가를 결정짓는 어른이 된 것이다.
송중기는 국희의 때묻지 않은 얼굴부터 무표정한 표정까지 오랜 기간의 일대기를 표현한다. 특히 아버지가 이민을 온 이후부터 적응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며 비극을 맞은 순간, 죽음의 위기에 몰린 순간, 배신자를 알게 된 순간마다 송중기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
이를 통해 송중기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사냥개’에서 주인으로 올라서기까지의 과정을 유연하게 표현한다. 처음 총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는 송중기의 얼굴에는 냉혈함과 비정함, 무력감이 교차한다. 그와 함께 권해효, 이희준, 조현철, 박지환은 자극제이자 변화구가 되어 ‘보고타’의 이야기를 풍성하게 한다.
한인사회의 몸집이 커진 만큼 기존의 마을 주민들에게 견제를 받는 상황도 생긴다. 같은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알레한드로는 한인사회 공동체로 인해 손실을 입자, 세관에서 힘을 써서 그들의 장사에 브레이크를 걸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와해됐던 작은 공동체는 다시 머리를 맞댄다. 아무리 영역을 확장한다고 해도 기회의 땅이라고 불리어도 그들은 철저한 국외자들이다.
앞서 1980년대부터 한국인들은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믿고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이민을 갔다. 배창호 감독의 1985년 영화 ‘깊고 푸른 밤’, 장길수 감독의 1990년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그려지는 한인사회처럼, ‘보고타’에서도 그들은 치열하지만 위태롭기도 하다. 가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다는 희망은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초반부 국희는 밀수 트럭을 운전하다가 들판에 놓여있는 성모마리아상을 보고 콜롬비아 출신 동료에게 그 의미를 묻는다. 그는 “이곳에 얼마나 많은 시체가 묻혀있는지 알아?”라며 배경을 설명해 준다. 그만큼 이 기회의 땅에는 진한 핏자국이 배어있다.
“보고타가 아니라도 어디든 먼 나라였으면 좋았을 것”이었다는 김성제 감독은 고향을 떠나온 이들의 생존과 버티는 것이 지난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콜롬비아라는 낯선 땅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국희가 “사는 게 참 벅차네요”라고 말하면서 한숨을 내뱉기까지의 10여년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영화는 ‘살아내는 것’의 버거움에 대해 말한다.
스페인어로 바퀴벌레를 뜻하는 ‘라 쿠카라차’는 박병장이 처음 콜롬비아에서 사업을 시작했을 때, 현지인들에게 들은 말로 국희와의 대화를 통해 여러차례 반복된다. 왜 그들은 이런 말을 했을까. 작고 하찮아 보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오랜시간 생존한 생명체인 바퀴벌레처럼 그들은 강한 생명력으로 이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며 그 변화를 감내하고 이겨낸 것일지도 모른다. ‘보고타’의 국희와 인물들에게도 그런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기회의 땅인지, 죽음의 땅일지 모를 머나먼 이국 땅에서 그들은 그렇게 생존하기 위해 버텨낸다.
감독: 김성제 / 출연 : 송중기, 권해효, 이희준, 조현철, 박지환 외 / 배급 : 플러스엠 / 제작 : 영화사 수박 / 개봉일: 12월31일/ 장르 : 범죄, 드라마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7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
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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