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영화에서 ‘가족’을 타이틀로 내건 작품들이 연이어 공개되고 있다. 그런데 혼인 관계의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된 ‘일반적인’ 가족에 주목한 작품들이 아니다. 피를 나누지 않았지만 가족으로 뭉친 관계에 주목한다. 다른 처지와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형성한 이들의 기막힌 이야기들이다. 1인 가구 증가와 낮은 출산율, 이혼 등 가족의 소멸과 해체, 재혼과 입양 등 가족 구성원이 다변화되고 있는 현시대를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최근 종영한 JTBC ‘조립식 가족'(극본 홍시영·연출 김승호)과 지난달 29일 공개한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가족계획'(극본 김정민·연출 김곡 김선) 그리고 11일 개봉하는 영화 ‘대가족'(연출 양우석·제작 게니우스)은 다양한 가족의 모습을 조명하며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그동안 가족의 이야기는 드라마와 영화의 단골 소재로 꾸준히 이어졌지만, 최근 공개된 작품들은 결혼과 혈연으로 묶인 전통적인 가족의 의미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제시하면서 차별성을 갖는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적극 수용하는 드라마와 영화의 시도는 급변하는 시대상과 맞닿아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1인 가구 비율은 35.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반면 18세 미만 자녀를 보유한 가구는 줄어드는 추세다. 이처럼 점점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의 관계가 사라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가족의 모델을 담은 작품들이 주목받고 있다.
‘조립식 가족’은 성(姓)이 모두 다른 세 청년인 김산하(황인엽) 윤주원(정채연) 강해준(배현성)이 각자의 상처를 보듬으며 가족처럼 10대 시절을 보낸 이야기다. 윗집 아랫집 이웃으로 처음 만난 김대욱(최무성)과 윤정재(최원영)의 보호 아래 이들은 한 식탁에서 매일 같이 밥을 나눠 먹고 정겨운 대화를 나누며 가족의 모습으로 나아간다.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의지하며 10년을 지낸 세 아이는 성인이 된 뒤에도 가족의 울타리에서 정과 사랑을 나누고 상처를 보듬는다.
드라마는 ‘성’이 다른 사람들을 가족으로 인정하지 않는 편견의 시선도 다뤘다. 극중 윤주원이 ‘성이 다른 가족’과 관련한 핀잔을 들은 뒤 내뱉은 “서류상 가족이 뭐가 중요해요? 서로 가족이라 생각하면 가족이지. 재혼해서 새로 생긴 형제는요? 입양아면요? 이래저래 피 안 섞인 가족들도 많잖아요!”라는 대사는 ‘조립식 가족’이 내놓는 ‘진정한 가족이 무엇인지’에 질문의 대답으로 읽힌다.
주연으로 열연한 황인엽과 정채연은 ‘조립식 가족’을 소화하면서 개인이 지닌 ‘가족관’도 달라졌다고 밝혔다. 황인엽은 “가족은 서로에게 울타리와 기둥이 되어주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며 믿어주고 안아주는 관계라고 생각한다”며 “이번 드라마를 통해 꼭 부모, 자식으로 이뤄진 관계가 아니라도 그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채연 또한 이번 작품을 통해 “피가 섞이지 않아도 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며 “(현실에도)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관계가 있다. 드라마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의 모습이 묘사돼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 ‘가족계획’의 출발…학대받는 아이들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
‘가족계획’은 상대의 기억을 자유자재로 지배하는 초능력자 한영수(배두나)와 어딘가 허술한 인간 병기 백철희(류승범)가 각자의 정체를 숨기고 부부로 위장해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을 응징하는 이야기다. 영수와 철희의 자녀인 지훈(로몬)과 지우(이수현) 그리고 이들의 할아버지 강성(백윤식)은 진짜 가족이 아니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가족으로 위장한 특수 능력자들로 약자를 괴롭히는 악당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쳤다. 처음엔 ‘가짜 가족’으로 삐걱대지만 위기를 함께 극복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진짜 가족’으로 나아간다.
극본을 쓴 김정민 작가는 “언젠가부터 부모라는 이름으로 학대하고 방임하는 끔찍한 사건을 보면서 ‘그 아이들에게 가족은 어떤 의미일까’에서 생각했다”며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서로 이해해 보려고 애쓰다 보면 그게 진짜 가족이 아닌가 하는 생각했다”고 ‘가족계획’의 출발을 밝혔다.
영수는 과거 특수 교육대에서 만난 갓난아기인 지훈과 지우에게 애착을 느끼고 철희와 함께 기관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가족계획’은 가족을 지키는 일에 집착하는 영수와 그가 지키는 가족들을 통해 혈연으로 얽히지 않은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비춘다. 이를 통해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백윤식은 드라마 제작발표회에서 극중 대사인 ‘오늘이 어제보다 더 가족 같아지지 않았니?’라는 말을 꺼낸 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운명적인 가족이 진정한 가족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았다“고 작품의 핵심 주제를 설명했다.
● 양우석 감독의 질문…’가족에 대하여’
가족의 의미를 곱씹게 하는 영화도 관객을 찾아온다. 배우 김윤석과 이승기가 주연한 ‘대가족’은 하나뿐인 자식 문석(이승기)이 승려가 되면서 집안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어 걱정인 함무옥(김윤석)에게 뜬금없이 손주 두명이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코미디 영화다. 한국전쟁 때 월남해 자수성가한 무옥은 30년 넘게 만둣국집 평만옥을 운영하며 남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인물. 승려가 된 아들 때문에 가문의 대가 끊기게 된 상황에 걱정이 크지만, 과거 문석이 기증한 정자로 태어난 어린 남매가 만나면서 인생의 행복을 맛본다.
‘대가족’은 손주라면서 갑자기 찾아온 어린 남매의 등장을 계기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생긴 갈등으로 단절된 무옥과 문석의 관계를 비춘다. 꼭 혈연 관계가 아니더라도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가족이 되어 가는 이야기인 ‘조립식 가족’ ‘가족계획’과 달리 전통적인 의미의 가족 관계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지금 필요한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다.
무옥을 찾아온 어린 남매의 사정은 딱하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이들의 존재를 통해 ‘핏줄’에 집착하고 대를 잇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무옥은 ‘가족이 무엇인지’ 무거운 질문을 받는다.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제목인 ‘대가족’의 ‘대’는 크다는 의미의 ‘큰 대'(大)가 아닌 마주하다는 의미의 ‘대할 대'(對)가 쓰였다. 때문에 영화의 영제 역시 ‘어바웃 패밀리'(About Family)이다.
‘변호인’과 ‘강철비’까지 주로 묵직한 주제를 다룬 영화를 연출한 양우석 감독은 가족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보인 이유에 대해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가 가족이라고 생각했다“며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족의 형태, 의미, 관계가 굉장히 많이 변했는데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시대에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이 화목하기 위해 우리 모두가 애써야 한다는 고민으로 이번 영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아들에게는 차갑지만 손주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운 할아버지로 돌아온 김윤석은 “결핍이 많은 함무옥을 통해 우리의 못난 모습, 약한 모습을 투영하고 싶었다”며 “그런 못난 모습까지 보듬어 안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피가 통하지 않아도 결국은 서로를 가족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바람을 영화를 통해 잘 전달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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