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아트 북 메이킹의 중심에 독일의 ‘슈타이들’이 있다면, 지금으로부터 거의 100년 전엔 ‘스키라(Skira)’가 있었다. 아티스트와 긴밀하게 협업하며 품질과 형식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 아트 북의 기본 전제이자 미덕이라면, 스키라는 아트 북의 원조 격이나 다름없다. 스키라는 1928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설립된 예술 전문 출판사로, 당시 스물네 살의 이탈리아 청년 알베르토 스키라는 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선구안을 갖고 있었다. 첫 사무실은 호텔 드 라 클로슈(Ho^tel de la Cloche)의 작은 방 한 칸에 불과했으나, 지금은 전 세계의 웬만한 미술관 어디를 가도 스키라의 책을 만날 수 있다. 훌륭한 퍼블리셔 뒤엔 훌륭한 아티스트가 있다. 첫 번째 뮤즈는 파블로 피카소. 1931년에 펴낸 〈Metamorphoses of Ovid〉는 피카소의 섬세한 에칭 스케치 30점이 담긴 책으로, 고급 종이에 145부만 제작돼 작가의 50번째 생일인 1931년 10월 25일에 출간됐다. 이를 계기로 스키라와 피카소는 지속적으로 협력하며 피카소가 작고하기 전까지 우정을 이어갔다.
한편 1933년, 서른이 채 되지 않은 해에 알베르토는 초현실주의 예술을 표방하는 잡지 〈미노타우르 Minotaure〉를 창간했다. 여기엔 미로, 자코메티, 마그리트, 피카소, 마티스, 달리, 발튀스 등 내로라하는 아티스트가 참여했을 뿐 아니라 라캉 같은 정신분석학자의 텍스트도 실어 폭넓은 사유를 제공했다. 앙리 마티스 역시 스키라의 오랜 파트너다. 스키라의 초창기 출판 활동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그는 〈Minotaure〉를 비롯해 그 외 다수의 책에 표지 삽화와 북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Florile‵ge des Amours de Ronsard〉라는 책엔 앙리스의 삽화가 126개나 실렸는데, 제작 기간만 7년이 걸렸다. 이 외에도 프랑스 화파의 걸작을 모은 ‘도서 박물관’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펴낸 500×650mm 크기의 대형 책 〈Les Tre′sors de la Peinture Francaise〉, 텍스트와 이미지의 실험적 결합을 시도한 〈Les Sentiers de la Cre′ation〉 등은 스키라의 또 다른 주요 컬렉션이다. 예술과 책에 대한 진정성을 기본으로 오늘날 스키라는 전 세계 거장 예술가의 작품을 기념하는 고품질의 아트 북과 전시 도록을 꾸준히 펴내고 있다. 수많은 예술가 틈에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책을 통해 이상을 구체화했던 알베르토. 그의 꿈은 여전히 순항 중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