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위해 힘차게 나아가는 사람의 얼굴에선 맑은 빛이 난다. 신인 배우 채서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도 빛이 났다. 계절은 겨울의 초입이지만, 채서은을 둘러싼 공기는 싱그러운 봄 내음을 풍기는 듯했다. 재수 끝에 대학교에 들어가기까지 과정을 이야기할 땐 “드라마 같은 입시 스토리”라면서 한껏 신이 나 목소리를 높였고, 주연을 맡은 영화 ‘문을 여는 법’이 극장에서 개봉해 관객과 만나고 있는 현재의 마음을 꺼낼 땐 그의 말에서 단단한 각오와 책임감이 느껴졌다.
채서은은 지난 2020년 tvN 드라마 ‘철인왕후’로 데뷔한 신인 연기자다. 대학(한예종)에서 연기를 전공하면서 다양한 독립, 단편영화를 두루 섭렵하고 실전의 경험을 익힌 그는 ‘철인왕후’를 시작으로 JTBC 드라마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과 ‘하이쿠키’ 등으로 경력을 쌓아가고 있다. 지난 20일 개봉한 ‘문을 여는 법'(감독 박지완 허지예·제작 길스토리이엔티·KB국민은행)은 채서은이 한 걸음 도약한 작품. 성장의 과정에서 의미있는 영화를 만나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설레고 기대했지만 막상 극장에서 개봉하니 여러 부분에서 부담을 느낀다”고 말하는 채서은을 지난 21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났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영화 관람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있다는 그는 “개봉을 하고 보니 설렘을 넘어 약간의 욕심이 생긴다”며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 요즘 자주 떠오른다”고도 했다.
채서은은 올해 4월 ‘문을 여는 법’의 시나리오를 받고 영화를 공동 연출한 두 명의 감독과 만났다. 당시 대학의 마지막 학년을 보내는 중이었고, 마침 졸업공연에 몰두하던 때였다. 아크로바틱부터 텀블링까지 격한 동작을 섞은 공연에 온통 집중해 있었고, 같은 시기 계속 도전하는 드라마 오디션에서 줄줄이 고배를 마시는 바람에 의욕이 조금씩 흔들릴 때였다고 했다. 한마디로 ‘몸’도, ‘마음’도, 자친 상태에서 그의 손에 ‘문을 여는 법’의 시나리오가 주어졌다.
영화는 만 18세가 되면 머물던 보육원 등 돌봄 시설에서 나와 자립해야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다. 최근 자립준비청년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그 존재를 전면에 다룬 작품이다. 주제가 분명한 만큼, 캠페인 성격의 영화일 거라고 예상했다면 틀렸다. ‘문을 여는 법’은 어렵게 마련한 집이 한순간에 사라지자 충격과 혼란에 빠진 주인공 하늘이 판타지의 세계에 접어들어 겪는 드라마틱한 모험을 그린다. 하늘이 된 채서은은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열고 신비로운 세계로 들어간다.
“시나리오를 읽는 데 눈물이 났어요. 지금도 다시 보면 눈물이 나요. 무작정 ‘모두 힘내자’고 말하는 영화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면서 서서히 위로를 주는 이야기로 다가왔거든요. 마침 저도 많이 지친 상태였기에 큰 위로를 받았어요. 촬영을 돌이킨다면, 아직 많은 작품을 해보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잊지 못할 최고의 현장이었어요.”
● “동정이나 연민의 시선 아닌, 그 자체의 위로”
채서은은 ‘문을 여는 법’을 준비하면서 오래 지내던 울타리를 벗어나 혼자 살아갈 준비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느낄 막막함에 대해 생각했다. 그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시선에서 물러나,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도록 응원하는 영화의 목소리에 먼저 공감한 건 다름 아닌 채서은이었다. 러닝타임 30분으로 이뤄진 단편영화이지만 촬영을 앞두고 하늘의 마음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수차례 대본 리딩을 반복했다. 영화의 기획과 제작을 맡은 배우 김남길부터 하늘에 새 집을 소개하는 부동산 중개인으로 출연한 개성 넘치는 배우 심소영, 하늘에게 과도한 업무를 시키는 세차장 사장 역의 고규필과 사전에 만나 호흡을 맞추는 과정도 거쳤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하늘이를 그 자체의 존재로 바라보는 이야기가 좋았다”는 채서은은 하늘를 통해 미처 놓치고 살아간 부분에 대해서도 자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자립준비청년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도 새삼 느꼈다. 그 과정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말하고, 드러나지 않는 상대의 상황과 감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보는 ‘눈’을 키우고 있다.
“사랑에도 ‘이성’과 ‘동성’이 있잖아요. 요즘 주변에서는 ‘남자친구 있어? 여자친구 있어?’라는 물음보다는 ‘연인 있어?’라고 묻는 분위기도 있어요. 다양한 가치를 수용하려는 거죠. 상대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고요. ‘문을 여는 법’도 마찬가지에요. 저에게는 말이든 행동이든 한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로 남았어요.”
영화에서 하늘은 통장에 든 1000만원을 갖고 “햇빛이 들어오는 방”을 얻어 처음으로 나만의 집을 꾸민다.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하늘을 보고 “똘똘하다”고 말하고, 어릴 때 친구인 철수(김남길)는 “단단하다”고 이야기한다. “연기를 할 때 제가 맡은 역할에 대해 상대방이 어떤 말을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캐릭터의 힌트를 얻는다”는 채서은은 “똘똘하고 단단하다는 말을 통해 하늘이 몇년동안 자립하기 위해 혼자만의 준비를 해왔다고 상상했다”고 돌이켰다. 영화가 끝나고도 계속될 하늘의 삶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어떤 공격에도 굴하지 않는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 모습”이 채서은이 상상하는 지금 하늘의 모습이다.
실제 채서은도 하늘처럼 배우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분투를 거듭했다. 오디션에 떨어질 때마다 “떨어트릴 텐데 왜 나를 보고 웃어줬을까” 싶은 원망 아닌 원망도 생긴다며 웃어 보이는 그는 “인생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뼈아픈 경험도 쌓아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주저앉지 않는다. 특유의 유쾌하고 밝은 성향도 있지만, 배우가 되기 위해 모든 걸 걸었던 19살과 20살의 시간을 돌이키면 좌절할 시간이 없다고 했다.
● ‘드라마 같은’ 대학 합격자 발표날의 추억
채서은이 처음 연기에 관심을 둔 건 중학생 때였다. “친구가 전부이던” 그 때,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소외되는 경험으로 상처를 입은 그의 마음을 위로해준 존재가 드라마 ‘글리’였다. 따돌림 등으로 상처입은 10대들이 뮤지컬 동아리를 만들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상처를 털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꿈을 위해 나아가는 고교생들의 당찬 이야기가 중학생인 채서은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드는 연출자가 되고 싶었다.
“고등학교에서 만난 공부 잘하는 친구가 자기도 PD가 되고 싶다면서 지금보다 더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엄두가 안났어요.(웃음) 제가 할머니랑 같이 살아서 어릴 때부터 드라마를 엄청 많이 봤거든요. 할머니랑 서로 배우들에 대한 평가도 많이 했고요. 그런 마음이 쌓여 고등학교 3학년 때 터닝포인트가 됐고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죠.”
마음먹는다고 전부 이뤄지는 건 아니다. 채서은은 연기 전공을 목표로 입시학원에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지만 한번에 합격하지 못했다. 이후 1년을 다시 쏟아부은 재수의 과정은 “내가 얼마나 연기가 하고 싶은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학원을 오가면서 하루 24시간의 대부분을 연기 수업에 몰두한 재수생 시절, 그는 배우 수현이 JTBC 프로그램 ‘말하는 대로’에 출연해 풀어낸 이야기를 보고 큰 힘과 위로를 얻었다고 했다.
당시 수현은 마블 스튜디오의 영화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 캐스팅돼 한국 배우로는 처음 마블 시리즈 출연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었다. 하지만 수현 역시 모델로 데뷔해 배우로 성장하기까지 숱한 어려움을 겪었다. ‘어벤져스’의 오디션에 응시하라는 제안을 받은 당시 쟁쟁한 배우들이 모두 도전장을 내민 상태였기에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부딪혀보자’는 마음으로 도전한 끝에 당당히 역할을 따냈다는 이야기가 채서은을 울렸다.
채서은은 “버스에서 수현 선배님의 이야기를 보고 펑펑 울었다”며 “당시 한예종에 지원해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어서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때”라고 돌이켰다. 입시 이야기 나오자, 그의 말은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합격자 발표날 벌어진 일은 한편의 드라마 같다”며 신나게 당시 상황을 풀어냈다. 채서은은 흡사 연극 무대에 오른 듯, 그날의 상황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글로는 담을 수 없는 생동하는 에너지가 그에게서 넘쳐흘렀다.
재수 끝에 도전한 한예종에서 1차 합격 소식을 접하고 2차 시험에 응시한 날, 채서은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지내던 11명의 지원자들과 시험 후기를 공유하다가, 면접관들이 자신에게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물이 핑 돌았다. 재수를 하는 1년동안 자주 한예종을 찾아 학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공연을 관람한 채서은은 아직 입학하지도 않은 캠퍼스와 단단히 정이 들었다. 2차 시험 이후 ‘불합격’을 예감한 그는 혼자 다시 캠퍼스를 찾아 혼자만의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2호선 지하철 안. 마침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내부는 사람들로 붐볐다. 그때 같이 2차 시험에 지원한 친구들이 모인 휴대전화 단체 대화방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최종 합격자가 발표됐기 때문. 대화방에 있는 한 명씩 결과를 말하기 시작했다. 모두 불합격! 위로와 탄식으로 대화방이 또 술렁였다. 아직 결과를 모르는 단 한 명, 채서은만 남았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불합격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던 채서은은 고집스럽게 합격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하필 휴대전화 배터리의 용량마저 ‘잔여 3%’를 가리키고 있었다. ‘빨리 확인하라’는 친구들과 학원 선생님의 원성이 이어졌다. 그 순간 배터리 아웃! 안절부절하다 눈물이 터진 채서은은 그 순간, 맞은 편에 앉은 한 여성 승객과 눈이 딱 마주쳤다. 눈물 콧물 범벅인 채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언니…저 재수생인데요. 오늘 합격자 발표날인데… 지금 친구들이 다 떨어졌어요. 저만 확인하면 되는데 배터리가 없어요. 저 떨어졌을 것 같은데, 휴대전화로 한 번 확인해주시면 안돼요? 흑!”
당시 상황을 재연하듯 묘사하던 채서은은 “주변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면서 확인한 발표 창에서 ‘최종합격’ 네 글짜를 확인했다”고 돌이켰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주머니가 등을 두드려줬고, 지나가던 할아버지는 대견하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울며불며 합격자 확인을 하던 채서은에게 지하철 승객들의 시선이 전부 쏠려 있었다. 휴대전화를 빌려준 여성 승객은 심지어 눈물까지 흘렸다.
“제가 더 놀라서 ‘언니는 왜 울여요?’ 물었더니 그분도 재수를 해서 제 마음을 알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로 언니와 가끔 연락을 주고 받았어요. 1월1일에는 제가 케익 선물도 보냈고요.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는 그 순간 저는 마치 ‘2호선 돌아이’ 같았지만(웃음) 많은 분들의 응원의 힘을 느꼈답니다.”
18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간 순간부터 지금까지 채서은의 목표는 단 하나, “졸업”이다. 재학 도중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드라마와 영화에도 꾸준히 참여하고 있지만 “반드시 졸업한다”는 다짐과 각오를 잃지 않고 최근 졸업시험까지 무사히 마쳤다. 드디어 내년 2월이면 학사모를 쓴다.
“대학에 들어가니 또 다른 시작이었어요. 연기를 하면서 많이 힘든 시기도 있었어요. 어떤 때는 연기가 연애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얼마 전 3개월을 쏟아서 참여한 오디션에서 최종 떨어졌어요. 그 때 오래 연애한 사람과 헤어지는 기분처럼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제가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뭘 더 채워야 하는지 늘 고민하고 있어요.”
자신감을 갖고 연기하는 날들을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다는 채서은은 “살아보지 않은 시대, 상상 속의 세상을 그리워한다”고 했다. 일제강점기나 1970~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소화하고 싶다는 꿈고 품고 있다. “영화 ‘쎄시봉’이나 ‘클래식’ ‘써니’ 같은 작품을 정말 좋아해요. 저는 아날로그가 좋아요. 카카오톡이 없어서 소중하게 약속을 정하고 그날만 기다리면서 지내는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당차게 날아오르는 채서은의 앞날이 궁금한 이유는 누구보다 연기에 품은 단단한 꿈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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