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985년 아일랜드 소도시에 거주하는 석탄 판매상 빌 펄롱(킬리언 머피)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12월, 여느 때처럼 성실하게 석탄 배달을 한다. 비록 풍족한 살림살이는 아니지만, 다섯명의 딸과 아내 아일린(아일린 윌시), 인부들을 책임져야 하기에 그는 동이 트지 않은 새벽마다 출근하며 고단함을 견뎌내는 중이다. 빌 펄롱은 얇은 옷차림으로 도로에서 나뭇가지를 줍는 소년을 지나치지 못하고 없는 살림에 동전을 쥐여주는 자상함을 지닌 인물. 아일린은 마음이 여린 남편이 가끔은 못마땅하기도 하다.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이러한 빌 펄롱의 시선을 따라가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2020년 출간된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클레어 키건의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아일랜드에 실제 존재했던 막달레나 수녀원에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처참한 사건을 고발하거나 수면 위로 드러내기보다, 비극을 목격한 개인이 ‘사소해 보이지만 커다란 결심’에 이르는 순간들을 묘사한다. 영화는 소설을 스크린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킬리언 머피의 얼굴에 윤리적인 질문들이 얹어 관객에게 말을 건넨다.
막달레나 수녀원 사건은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약 74년간 아일랜드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인권 유린 사건이다. 엄격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타락하고 방탕하다고 여겨진 젊은 여성들은 막달레나 수녀원에 갇혀 무보수와 무휴일로 강제 노역을 당했다. 정신적, 신체적인 학대도 자행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 곳에서 벌어진 비극은 세상에 알려졌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빌 펄롱은 수녀원 바깥에 위치한 외부인이지만, 평소처럼 석탄 배달을 갔다가 내부의 은밀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청구서도 전달할 겸, 문틈을 열고 수녀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침 바닥을 청소하던 소녀는 빌 펄롱을 보자마자 “저희 좀 도와주세요. 강까지 데려가 주세요. 아니면 대문 밖으로요”라고 울면서 애원한다. 소녀의 갑작스러운 애원에 당황하지만, 그 소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어느샌가 나타난 수녀들은 빌 펄롱을 타박하며 들어오면 안 된다는 폐쇄적인 태도를 보인다.
우연한 해프닝과도 같던 그 상황은 그저 아내와 딸들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어떤 것으로 고를지, 석탄 배달 주문을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고민하던 빌 펄롱의 잔잔한 일상에 균열을 만든다. 소녀의 말은 커다란 돌멩이가 돼 호수의 적막을 깨뜨린다. 빌 펄롱이 숨겨졌던 과거의 기억을 꺼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 빌 펄롱 역시 어머니와 자신을 거둬준 윌슨 부인이 없었다면, 출근길에 만난 맨발로 길거리를 배회하며 남의 집 앞의 우유를 훔쳐먹던 아이와 비슷한 처지가 됐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빌 펄롱의 과거와 현재를 중첩시키며 그의 윤리적 판단과 고뇌를 들여다본다. “어쨌든 우리 애들은 그런 일을 안 겪을 거야”라는 아일린의 말처럼 빌 펄롱의 고민들은 그의 삶 바깥에 위치한 전혀 관계없는 일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빌 펄롱은 “윌슨 부인이 당신처럼 생각하지 않아 다행이야”라고 말하면서 수녀원에서 겪은 일들을 기억에서 도려내지 못한다. 계속 재생되는 빌 펄롱의 기억은 그의 몸에 짙게 묻은 석탄가루처럼 쉽게털어지지 않는다.
카메라는 빌 펄롱의 손과 발, 얼굴을 세밀하게 비추면서 그가 느끼는 감정의 변화와 밀도를 담는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빌 펄롱은 늘 집에서 옷걸이에 코트를 걸어두고 화장실에 들어가 세면대에서 석탄가루가 묻은 손을 박박 문지른다. 그의 몸짓은 표면적으로는 석탄 가루를 지워내는 행위지만,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을 잊고 도려내고픈 몸부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다음날이 되면 또다시 더럽혀지는 손처럼, 빌 펄롱의 고민은 다시 겹겹이 쌓여 사라지지 않는다.
추가 수량을 배달하기 위해 수녀원에 다시 방문한 빌 펄롱은 석탄 창고에 갇혀 추위에 떨고 있는 소녀 세라(자라 데블린)를 마주하게 된다. 수녀들에 의해 갇힌 세라에게 빌 펄롱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주는 일뿐이다. 빌 펄롱은 “누가 거기에 가뒀지?”라며 묻는 수녀원장(에밀리 왓슨)의 고압적이고 위선적인 행동과 “일종의 놀이였다”는 세라의 어쩔 수 없는 거짓말을 들으면서 더 큰 혼란에 빠져든다.
게다가 수녀원장은 석탄 판매 청구서를 가져온 빌 펄롱에게 크리스마스 카드에 돈을 넣어 전달한다. 수녀원의 진실을 알게 된 외부인에게 가하는 은밀하지만 강력한 압박인 셈이다. 그 때 스크린을 채우는 킬리언 머피의 얼굴은 모닥불의 일렁이는 그림자로 가득 찬다.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는 빌 펄롱의 곤란한 입장을 세밀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아일랜드 소도시의 폐쇄적인 사회에서 빌 펄롱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눈을 감고 넘어가는것 뿐이다. 심지어 단골 술집 주인은 빌 펄롱에게 “그곳 수녀들이 마을의 모든 일을 관여하잖아. 수녀원과 학교는 고작 담 하나 차이인데 당신이 문제를 일으키면 애들만 힘들어질 거야”라고 일침을 가한다. 하지만 자신이 본 일을 지우지 못한 빌 펄롱은 결국 다시 수녀원을 찾는다.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소녀 세라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포커스 아웃된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앞으로 이들이 감당해야 할 무게를 예고하는 듯하다.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최악의 상황은 이제 시작이라는 걸 펄롱은 알았다. 벌써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고생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처럼 빌 펄롱의 행동은 어쩌면 무모할 수도, 용기있는 것일 수도 있다. 윌슨 부인의 사소한 배려 혹은 관심이 빌 펄롱의 지금의 삶을 만들었듯이 세라를 수녀원에서 데리고 나온 선택이 앞으로 그에게 큰 변화를 만들지 모른다. 하지만 원작이 이야기하듯 “그것들이 한데 합쳐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는 순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화를 추진했다는 킬리언 머피는 “(막달레나 수도원 사건은)일종의 집단적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기에 좀 더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대면해 그 문제를 들여다보길 바란다”고 말했다. 킬리언 머피의 말처럼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빌 펄롱의 고민과 선택, 판단을 조심스럽게 따라간다. 어쩌면 사소해 보이는 빌 펄롱의 행동이 마음을 울린다.
감독: 팀 밀란츠 / 출연 : 킬리언 머피, 아일린 윌시, 에밀리 왓슨 외 / 소설 원작 :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 / 배급 : 그린나래미디 /장르 : 드라마 / 개봉일: 12월11일/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98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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