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 지금처럼 발에 치이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1930년대 영국의 출판시장은 양극화돼 있었다. 고전문학이나 당대 주목받는 작가들의 책은 장정 방식으로 제작돼 상류층이나 학식 있는 사람들의 차지였고, 일반 대중에게는 값싼 종이에 통속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는 낮은 수준의 책이 돌아갔다. 1934년, 보들리 헤드(Bodely Head) 출판사의 매니징 디렉터 앨런 레인(Allen Lane)은 평소 친했던 애거사 크리스티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기차역 서점에 들렀다. 그는 값싼 종이에 인쇄된 낮은 수준의 책을 보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를 계기로 설립한 출판사가 바로 영국에서 첫 번째로 문고판을 만든 ‘펭귄 북스’다. ‘읽을 만한 책’과 ‘살 만한 책’ 사이에서 앨런은 틈새를 잘 공략했다. 가볍고 간편하게 읽을 수 있는 형태에 담긴 양질의 문학은 당시로선 충분히 획기적이었다. 앨런은 기존 양장본 책을 재발행하는 것을 시작으로 점점 고유한 시선이 담긴 시리즈를 출판했다. 셰익스피어, 헤밍웨이, 제인 오스틴, 도스토옙스키 등 고전문학 작품을 다룬 ‘펭귄 클래식’부터 과학·철학·역사·사회학 등 분야별 교양을 다루는 임프린트 ‘펠리컨 북스’, 사회적·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펭귄 스페셜’ 등 다양한 장르물을 전개했다. 표지와 책에 그려진 작은 펭귄 한 마리를 빼고 이 출판사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앨런 레인은 출판사의 이름과 로고를 고민하다 펭귄을 떠올렸다. 가볍고 재미있는 동시에 우아하고 지적인 느낌을 주는 동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직원을 시켜 펭귄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관찰한 다음, 이를 디자인에 반영하도록 했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사실. 직원 에드워드 영(Edward Young)은 2024년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펭귄의 오리지널 로고를 그리고, 펭귄 북스를 대표하는 3단 형식의 표지를 디자인했다. 결과는 성공적. 이 친근하면서도 귀여운 아이콘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기에 충분했고,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한 선과 색상으로 채운 표지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클래식이 됐다. 심지어 앨런은 펭귄 북스의 전용 자판기까지 만들었다. 일명 ‘펭귄큐베이터’로 펭귄 로고가 새겨진 자판기 앞에서 자사 책을 꺼내는 앨런의 사진이 남아 있다. 어쩌면 출판계 최초의 전방위적 브랜딩 사례가 아닐는지. 가격 경쟁력과 디자인 역시 펭귄이 이룩한 주요 성과지만, 100년 가까이 이어진 롱런의 비결은 계속해서 많은 사람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거리를 쥐여줬다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살아 있고,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어떤 형태에서든 변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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