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개봉한 청펀펀 감독의 대만 청춘 로맨스 영화 ‘청설’이 한국판 리메이크작으로 관객과 만난다. 한국판 ‘청설’은 배우 홍경, 노윤서, 김민주가 주연해 오는 11월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청설'(감독 조선호·제작 무비락)은 청각장애를 지닌 동생 가을(김민주)을 챙기는 언니 여름(노윤서)을 보고 사랑에 빠져버린 용준(홍경)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말이 아닌 수어로 대화하는 두 청춘의 모습은 풋풋하면서도 청량함이 감돈다. 청각장애를 지닌 수영선수 언니를 챙기는 동생 양양(진의함)에게 첫눈에 반한 티엔커(펑위옌)의 이야기로 그린 대만 원작과 달리 한국판은 자매 관계를 반대로 풀어낸다.
이처럼 최근 대만 청춘 로맨스 영화를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청설’에 이어 2012년 국내 개봉해 인기를 모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와 2008년 개봉작 ‘말할 수 없는 비밀’도 한국적 정서를 담아 같은 제목의 리메이크작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한국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감독 조영명)는 17살이 된 커징텅(가진동)이 학교 최고의 모범생인 션자이(천옌시)에게 푹 빠지게 되면서 갖게 되는 아련함의 정서를 담은 청춘 로맨스물을 원작 삼았다. 그룹 B1A4의 진영과 트와이스 다현이 주연해 2000년대를 배경으로 15년에 걸친 첫사랑의 흔적을 묘사한다.
강렬한 피아노 배틀 장면으로 기억되는 주걸륜 주연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역시 고교생들의 이야기. 하지만 한국영화는 이와 다르게 대학 캠퍼스로 배경을 옮아간다. 피아노 천재인 음대생 유준(도경수)과 정아(원진아)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하는 청춘 로맨스를 그린다.
영화는 아니지만, 지난해 넷플릭스가 공개한 전여빈, 안효섭, 강훈 주연 시리즈 ‘너의 시간 속으로'(감독 김진원)도 2019년 대만의 TV드라마 ‘상견니'(감독 황천인)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원작 ‘상견니’는 한국에서 ‘상친자'(상견니에 미친 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정도로 팬덤을 쌓았고, 주연 배우 가가연과 허광한, 시백우는 2023년 개봉한 영화 ‘상견니’의 홍보를 위해 한국을 찾아 관객을 만나기도 했다.
● 사라진 청춘 로맨스 영화 빈 자리 채운다
보기만 해도 청량하고 풋풋한 대만 로맨스 영화의 리메이크작은 2000년대 초중반을 전후한 시기에 관객의 인기를 끌었지만 이제 자취를 감춘 한국 청춘 로맨스 영화의 ‘대체재’로 받아들여진다.
장윤현 감독의 1997년 데뷔작 ‘접속’을 비롯해 이현승 감독의 ‘시월애'(2000년),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2001년) 등 정통 멜로영화의 시대를 지나온 한국영화는 2001년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를 시작으로 2003년 김경형 감독의 ‘동갑내기 과외하기’, 2005년 한재림 감독의 ‘연애의 목적’ 등 로맨스 영화로 전통을 이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같은 감성의 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일부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관객의 큰 호응을 얻지 못한 한국 청춘 로맨스 영화는 2010년대 이후 늘어난 누아르나 범죄 스릴러 등 굵은 장르 영화에 자리를 빼앗겼다.
이런 시점에 대만영화인 ‘상견니’ ‘청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말할 수 없는 비밀’ 등을 리메이크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윤성은 영화평론가는 “사실 한국영화는 2010년대 이후 로맨스보다는 다른 장르 영화들이 더 많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다”며 “한국에서 대만영화를 리메이크하는 현상은 아무래도 첫사랑이나 순수한 사랑 영화를 우리 배우들의 연기로 보고 싶다는 욕구에서 비롯된”고 분석했다. 그는 “현실을 기반으로 한 로맨스물이 많은 한국과 달리 ‘말할 수 없는 비밀’, ‘상견니’ 같은 대만영화는 판타지가 강조됐고 그런 부분이 순수하고 낭만적으로 표현된다”고 설명했다.
앞서 ‘나의 소녀시대’ ‘안녕, 나의 소녀’ ‘청설’ ‘장난스러운 키스’ 등 대만 청춘 로맨스물을 수입·배급해온 영화사 오드의 김시내 대표는 “대만 로맨스 영화는 정서적으로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있어 이질감이 덜하다”며 “사실 ‘나의 소녀시대’의 주인공 왕대륙은 개봉 전에는 한국에서 인지도가 낮았지만, 시사회 이후 반응은 완전히 달랐다. 여성 관객이나 10~20대 등 특정 관객층을 넘어 공감할 만한 소재나 정서가 비슷해 리메이크 시도가 많이 이뤄지는 것 같다”고 밝혔다.
● “한국적 정서를 담아내는 게 중요”
리메이크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최대 관건이자 제작진의 가장 고민은 ‘어떻게 하면 원작이 지닌 감성과 정서를 해치지 않으면서 한국적 상황과 분위기, 정서에 맞도록 변형시키느냐’는 데 있다. 한국적 분위기에 맞게 극중 설정을 변형하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관객이 이질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이미 원작을 소비한 팬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넷플릭스의 ‘너의 시간 속으로’는 대만 원작인 ‘상견니’에서 고등학생인 주인공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등교하는 상황을 그대로 담아내면서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상견니’에서 과거로 돌아가는 매개가 되는 카세트 테이프 속 ‘라스트 댄스’를, ‘너의 시간 속으로’는 ‘내 눈물 모아’로 바꿔 한국적 정서와 1998년이라는 시대상에 맞는 적절한 표현이었다는 의견이 모이기도 했다.
영화 ‘청설’의 조선호 감독은 “원작을 따라가도 문제, 다르게 가더라도 문제일 수 있어 고민이 많았다”며 “원작의 순수함은 가져가되,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녹여내는 것에 염두를 뒀다”고 고민을 드러냈다.
윤성은 평론가는 “원작이 없는 오리지널 시나리오에서 시작한 것과 원작을 각색하는 것은 제작진과 배우 모두에게 상당한 부담감과 함께 리스크를 안긴다”며 “때문에 관객의 호기심이나 원작의 느낌을 어떻게 유지할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시내 대표는 “모든 리메이크작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결국 연출과 시나리오, 배우가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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