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말랑말랑해지는 두 남녀의 로맨스, 언뜻 보기에 비정상적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삶, 깊은 상처 위에 연고를 발라주듯 어루만지는 따스함까지. 유쾌하고 몽글몽글하기도 하지만 그 안에는 뾰족한 시선이 담겨있다.
지난 29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극본 박은영)는 이 같은 감성을 극대화한 작품으로 보인다. ‘트렁크’는 기간제 결혼 매칭 회사 NM(New Marriage) 소속 직원인 노인지(서현진)가 다섯 번째 남편 한정원(공유)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작품 공개 이후 기간제 결혼이라는 설정, 캐릭터, 트라우마와 집착 등 소재와 내러티브를 둘러싸고 시청자들의 호불호가 엇갈리고 있다.
시리즈는 1996년 KBS 22기 공채 프로듀서로 입사한 뒤 2003년 KBS 1TV 드라마 ‘노란손수건’으로 연출 데뷔한 김규태 감독의 신작이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트렁크’를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소개하며 “본질적인 것에 대한 분석과 탐구를 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고독한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지점을 고민했다고 밝혔다.
사실 그는 전작들에서 역시 ‘외로운 사람들’을 반복해서 그려왔다. 가슴 깊숙한 곳에 상흔이 남은 인물들의 감정적 파동을 섬세하게 연출해온 그의 작품 5편을 꼽아 새롭게 소개한다.
# ‘그들이 사는 세상'(2008년 / 16부작 / 방영: KBS / 다시 보기 : KBS, 쿠팡플레이)
송혜교와 현빈이 주연한 드라마. 노희경 작가와 처음으로 협업한 작품이다. 드라마 ‘풀하우스’, ‘넌 내게 반했어’, ‘프로듀사’의 표민수 감독과 공동연출했다. 방송사 드라마국 사람들의 삶과 사랑, 동료애를 그린 이애기.
드라마 PD 정지오(현빈)가 연출하던 드라마가 사고로 인해 재촬영을 하게 되면서 주준영(송혜교)과 다시 한번 얽히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주인공은 대학교 선후배 사이로, 잠시 불같은 연애를 하기도 했다. 지금은 방송국 동료로 티격태격하는 중이다.
두 사람의 맹렬한 사랑과 더불어 각자의 포지션에서 한 편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치열한 열정도 담고 있다. 비록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은 7.7%(닐슨코리아)에 그쳤지만, 여전히 회자되면서 ‘사람냄새’ 나는 노희경 작가의 매력이 담긴 작품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 ‘그 겨울, 바람이 분다'(2013년 / 16부작 / 방영: SBS / 다시 보기 : SBS, 넷플릭스, 웨이브)
‘그 겨울, 바람이 분다’는 남들에게 보일까 상처를 꽁꽁 감추고 숨기기 위해 날서있고 뒤틀린 두 남녀가 마음의 거대한 벽을 부수고 치유해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PL그룹의 상속녀 오영(송혜교)이 세상에 맞서 홀로 외롭게 싸워가는 동안 어린 시절 떠나버린 친오빠와 이름이 같은 오수(조인성)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어딘가 기댈 곳 없이 외딴 섬처럼 떠있던 오영은 친오빠인 줄 아는 오수와 아슬아슬한 감정을 넘나든다. 오수 역시 늘 쫓기던 삶을 살았던 과거와 달리 자그마한 희망을 보게 된다.
김규태 감독은 시각장애를 지닌 오영이 보는 세상의 시선을 시청자들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포커스 아웃이나 빛 번짐 등 기법을 활용했다. 두 사람의 가슴 시린 사랑에 걸맞은 눈이 내리는 겨울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 ‘괜찮아, 사랑이야'(2014년 / 14부작 / 방영: SBS / 다시 보기 : SBS, 티빙, U+모바일tv, 시리즈온, 웨이브)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이라는 틀 안에서 살짝 벗어난, 무언가 삐죽삐죽 튀어나온 마음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인기 추리소설 작가 장재열(조인성)과 대학병원 정신과 의사 지해수(공효진)의 이야기.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두 남녀, 하지만 이들 모두 가슴 한켠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드라마는 이들의 이야기를 무겁고 어둡고 진지하게 다루기보다는, 통통 튀는 분위기로 그려낸다. 각자의 삐뚤빼뚤한 삶을 애써 고치려고 하기보다는, 늦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들여다보길 기다려준다. “우리 모두, 환자다. 감기를 앓듯 마음의 병은 수시로 온다. 그걸 인정하고 서로가 아프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라는 대사처럼.
연인이 된 해수와 재열이 서로에게 호스로 물을 뿌리는 장면을 멀리서 본다면 그들은 영락없이 해맑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마음 속에 하나씩 각자의 아픔들을 감춰두고 이를 언제든 물로 씻겨내려버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김규태 감독은 ‘셰어하우스’라는 내밀한 공간 안에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들을 그렸다.
#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2016년 / 20부작 / 방영: SBS / 다시 보기 : SBS, U+모바일tv, 시리즈온, 웨이브, 넷플릭스, 웨이브)
‘달의 연인-보보경심 려’에는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다.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석고대죄하는 해수(아이유)에게 4황자 왕소(이준기)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자신이 입은 도포자락을 펼쳐 비를 막아주는 장면. 김규태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단순한 사랑 서사가 아닌 외면과 내면의 상처로 인해 제대로 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했던 소년이 21세기에서 넘어온 고하진/해수로 인해 자신의 한쪽 면을 덮고 있던 가면을 벗어가는 이야기이다.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태조 왕건의 아들인 왕소가 아픈 상처를 딛고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극중 왕소는 영화 ‘오페라의 유령’ 속 팬텀처럼 한쪽 눈에 가면을 착용한다. 왕소의 ‘흉터’는 재생되지 않고 그대로 감춰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해수가 멈춰있던 시간에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넌 이 흉측한 얼굴이 아무렇지 않은 거냐”는 왕소의 말에 해수는 “겨우 한 뼘이네요. 이 한 뼘 때문에 긴 인생이 어두운건 좀 억울하네요”라며 그의 흉터를 어루만져준다.
김규태 감독은 몸과 마음에 생채기와 흉터가 생긴 인물들, 자신만의 터널 안에 갇히지 않고 밖으로 나와 햇볕을 내리쬐기를, 서로에게 우산이 되어줄 수 있는 관계를 그려냈다.
# ‘우리들의 블루스'(2022년 / 20부작 / 방영: tvN / 다시 보기 : 넷플릭스, 티빙, U+모바일tv, 시리즈온)
블루스(Blues). 1860년대 미국 남부의 노동요와 영가에 뿌리를 둔, 18세기 노예제도와 인종차별로 억압받던 흑인들의 애환을 담은 장르로 받아들여지며 다소 우울하고 슬픈 가사가 많았다. 이를 두고 극본을 쓴 노희경 자가는 “아픈 사람들이 아프지 않으려고 부른 노래들이 너무 좋았다”고 말한 바 있다.
김규태 감독이 ‘그들이 사는 세상’, ‘빠담빠담…그와 그녀의 심장박동 소리’, ‘그 겨울, 바람이 분다’, ‘괜찮아, 사랑이야’, ‘라이브’에 이어 노 작가와 6번째 협업한 작품이다. 제주를 배경으로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마을 사람들이 때로 허허실실대며, 또 때로는 극단의 갈등으로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았다. 다운증후군을 지닌 언니가 있는 영옥(한지민)과 그의 연인이 되는 정준(김우빈), 오랜 친구 사이이자 앙숙인 인권(박지환)과 호식(최영준), 그들의 자식인 정현(배현성)과 영주(노윤서)의 사랑, 동석(이병헌)과 어머니 옥동(김혜자)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던 엉켜버린 매듭까지. 늘 괜찮아보였지만, 들여다보면 그들은 각자 상처를 안고 산다.
선아(신민아)의 에피소드에서 김규태 감독은 ‘블루스’라는 드라마의 제목처럼 푸른빛을 활용한 연출 솜씨를 내보인다. 우울증에 걸려 남편과 이혼하고 양육권까지 뺏길 위기에 놓인 선아의 모습을 늘 몸이 축 젖은 느낌과 밤이 지속되는 시각적인 장면으로 묘사한다. 제주도 앞바다의 푸른빛과 대비시키는데, 집에서 벗어나 제주도에 도착한 선아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 변하는지를 단계별로 쌓아나간다.
또 동석과 그의 엄마 옥동의 에피소드도 김규태 감독의 연출력이 빛난 장면 중 하나다. 늘 엄마를 원망하면서 살아왔던 동석이 엄마 옥동이 말기 암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함께 떠난 여행에서 눈 덮인 산을 함께 오르며 발을 맞추는 장면과, 상태가 악화되어 홀로 올라간 동석이 백록담 영상을 찍어온 장면, 아침부터 아들을 위해 분주하게 된장찌개를 끓여주던 옥동이 잠시 눈을 붙인다며 그대로 세상을 떠난 것을 확인한 동석이 오열하는 장면들은 아직까지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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