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AI를 주제로 열린 ‘서울디자인2024’의 주제 전시 작가로 선정돼 DDP에서 신작 ‘라이트 아키텍처(Light Architecture)’를 선보였다. 작품을 통해 AI에 관해 어떤 화두를 던졌나
오늘날 대다수 AI 관련 아트워크는 AI 기술로 생성된 결과물에 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AI가 만드는 것들이 내겐 그리 흥미롭지 않다. 사실 놀랄 일도 아니다. 인간이 제공한 데이터로 인간에게 최적화된 결과물을 만들도록 설계됐기에 사람처럼 이야기하는 건 당연하다. AI 구조를 극도로 단순화하면 입력값이 ‘아키텍처(AI 시스템 구성 방식과 작동 원리를 정의하는 구조)’를 거쳐 출력값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내부 작동 원리를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복잡성과 불투명성 때문에 AI 아키텍처는 흔히 ‘블랙박스’로 불린다. 인간이 설계했지만 점점 해석하기 어려워지고, 결국 인류를 초월할 거라는 두려움도 담겨 있다. 이 블랙박스 이야기를 대중과 나누고 싶었다.
넓은 홀에 원형으로 배치된 기둥에서 빛이 여러 갈래로 나오며 그물망을 형성하더라
아키텍처의 형상화다. 아키텍처는 인간의 뇌를 모방해 ‘뉴럴 네트워크’ 형태로 설계되곤 하는데, 유형이 무척 다양하다. 챗GPT가 사용하는 아키텍처는 ‘트랜스포머’로, 현재로선 가장 진보한 모델이다. 하지만 AI 창시자이자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한 과학자 제프리 힌턴(Geoffrey Hinton)마저 앞으로 어떤 아키텍처가 나올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아키텍처냐에 따라 AI가 초지능이 될 수도, 그로 인해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인간 친화적인 아키텍처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고. 결국 현재 AI가 어떤 성과를 내는지 말하는 건 그다지 유의미하지 않고, 핵심은 이 아키텍처에 있다. 이에 가상의 AI 아키텍처를 그린다는 개념으로 작품을 구상했다. 여기서 관객은 하나의 데이터 조각이다. 입구에서 홀의 중심으로 향하면서 관객이 블랙박스로 들어가는 듯한 경험을 의도했다. 도열된 기둥에서 한꺼번에 ‘팡’ 하고 빛이 나오면 하나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기둥이 회전하고 빛을 켜고 끄며 다양한 조합을 만들어낸다.
천장에 매달린 큐브를 향해 비춘 영상엔 건축물과 인간, 식물을 연상케 하는 생명체, 폭발 장면 등이 차례대로 등장한다
영상 후반부에서 인간은 데이터 조각처럼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큰 폭발이 일어나는데, 내가 생각하는 특이점(Singularity)의 순간이다. 인류의 종말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번 작품에선 암전 상태와 모든 빛이 한꺼번에 켜지는 순간이 반복되는데, 이는 AI가 우리에게 빛(Lightness)이 될지 어둠(Darkness)이 될지를 뜻한다. 인류와 AI의 공진화에 대한 고민의 촉발점을 설정하고 싶었다.
작품에 AI 기술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진 않았다
비주얼라이징 단계에서 시도는 해봤지만 결국 마음에 들지 않아 폐기했다. 개인적으로 AI에 관심이 많아도 작품에 사용하는 건 조심스럽다. AI의 태생적 문제점인 왜곡(Distortion)과 환각(Hallucination;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정보나 사실을 생성하는 현상) 때문이다. AI에 선덕여왕을 그린 이미지를 요구하면 웬 중국풍의 옷을 입은 여자를 보여준다. 신라시대에 대한 데이터가 없기 때문이다. 아티스트라면 AI를 사용하는 이유 또는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분명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강이연에 관한 의외의 사실 하나는 학부 시절 서양화를 전공했다는 점이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전환한 계기는
어린 시절 한국에서 미술을 배운 덕에 그리는 능력은 탁월했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니 스킬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더라. 자신감을 잃고 회화와 멀어지던 때, 비디오 영상 수업을 들었다. 그림 한 장으로 모든 걸 승부하지 않아도 될뿐더러 현실에서 구현하기 어려운 걸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됐다. 작품에 시간성이 깃들고 공간도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어서 유학을 떠나 미디어 아티스트의 길을 걷게 됐다.
당신의 주무기는 프로젝션 매핑이다. 작업방식으로서 어떤 점이 매력적인가
UCLA 석사 시절 프로젝션 매핑을 시도하며 ‘비트윈(Between)’이라는 시리즈를 만들었다. 흰 방 안에 큰 캔버스를 여러 개 세운 다음, 사람이 흰색 천을 뚫고 나오려는 모습을 찍은 영상을 캔버스에 맞게 투사한 작업이다. 관객에게 실제와 가상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순간을 선사할 수 있었다. 또 프로젝션 매핑의 물질감이 좋았다. 흔히 디지털은 만질 수 없으니 물성이 없다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고 누군가 늦게 들어가면 그의 모습이 스크린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나. 물질성이 도드라지는 순간이다. 여러 프로젝터를 서로 다른 방향에서 동시에 틀면 오직 빛만으로 물체와 공간을 빚을 수 있다. 여기에 실제 공간까지 활용할 수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시카고의 대규모 상업 건물 ‘더 머천다이즈 마트(The Merchandise Mart)’, 서울의 DDP 외벽에도 작품을 선보였다. 대규모 공간을 대상으로 한 작업은 더 정교한 기술이 요구될 것 같다
DDP의 경우 기술 팀과 함께 그 말도 안 되는 곡면을 미터 단위로 나눠 평면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 다음 프로젝터 몇 대를 동원해야 해당 면적을 커버할 수 있는지, 어두운 부분은 어떻게 보완할지 등을 가늠했다. 여기에 음향은 어떻게 할지, 전기는 어디서 끌어올지, 정전 시 대책까지 고려했다. 작가이지만 실제로 하는 일은 디렉터에 가깝다.
공공장소의 경우 작품을 시연할 수 없어 더욱 어려울 텐데
그래서 비주얼 제작이나 현장 설치뿐 아니라 시뮬레이션 단계에서도 소프트웨어를 엄청나게 쓴다. 제작과 시뮬레이션, 실제 결과물은 모두 긴밀하게 얽혀 있어 변수가 하나라도 생기면 작품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을 이해하고 컨트롤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기술 팀과 자주 싸운다(웃음). 그들 입장에서는 ‘왜 작가가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냐’ 싶은 거다. 하지만 내 작업이니 어쩔 수 없다. 스스로도 ‘컨트롤 프리크(Control Freak)’임을 부정하지 않는다(웃음).
과정을 들어보니 각종 프로그램을 익혀야 하는 노력도 상당할 듯싶다
파인 아트와 마찬가지로 미디어 아티스트 역시 끊임없이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연마해야 한다. 같은 소프트웨어라도 경력이나 실력에 따라 퀄리티 차이가 크게 나고, 무엇보다 나만의 랭귀지(프로그래밍 언어)를 찾는 과정이 복잡다단하다. 선 하나에 따라 회화의 느낌이 달라지듯 손끝에 닿는 마우스를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온다. 더 많이 공부하고, 사용하고, 심지어 디버깅(오류나 문제를 찾아 수정하는 것)까지 해봐야 비로소 내 작업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미디어 아트는 단순히 테크니션을 고용해 만들면 된다는 인식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다.
2015년엔 한국인 최초로 V&A 뮤지엄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돼 작품이 소장되는 성과까지 이뤘다. 전 세계의 주요 건축물과 조각 작품을 석고 주조물(캐스트)로 재현하고, 복제한 ‘캐스트 코트(Cast Courts)’ 공간에 복제 가능한 디지털 이미지를 입히는 작업이었다. 구체적인 소장 형태와 방식은 어떤가
작품의 온전한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최종 영상과 사운드 파일뿐 아니라 드로잉과 목업, 여러 디지털 파일(제작 과정에서 만들어진)이 패키지로 아카이빙됐다. “이연, 네 작품이 모조품이 아닌 실제 공간에 펼쳐져도 의미가 있을까?” 당시 큐레이터가 던진 질문이 기억에 남는다. V&A처럼 세계적 수준의 뮤지엄은 작품의 가치를 100년 후, 작가도 죽고 사용한 하드웨어도 단종되는 경우까지 고려한다. 이 모두를 논의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내게도 큰 배움이 됐다.
이후 구글과 나사, BTS, 각종 럭셔리 브랜드와 협업하며 미디어 아티스트로서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이유를 생각해 본 적 있는지
전통적 예술 범주에서 새로운 아트에 대한 정의가 확장되면서 협업을 선호하는 아티스트상도 달라지는 것 같다. 자신의 철학을 고유한 언어로 풀어낼 수 있고, 작업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기업과 잘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사람을 필요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감사하게도 이런 융복합적인 면을 좋게 봐준 것 같다.
강이연의 여러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은 기후 위기, 지속 가능성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나는 영국에 살고 있었다. 주요 프로젝트가 모두 취소되고 셧다운으로 일상이 마비됐으며, 장소 특정적 작업을 하는 나는 한순간에 실직자나 다름없는 처지에 놓였다. 깊은 침체를 겪다 보니 이 모든 것을 초래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러다 〈네이처〉 논문에서 ‘앤트로포즈(Antropause; 인간 활동이 일시적으로 멈춰 자연 생태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현상)’라는 용어를 발견했다. 그때부터 휴먼과 논휴먼(Non-Human)에 관심을 가졌다. 나는 액티비스트가 아니지만,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인류는 정말 망할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논휴먼에는 테크놀로지도 포함된다. 인간과 자연, 테크놀로지, 이 삼각관계가 미래를 결정할 거라고 본다. 이 가운데 내 작품이 잠시 멈춰 생각하는 시간이 돼주기를 바랄 뿐이다.
원하는 곳 어디서든 작품을 선보일 수 있다면
사막이나 물속 같은 대자연을 생각해 본 적 있다. 작업 중 발생하는 폐기물을 생각해 최소한의 제작을 지향하는데, 내 작업은 어쩔 수 없이 전기를 많이 소모한다. 그래서 자연을 배경으로 전기 사용을 최소화하는 작업, 탄소 대신 수소 에너지를 사용한 미디어 아트 작업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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