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다.’
한 고등학교의 쓰레기통에서 이런 문구가 적힌 유서 형식의 종이가 발견된다. 대입시험을 얼마 안 남긴 시점, 학교 측은 종이의 주인을 찾아 일을 마무리하길 바란다. 하지만 문구를 유심히 바라보던 정 선생(노진업)의 얼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배어있다. 집으로 돌아간 정 선생은 상자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던 빛바랜 일기장 한 권을 꺼내든다. 그 속에는 꾹꾹 눌러 담은 글씨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고 빠르게 잊힐 것이다’는 문장이 적혀 있다.
탁역겸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인 ‘연소일기’는 정 선생의 시선으로 과거를 돌아보는 구조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나는 쓸모 없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은 정 선생의 현재와 과거를 팽팽하게 잇는 연결고리다. 기억의 모퉁이에는 두 소년, 형인 10살 요우제(황재락)와 동생인 9살 요우쥔(하백염)이 있다.
언제나 주목받는 동생 곁에서 요우제는 위축되고 눈치 보기 일쑤다. 학교 성적은 미달돼 유급이 확정됐고, 동생과 똑같이 피아노를 배우지만 진도를 빠르게 따라가지 못한다. 부모는 ‘남들보다 뛰어나다’는 뜻을 담아 지어준 이름의 요우제가 늘 자신들이 정한 기준선에서 미끄러지는 것이 못마땅하다. 남들 앞에서 요우쥔은 자랑스러운 자식이지만, 요우제는 내놓기 부끄러운 자식이 된다. 요우제가 지닌 고유의 개성은 인정받지 못한 채 규격화한 틀 안에서 잘 해내야만 한다.
부모가 정한 테두리에서 빗겨난 요우제가 집 안에서 맘 놓고 발을 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다.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부모의 시선에서 요우제는 늘 부족하다. 권위적인 아버지는 체벌로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가하고, 어머니는 문제의 원인을 모두 요우제로 지목한다. 부부싸움의 이유도, 불행한 이유도 모두 요우제 탓이다. 요우쥔은 형의 문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린다.
요우제가 위로를 받을 곳은 ‘해적 이야기’ 만화책과 피아노를 가르치는 천 선생님, 옥상이라는 탁 트인 공간이 전부다. 하지만 이마저도 요우제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힘내! 언젠가는 네가 바라던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한 만화가는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는 요우제를 깊이 공감해 주던 천 선생을 해고하며, 남들에게 못하던 말들을 소리치던 옥상이란 공간은 ‘왜 위험한 공간에 동생과 함께 갔느냐’는 엄마의 말로써 본래의 의미를 잃는다.
그나마 요우제가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수단은 공책 한 권이다. “일기야, 안녕? 내 이름은 정요우제야” 일기장은 요우제의 유일한 친구이자 소통의 창구가 되어준다. 앞서 요우제가 일기를 쓰는 이유는 아버지와 지인의 대화 속에서 홍콩대를 간 자식이 일기를 열심히 썼다는 말에서 시작됐지만, 이제 일기는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다.
영화는 과거의 아물지 못한 상처를 봉합하고, 현재를 마주 보며 진정한 어른이 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정 선생은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린 과거의 상처로 인해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텅 비어있는 상태다. 학교에서는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어주고 싶지만 방법을 모르고, 이혼한 아내에게는 상처를 터놓을 방법을 알지 못한다.
후반부에 다다라 감독은 정 선생이 지닌 마음의 구멍이 무엇이었는지 털어놓는다. 요우제의 시선으로 따라가던 영화는 프레임 뒤편 요위쥔의 시선과 중첩시키며 과거에 바로잡지 못했던 사건의 진실을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먹먹함을 안기는 동시에 ‘어쩌면 홀로 남겨졌던 소년에게 필요했던 것은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누군가가 아니었을까’라는 대답 없는 질문을 남긴다.
감독 : 탁역겸 / 출연 : 노진업, 황재락, 하백염 외 / 수입 및 배급 : ㈜누리픽쳐스 / 장르 : 드라마 / 개봉 : 11월13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 95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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