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SNS에 이탈리아 사진을 올렸어요. 밀란, 피렌체 일정을 마치고 이곳 파리에 왔다고요
생각해 보니 웃음이 나네요. 기차를 타고 밀란에서 피렌체로 이동하는 여정이 꽤 험난했어요. 우리 일행의 짐 가방이 열 개가 넘었거든요. 다같이 짊어지고 챙기는데 로드 무비 같았어요.
파리에서 새로웠던 경험도 있나요? 영화 같은 순간이나
이제는 그런 게 별로 없다고 해야 할까요? 대부분 경험했던 거라.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닥쳐도 담담하게 느껴지고 그렇네요. 왜냐면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걸어오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통해 어떻게든 해결된다, 일희일비할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어느 정도 알게 됐거든요.
예전 인터뷰에도 쓴 적 있지만 배두나라는 이름에는 ‘도전적인’ ‘모험적인’ ‘남다른’ 같은 단어가 툭툭 떠올라요
〈센스8〉을 찍던 당시에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암스테르담에서 촬영 도중 한국에 잠깐 들렸는데 다시 돌아가는 비행기 티켓이 취소된 거예요. 이튿날 아침 일찍 촬영장으로 가야 해서 정말 난감했지,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탔지, 그랬더니 제일 먼저 촬영장에 도착한 거 있죠. 헛웃음이 나왔던 기억이 나요.
“제 팬들은 저와 좀 비슷해요. 약간 숫기는 없지만 썩 괜찮은 사람들이죠.”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배두나가 생각하는 지금의 배두나는 어떤 사람이에요
20대 언저리나 지금이나 천성이 변하지 않은 것 같긴 해요. 숫기는 없지만 괜찮은 사람. 여전히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저는 사람의 기본적인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물론 노력으로 바뀌는 부분이 있거나 새로운 룰이 더해질 수는 있겠지만.
그래서, 본래의 기질에 더해진 게 있나요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에게 좀 더 나이스해지려고 마음먹게 됐어요. 남을 배려하지만 어디까지나 내가 상처받지 않는 선에서 말이죠. 언젠가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나를 몹시 아프게 하면서까지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게 맞을까? 스스로를 먼저 살피고 지키는 것도 중요하구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누가 봐도 아닌 건 아니라고, 그러려고 노력해요.
자신에게서 끝까지 남았으면 하는 건
음, 곤조 같은 게 있어요. 본능적인 선택이나 직관적으로 ‘이거다’ 싶으면 아무리 주변에서 아니라 해도 끈을 놓지 않는 편이에요. 일하거나 사람을 사귈 때 종종 그래요. 결과적으로 그런 근성이 나다운 색깔을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반대로 물어볼게요. 죽어도 하기 싫거나 안 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수용 가능하지만 한국을 벗어나 다른 나라에서 쭉 사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내 삶의 뿌리는 한국에 있어야 하는 거죠. 오랫동안 해외 활동을 하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난 한국인이고, 한국영화를 계속 찍을 수 있어야 어떤 실험이나 모험도 가능할 것 같더라고요. 갑자기 이곳 생활을 접고 다른 나라에서 남은 평생을 보낸다? 꿈도 못 꿔요.
배우 배두나에 대해서는 어떤 점을 좋아하나요
제 연기요(웃음). 연기는 취향일 수 있잖아요. 제 특질이나 성향이 연기 스타일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데 그런 점이 좋게 느껴져요. 그러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작품 속에서 실재하는 사람처럼 보여지는 것. 그래서 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만드는 연기. 관객으로서 이런 연기를 좋아해요. 제가 추구하는 연기도 그래요. 크게 뭘 하지 않고도 진심을 전하는 데 중점을 두는 편이에요. 말없이 눈빛으로, 몸짓으로. 그런 부분 때문에 언어에 개의치 않고 외국에서 일찍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그 말은 연기에 대한 방향성을 찾는 단계는 이미 넘어섰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해요
고민은 끝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제 연기에는 특화된 부분 같은 게 있는데 작품마다 장르가 다양하고 요구하는 연기도 다 다르잖아요. 전천후 연기를 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어떻게 해야 작품에 잘 녹아들 수 있을지 그에 대한 고민이 늘 있어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달까, 스스로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더 농익으려면 인간 배두나가 한 번쯤 세상 풍파를 겪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나 자신이 지겨워요(웃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만 작위적으로는 안 되는 부분이거든요. 그래서 내 상상을 벗어난 경험을 아주 크게 맛보고 엄청나게 아픈 상태가 돼야 또 한 번 새로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또 한 번’이라는 말이 탁 걸리네요.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20대를 돌아보면 고민과 갈등투성이였어요. 모델과 음악방송 MC를 하던 내가 완전히 방향을 틀어 연기에 도전하면서 이게 맞는 선택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거든요. 딜레마에 빠지는 날도 있었고요. 해외 활동에 겁 없이 도전했을 때도 물음표가 많았죠. 30대 중반까지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가 돼서야 비로소 보이더라고요. 잘한 선택이었고 고민을 거듭한 순간이 좋은 자양분이 됐다고 나한테 말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러면서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구나, 용감하게 살 수 있는 힘이 좀 더 커졌어요.
그럼에도 지금 두렵거나 불안한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그냥, 대단히 겁나는 건 없어요. 내일 당장 생을 마감해도 두렵지 않은 것 같아요. 앞서 얘기한 삶의 태도와 맞닿은 이야기인데 마인드도 바뀌었어요. 내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라요. 미래에 대한 복잡한 감정 없이 눈 딱 감고 현재에 집중하자, 그랬어요. 생각하기 나름이잖아요.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할 수 있을 때 후회 없이 하는 거예요.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요
이 정도면 좋은 인생이구나, 그렇게 느껴요. 멋지다고 해야 설명이 되는 삶인 거죠. 그러다 보니 매사에 감사하게 돼요.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고, 두려운 것도 없고. 물 흐르듯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곧 〈가족계획〉이 공개돼요. 이 작품은 배두나의 남다른 안목을 어떻게 무장해제시켰나요
코미디 진짜 좋아해요. 어려운 장르라는 것도 알고요. 〈킹덤〉 〈고요의 바다〉 〈브로커〉 〈다음 소희〉까지 무겁고 어두운 작품을 연달아 하면서 저한테 보상해 주고 싶었어요. 코미디 작품을 오래 기다렸죠. 그러다 〈가족계획〉을 만났어요. 특수한 능력을 가진 다섯 명이 가족으로 위장해 악당을 처단한다는 이야기인데, 대본에서 읽힌 첫인상이 블랙 코미디였어요. 대놓고 웃기는 게 아니라 상황의 기저에 웃음을 유발하는 식으로. 판타지 같은 면도 있고요. 그런데 내 상상이 너무 컸나 봐요. 막상 촬영하고 보니 비주얼도 그렇고 마냥 가벼운 작품만은 아니더라고요.
종잡을 수 없는 묘사가 흥미로운데 그 안에서 어떤 얼굴의 배두나가 자리하고 있나요
내가 연기한 ‘한영수’는 기억을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능력자로 성격이 무심하고 담담해요. 감독님 디렉션에 따라 연기했는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얼굴은 관객들이 익숙할 것 같고, 의외의 면도 있어요. 영수는 좋은 엄마와는 거리가 먼 인물인데 애를 써요. 좋은 엄마가 되려고. 가족이 된 아이들에겐 쩔쩔매죠. 그런 모습이 귀엽게 보일 것 같아요.
당분간 〈가족계획〉 때문에 지겹게 들을 질문이겠지만, 평범하지 않은 능력 같은 게 있다면요
백은하 작가님이 쓴 〈배우 배두나〉에도 소개된 이야기에요. 뇌파 검사를 했더니 공감능력은 남보다 뛰어나지 않지만 상상력에 특화됐다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활자를 인식하면 상상을 관장하는 전두엽이 보통 사람보다 빠르고 활발하게 활성화된다고 하더라고요. 그 얘기를 듣고 신기했어요. 과학적으로 나와 연기는 합이 잘 맞구나 싶었죠(웃음).
그럼 너무 궁금해서 대뜸 챗GPT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면
MZ세대를 대할 때 유의해야 하는 게 뭔지 궁금해요. 이제 현장에서 한참 어린 배우들이 나랑 대화하면 부담스러울까 봐, 밥 먹자고 하면 불편해하는 거 아닌가, 눈치를 봐요. 왜냐면 그때의 내가 그랬거든요. 숫기가 없어 말을 안 걸면 먼저 말하지 않았고, 누가 나한테 말을 붙이지 않는 게 편했어요. 지금 젊은 친구들도 내가 불편하지 않을까, 자꾸 신경 쓰여요.
그거 알아요? MZ세대들이 핀터레스트를 통해 배두나의 스타일을 무드 보드로 공유하고 있다는 거
그렇다면서요. 왜 그런지 궁금해요. 사실 전 패션을 잘 몰라요. 트렌드를 콕 집어 말해주지도 못해요. 뭐랄까, 내 기분을 위해 입는 거예요. 그런 거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보든 그냥 즐기고 많이 입고. 그게 전부인데 스타일에 관한 질문을 자꾸 받으니까 이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패션이 나를 좋아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웬만한 옷들이 다 편하고 잘 어울릴 수 있겠어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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