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터 북스에 있어 책은 아티스트와 저자, 디자이너, 인쇄소 등 모든 참여자가 하나의 장면을 연출하는 공방이고, 각 페이지는 협업이 만든 생생한 흔적으로 채워진다. 책을 사랑하는 마르쿠스 드레센(Markus Dreßen), 아네 쾨니히(Anne Ko..nig), 얀 벤첼(Jan Wenzel)이 일궈낸 이 출판사는 예술·정치·사회 등을 동시에 다루는 다학제적 접근을 실험 중이다. 스펙터 북스의 책은 창조적 탐구와 이론, 시대의 울림을 담아내며 독자에게 깊이 있는 담론을 던진다.
‘스펙터 북스’라는 이름에 웃지 못할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고
사실 그 이름은 철자가 잘못됐다. 원래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 공산주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라는 구절에 나오는 유령(Spectre)으로 지으려 했다. 이 인용구를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철자가 잘못돼 ‘스펙터(Spector)’가 됐다. 우연히 만들어진 이름이지만 지금은 출판사의 모든 책을 대변하는 단어가 됐다.
세 창립자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나
2001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모든 것이 이뤄졌다. 얀 벤첼과 마르쿠스 드레센은 당시 라이프치히 현대미술관 창립자인 클라우스 베르너(Klaus Werner)가 이끌던 학생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처음 만났다. 마르쿠스는 미술학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얀은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했다. 두 사람은 이 프로젝트에서 아티스트 이리야 카바코프(Ilya Kabakov)와 설치미술 작업을 진행하면서 그 작품을 책으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얀이 글을 쓰고, 마르쿠스가 디자인을 맡아 첫 출간물을 완성했다. 스펙터 북스를 설립하기 전이었지만 그때 이미 출판 여정이 시작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스펙터 북스를 설립했고, 나도 합류했다.
스펙터 북스에서 당신과 얀, 마르쿠스가 맡은 역할은
얀 벤첼은 기획·편집·제작 전반을 담당하고, 인쇄소와 소통하며 모든 출판 제작을 감독한다. 마르쿠스 드레센은 그래픽 디자이너, 나는 편집장을 맡고 있고 출판물의 유통을 담당한다. 나와 얀은 틈틈이 책을 쓰기도 한다.
설립 당시 영어와 독일어로 된 예술 잡지 〈스펙터 컷+페이스트〉를 발행했다
2001년, 출판사를 설립할 때 책 출간이 목표는 아니었다. 〈스펙터 컷+페이스트 Spector Cut+Paste〉는 공연, 사진, 영화, 건축, 연극, 음악 등 예술 전반을 다룬 잡지였다. 잡지를 만들 수 있으면 책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2008년 첫 책 〈릴레이팅 라디오 Relating Radio〉를 냈다. 라디오 매체를 다룬 일종의 독본이었다.
스펙터 북스의 스펙트럼이 넓다. 예술과 이론,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주제와 관점을 포용하는 작업을 고집하는 이유는
책을 기획하면서 특정 프로젝트가 우리 관심사와 일치할 때 가장 큰 흥미를 느낀다. 우리의 관심사는 사진이나 현대미술 등 예술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분야가 얽힐 때 더 매력을 느낀다.
예술가뿐 아니라 학자와 연구자에게도 매력적일 것 같다. 다학제적 접근을 대변하는 책 한 권을 추천한다면
〈Seven Palms〉는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 로스앤젤레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지냈던 집을 다뤘다. 사진작가 세바스티안 슈툼프(Sebastian Stumpf)가 토마스 만이 유럽으로 돌아가고 나서 방치되다시피 한 1950년대 이후의 집을 찍은 자료가 있다고 먼저 우리에게 제안해 왔다. 우리는 그 사진을 보고 이 집에 대한 글을 써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작가 프란치스 네니크(Francis Nenik)에게 요청했다. 닉은 그 집의 역사와 광범위한 아카이브 연구를 바탕으로 토마스 만의 가족과 생활에서 나온 여러 일화, 거기서 일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묘사한 에세이를 썼다. 그렇게 세바스티안 슈툼프가 찍은 사진은 프란치스 네니크의 글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독자는 사진을 보고, 글을 읽으면서 그 집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할 수 있었다.
반대로 사회와 정치에 관한 주제를 다룰 때 독자가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는지 궁금하다
몇 년 전 출간한 〈텐 시티스 Ten Cities〉를 예로 들면 이 책은 나이로비, 카이로, 키이우, 요하네스버그 등 10개 도시의 클럽 문화와 음악 역사를 다뤘다. 흔히 북대서양 지역을 중심으로 클럽 문화를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다른 지역의 폭넓은 내러티브를 담아내고 싶었다. 이 책은 클럽을 도시 젊은이들이 다양한 삶을 실험하고 경험하는 ‘심야 실험실’로 묘사했다. 21편의 에세이, 플레이리스트, 사진을 통해 코로나19가 전 세계 창의적 공동체들에 영향을 미치기 전의 도시 서브컬처를 그렸다. 단순히 음악과 밤에 대한 책이 아니라 대도시의 음악과 사회상을 깊이 있게 다룬 것이다. 클럽이 있는 도시 환경까지 상세하게 묘사하면서 더 넓은 관점에서 음악을 통한 정치적·문화적 변화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가능했다.
스펙터 북스가 출판한 책 중에서 몇몇은 의미 있는 상을 수상했다. 최근 톰 홀러트(Tom Holert)의 〈ca. 1972〉가 라이프치히 도서전에서 논픽션상을 받았다. 이 책이 현대 독자에게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킨 것 같나
스펙터 북스의 가장 큰 특징은 텍스트와 이미지, 디자인이 한 페이지에서 유기적으로 호응한다는 점이다. 이는 독서 방향을 순차적 움직임에서 순환형 움직임으로 바꾸고, 이로 인해 독자는 능동적으로 각 요소를 연결시키며 책을 해석하게 된다. 우리는 이런 방식이 매우 현대적인 독서 형태라고 생각한다.
책을 ‘생산적 교류의 무대’로 삼아 콘텐츠와 디자인, 물질성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관심사는 다양한 곳으로 향한다. 문학과 건축, 공연예술, 디자인 역사, 사진집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가 스펙터 북스의 출판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 각 프로젝트를 다룰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특정한 내용을 어떻게 책으로 풀어낼 것인가?’다. 책이란 그 자체로 독특한 표현방식을 필요로 하니까. 그래서 한 권 한 권 만들 때마다 늘 새로운 도전과 마주한다.
스펙터 북스가 추구하는 출판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점은 오늘날 책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다. 책은 단순한 아이디어의 그릇이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가 어우러져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하나의 공간이다. 게다가 요즘은 책을 읽고 소장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어서 책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많다. 최근 몇 달 동안 판매량이 줄면서 출판 활동에도 영향을 받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여러 출판사와 이야기를 나눠보니 예술 서적에 대한 관심이 예전만 못한 것 같더라.
그래서 ‘하루 한 권의 책이 출판계를 지킵니다!’라는 캠페인을 시작한 건가
요즘 사람들은 온종일 넷플릭스를 보면서도 독서에 시간을 잘 쓰지 않는다. 우리는 인스타그램(@spectorbooks)을 통해 지금까지 출간된 책을 소개하며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 책들이 잊히기 쉽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책 제작뿐 아니라 책에 대한 접근성에 기반한 도서 문화라는 개념에 관심이 많다. 책은 손에서 손으로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접근성이다.
책 만드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게 만드는 원동력은
책에 대한 애정이다. 스펙터 북스가 만든 책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실 온갖 종류의 책을 읽고 탐구하는 걸 좋아한다. 책을 읽는 건 참 흥미진진한 일이다. 무엇보다 책은 지속 가능한 매체다. 디지털 세계는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데이터가 손실될 수 있지만, 인쇄된 책은 100년이고 남을 수 있으니 묵묵한 측면이 있다.
예술적 표현과 지적 깊이를 중시하는 출판사로서 독자에게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키길 바라나
스펙터 북스를 사랑하는 독자들은 디자인의 비주얼만큼이나 종이 질감에도 관심 있는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다. 독서는 세상과 연결되기 위한 지적 활동이다. 우리 독자들은 책 그 자체로 하나의 대상일 때, 즉 자체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가진 콘텐츠일 때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다. 오랜 시간 의미 있는 책을 만들어내는 출판업자로서 그 내용과 형식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기억에 남는 책을 만들고 싶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