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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취하고, 음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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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굴

찬바람이 볼을 때리면 비로소 통영이 그립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생각나는 해산물, 바로 굴 때문이다. 차가운 바다에서 맑고 단단하게 자란 굴은 겨울철이 되면 살이 꽉 차 감칠맛이 두드러진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바다 향과 짭조름한 소금기, 달콤함보다 달큰함에 가까운 풍미. 통영 굴은 유독 달고 부드럽다. 먹는 방법은 다양하다. 찜통에 쪄낸 굴, 노릇하게 부친 굴전, 뜨끈한 굴국밥까지. 그중에서도 좋아하는 것은 생굴이다. 청양고추를 어슷 썰어 통깨를 뿌린 생굴은 매콤하면서도 은은한 단맛을 남긴다. 어울리는 술은 단연 소주. 바다 향과 잘 어우러지고 굴의 비린 맛을 깔끔하게 씻어준다. 한 잔이면 차디찬 몸은 절로 뜨끈해진다. 외국에서 굴은 귀한 식재료다. 지난해 영국 스코틀랜드에 가서 굴을 먹었다. 사방에 깊고 푸른 바다가 펼쳐진 섬의 굴은 육질이 단단하고 바다 향이 강했다. 이곳에선 굴을 최대한 간소하게 즐긴다. 접시에 껍데기째 나온 굴에 레몬즙을 뿌려 먹거나, 식초로 만든 드레싱 비네그레트를 곁들인다.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훈연 향이 있는 ‘피트 위스키’를 굴에 뿌려 먹는 것이다. ‘위스키 섬’으로 유명한 아일라 섬의 굴과 피트 위스키의 페어링은 많은 애주가의 인생 버킷 리스트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젓가락으로 가득 집어 입에 넣던 통영 굴이 떠올랐다. 날이 점점 추워지고, 겨울은 늘 그렇듯 매서울 것이다. 겨울의 굴맛 덕분에 그럭저럭 계절을 버틴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손을 호호 불고 있으면 입 모양으로 ‘굴’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래, 올해도 통영에 가야겠다. 박준하(작가, 〈취할 준비〉 저자)

카르니타스 타코와 마르가리타

여름엔 겨울이 좋고 겨울엔 여름이 좋다. 앙리 루소의 그림을 좋아한다. 본 적도 없으면서 라이트 형제의 복엽기를 그림에 등장시킨 허세가 마음에 든다. 이런 식이니 마르가리타에 타코 먹는 걸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겨울 멕시코에 가본 적은 없지만 한반도보다 따뜻할 거라는 상상에 빠져 소금을 핥으며 마시는 마음은 이미 멕시코에 가 있다. 역사적으로 마르가리타의 기원이 멕시코인지, 미국 캘리포니아 또는 텍사스인지는 불분명하다. 과학적으로 술을 음식과 먹는 행위 자체가 섬세한 맛 감별 차원에서 불필요한 일이다. 그냥 술만 마시는 게 술맛을 온전히 즐기기에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음식 속의 단백질이나 지방 입자가 술의 향미 성분과 결합하면 휘발이 어려워지고, 그로 인해 온전히 냄새를 맡기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상념에 빠질 이유가 없다. 값비싼 와인이나 위스키도 아니고 마르가리타 칵테일이니까. 제대로 빚은 질 좋은 테킬라라면 라임즙도 소금도 필요없겠지만, 마르가리타에 사용되는 테킬라는 100% 아가베가 아니라 믹스토이다. 아가베 이외의 재료에서 얻은 당이 최대 49%까지 들어가도 괜찮다는 얘기다. 음식과 함께 마시기 딱 좋은 술이다. 멕시코 현지식으로 구운 쇠고기에 고수와 라임, 살사 로하를 얹은 타코든, 텍스멕스식으로 사워크림을 듬뿍 얹은 타코든 괜찮다. 어차피 집에서 못 만들어 먹는 건 마찬가지.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가게 테이블까지 가서 마르가리타에 먹어야 따뜻한 나라의 상상 속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한 입 먹고 알베르 카뮈를 흉내 내면 나만의 허세가 완성된다. “겨울에도 내 마음엔 꺾이지 않는 여름이 숨어 있다.” 정재훈(약사, 푸드 라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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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 커피

겨울은 아이리시 커피 한 잔과 함께 온다. 일본 홋카이도 북쪽 끝 ‘리시리(利尻)’라는 섬에 여행 간 적 있다. 3월 말이었지만 눈도 녹지 않는 영하의 추위가 계속됐다. 추위를 피해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가장 눈에 띈 메뉴는 바로 아이리시 커피. 색 바랜 테이블, 무늬 하나 없는 새하얀 커피잔과 받침대, 상처가 많은 스푼, 야구 중계를 보는 마스터, 담배 피우며 신문 읽는 할아버지, 쨍쨍한 겨울 햇빛···. 여러 가지 풍경이 얽혀 마음을 뭉근하게 만들었다. 아이리시 커피는 이름 그대로 아일랜드에서 온 위스키를 머금은 커피다. 아이리시 위스키에 커피와 설탕을 섞고 생크림을 얹어 완성하는데, 생크림 위에 시나몬 가루나 너트맥을 뿌려주면 풍미가 살아난다. 커피가 크림과 함께 입 안으로 흘러 들어갈 때 달콤쌉싸래한 맛과 어우러지는 위스키의 풍미란! 한겨울 얼어붙은 몸을 녹여주는 건 이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 다가오는 겨울을 맞아, 하염없이 떨어진 은행잎을 바스락거리며 밟다가 남대문시장에서 남산 오르는 길로 향한다. 지난여름 회사 동료들과 밥 먹고 커피 살 곳을 찾다가 발견한 새로운 카페다. 커피 맛이 좋아 종종 찾았는데, 겨울을 앞두고 새로운 메뉴가 생겼다. ‘텐스퀘어 남산’의 아이리시 커피 앞에는 ‘부쉬밀’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증류소다. “더블린에 갔었는데 제일 맛있는 아이리시 커피 만드는 데서 이걸 쓰더라고요.” 사장님의 전언을 듣고 천천히 커피를 음미한다. 처음엔 강한 커피 향이 났지만, 온도가 내려갈수록 위스키의 과일 향이 피어오른다. 길가에 떨어진 은행잎의 노란빛이 내 마음에 옮겨 붙은 것 같다. 기분 좋은 취기는 덤이다. 김대영(작가, 〈일본 위스키, 100년의 여행〉 저자)

레몬 스무디와 레몬 소금

겨울이 제철인 식재료를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만물이 태동하는 봄엔 푸른 나물이 있고, 여름엔 뜨거운 뙤약볕 아래 자란 과즙 뚝뚝 떨어지는 과일이 있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은 말해 뭐할까. 과일이든 버섯이든 곡식이든 일 년 동안 비축한 에너지를 폭발해야 할 때 아닌가. 그에 비해 겨울은 빈곤하다. 말린 시래기 등을 먹어야 하는 보릿고개가 떠오른다. 하지만 내게 겨울은 침이 고이는 계절이다. 레몬이 제철이기 때문이다. “레몬에도 제철이 있다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제주도로 향하길 권한다. 사계절 어느 때나 마트 한쪽에서 볼 수 있는 레몬은 당연히 수입산이다. 보통 한국의 정반대편에 있는 칠레에서 온 것이 많다. 값싼 레몬이 비행기를 타고 올 리는 만무하고, 배를 타고 올 수밖에 없다. 덜 익고 잔뜩 약품 처리를 한 레몬이다. 하지만 제주에서 오는 건 ‘제철’ 레몬이다. 베이킹 소다 없이 물로 헹궈 먹어도 될 것 같다. 자고로 레몬은 과육뿐 아니라 껍질에 진정한 매력이 있다. 써본 사람은 안다. 요리할 때 레몬 껍질을 조금만 넣어도 풍미가 확 달라지는 걸. 껍질의 하얀 부분에서 쓴맛이 나기 때문에 보통 껍질을 도려내지만, 나는 신선한 레몬의 쓴맛을 즐기는 편이다. 이 겨울을 잘 나기 위한 첫 번째 음식은 레몬 스무디다. 질 좋은 블렌더에 숭덩숭덩 자른 레몬을 껍질까지 넣고 얼음과 약간의 시럽을 함께 갈아 먹는다. 제철을 맞아 한껏 물오른 새콤달콤함과 사각사각한 얼음의 만남은 추위나 건조함을 잊게 만든다. 건강한 기운을 품은 레몬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일부는 레몬 소금을 만드는 데 쓴다. 비율은 레몬 3, 소금 1. 잘 소독한 병에 레몬과 소금을 켜켜이 쌓아 3개월 정도 숙성하면 된다. 숙성한 레몬 소금을 곱게 갈아 고기에 찍어 먹거나 여러 생선 요리에 쓰면 좋다.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바야흐로 레몬의 계절이다. 진민섭(요리사, 〈오늘 이 계절을 사랑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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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 라자냐와 파스타, 도멘 톨로보 쇼레이레본 와인

창문에 이슬이 잔뜩 맺혔다. 이마에도 구슬땀이 맺혔다. 라구 소스를 끓인 지 꼬박 5시간이 흘렀다. 12월이지만 보일러를 꺼야 할 정도로 집 안이 후끈후끈하다. 찬바람 불면 나는 라구 소스를 한 솥 끓인다. 그것도 스타우브에서 나오는 가장 큰 전골냄비에 가득 끓인다. 인덕션에서 오븐, 오븐에서 인덕션으로 옮길 때마다 무거워 앓는 소리를 낸다. 이유는 연말이라서. 집에 누군가를 초대하거나 초대받을 일이 많다. 손님이 오면 넓적한 탈리아텔레 면을 삶아 그 위에 소스를 뿌린다. 힘들어도 막상 해놓으면 며칠이고 손쉽게 상을 차릴 수 있다. 손님들의 만족도도 높다. 이처럼 진한 라구 소스는 돈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고기를 3kg이나 넣고, 닭 육수도 치킨스톡 대신 백숙용 닭을 사용하고, 장장 5시간을 볶고 끓인다. 남의 집에 갈 땐 소스를 활용해 라자냐를 만든다. 루미낙 유리용기에 담은 라자냐를 들고 초인종을 누르면 미드에서 보던 연말 파티가 생각난다며 다들 좋아한다. 치즈와 토마토, 쇠고기를 넣고 졸여 짭짭하고 콤콤하고 시고 기름진 라구 파스타를 먹으면 과실 향 풍부한 부르고뉴 레드 와인이 간절해진다. 이때 냉장고에 보관해 둔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켠다. 요리하느라 한껏 체온이 오른 몸을 차디찬 레드 와인이 타고 흐르는 느낌이 좋다. 나의 연말 라구 의식은 어느덧 6년 차를 맞았다. 올해도 먹을 수 있는지 묻는 이도 생겼다. 곁들여 마신 와인 중에 도멘 톨로보가 쇼레이레본 마을에서 생산한 피노 누아가 인상에 남아 올해도 한 병 쟁여놨다. 원래 마을 이름은 쇼레이였다. 이웃마을 ‘본’의 이름을 빌려 개명할 정도로 이 마을에서 나는 와인은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지구 온난화로 날씨가 따뜻해지며 이 지역 와인이 매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막 알려지기 시작해 가격도 합리적이다. 술자리에서 이처럼 뜻밖의 이야기가 깃든 술을 꺼내면 대화가 더욱 풍성해진다. 물론 쇼레이레본 와인이 선사하는 현란한 맛과 향을 함께 포착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이주연 (미식 칼럼니스트, 〈봄은 핑계고〉 저자)

주정 강화 와인

와인이 좋은 이유는 헤아릴 수 없지만, 굳이 꼽자면 날씨나 계절에 맞는 한 잔을 고르는 재미겠다. 도수 높은 ‘주정’을 첨가해 모든 풍미를 ‘강화’한 와인은 겨울밤과 특히 잘 어울린다. 그래서 낮보다 밤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진열장 구석에 있던 묵직한 친구들이 앞자리를 차지한다. 무거운 보디에 높은 알코올, 응축된 시간이 녹아 알아차리기 어려울 만큼 느리게 변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모은 게 벌써 여남은 병. ‘모수’의 과감한 식전주로 유명했던 주스티노스 마데이라와 ‘밍글스’의 시그너처 디저트 와인 돔 브리알 리브잘트는 오픈한 지 몇 년이 지나도 풍미가 살아 있다. 또 다른 매력은 강렬한 발향. 샴페인을 주정 강화한 라타피아 드 상파뉴는 잘 익은 무화과처럼 감미롭고, 모스카토다스티와 거의 같은 품종인 모스카텔 드 세투발은 오렌지 꽃이 흐드러진 것 같다. 볼이 넓은 잔에 따라 스월링하면 금세 건조한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럴 때면 내 방이 한껏 화려해져서 바깥이야 어떻든 상관없어진다. 잔 바닥에 남은 적은 양으로도 다음날 아침을 찬란하게 맞을 수 있다. 유난히 시리고 거친 하루 끝에는 아이스크림을 더한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엔 너티한 크림 셰리를, 초콜릿 아이스크림엔 끈적한 마르살라를 부어 먹는 식인데, 따로 맛볼 때보다 달콤함이 농밀해져 더없는 위로가 된다. 짙은 잔당감이 소테른 같은 귀부 와인이나 레이트 하비스트와는 또 다른 여운을 남긴다. 부순 잣이나 비타민 젤리를 토핑처럼 올려 새로운 식감을 즐기기도 한다. 얼마 전엔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토니 포트를 끼얹어봤다. 포트 와인의 주 소비층이던 영국의 하이 클래스가 스틸턴 블루 치즈와 곁들이는 것을 클래식 페어링이라 했다지. 어쨌든 모두 발효 식품이니까. 다음엔 보이차와 섞어보는 것도 좋겠다. 아직 시도해 볼 조합이 많다. 투 드링크 리스트(To-Drink List) 속의 와인도 무궁무진하다. 코냑을 넣은 피노 드 샤랑트, 아르마냑을 넣은 플록 드 가스코뉴, 모리 두, 바뉼스 그랑크뤼. 아직 만나본 적 없는 프랑스산 주정 강화 와인들이다. 게다가 신대륙의 실험적인 제품도 있으니 남은 겨울 내 와인 사랑은 이 계절만큼 깊어질 것이다. 와인석박사(〈뉴술레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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