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살에 데뷔한 국민 남동생,
인기 절정에 떠난 이유
4살 때 아역 배우로 데뷔해 1970년대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김정훈. ‘꼬마 신랑’ 시리즈와 100만 관객을 동원한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그를 단숨에 스타로 만들었다.
당시 그는 지금의 톱배우들처럼 대본이 끊이지 않았고 한 달에 열 작품을 소화할 만큼 바쁜 일정을 보냈다.
영화 한 편에 20만 원을 받던 시절, 집 한 채 값이 100만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는 한 달에 집 한 채를 벌어들인 셈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는 남모를 고민이 있었다. “내 시간이 전혀 없었다”는 그는 끝없는 촬영과 일정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결국 김정훈은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지기를 선택했다.
갑작스러운 이민과 떠도는 사망설
쉴 틈 없이 바쁜 나날 속에서 결국 그는 모든 작품을 거절하고 대만으로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떠났더니 사망설까지 돌았다”는 그는 배신감과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이민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대만에서 10년간 생활한 그는 결혼 후 미얀마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계획했다. 하지만 미얀마에서도 심근경색으로 두 차례 큰 위기를 겪으며 삶의 고비를 넘어야 했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 바이오 사업을 시작하려던 그의 계획은 코로나19와 미얀마 쿠데타로 인해 무산됐다. 김정훈은 “미얀마에서 이 사업을 하려 했지만 여건상 더 이상 할 수 없게 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치매 노모를 모시는 삶
현재 김정훈은 한국에서 바이오 관련 사업에 종사하며 부모님을 돌보고 있다. 그는 “어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시고, 아버지는 낙상 사고로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라고 털어놨다.
김정훈은 부모님을 위해 두 동생과 함께 요양보호사 자격증까지 취득하며 가족을 직접 돌보고 있다고 전했다. 반면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여전히 미얀마에 머물고 있다고.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혼자 한국에 남았다”는 그는 가족과 떨어져 있는 현실에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정훈의 이야기를 접한 누리꾼들은 “꼬마 신랑 정말 귀여웠는데”, “고생 많이 하셨네요. 가족들과 건강하시길”, “가족을 위해 자격증도 따시다니 효자시네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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