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마치 10년간 개그맨 지망생이었다. 그 길로 나아가지 않고 〈엄은향〉 채널을 만든 계기는
〈개그 콘서트〉가 폐지된 걸 핑계로 그 생활을 청산하고 싶어서 그만뒀다.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데 타이틀이 없으니까 유튜브를 시작했고. 당시 개그맨들이 유튜브로 넘어가는 건 굉장히 자연스러운 추세였기에 나도 슬쩍 발을 담갔다.
웃기는 일이 직업이라 유튜브 콘텐츠 장르와 결에 대한 고민이나 부담은 없었나
전혀. 개그맨들은 일단 해보고 망하면 쉽게 다른 거 한다. 유연함이나 순발력, 도전 정신이 기본 장착돼 있거든. 지금은 스케치 코미디가 유행하지만, 당시는 ‘깜짝카메라’ 같은 접근이 대세였기에 나도 깜짝카메라로 시작해 지금까지 왔다. 유튜브로 뭐든 겁 없이 열어볼 수 있었다. 공중파에 데뷔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안 들면 삭제하면 되니까! 개그맨으로 성공했거나 연차가 쌓였다면 부담이 됐겠지만, 새 코너를 계속 짜는 것에 익숙하고 망가지는 데 겁이 없으니 가능했던 일이다.
‘톱스타 여주가 기억을 잃었을 때 꼭 나오는 클리셰’ ‘동거생활’ ‘계약연애’ ‘혐관 로맨스’ 등 한국 드라마의 클리셰를 포착한 콘텐츠가 인기다. K드라마 찐팬이어야 가능한 구성인 것 같은데
드라마는 남들 보는 만큼 보는 대신, 한 작품을 여러 번 돌려보긴 한다. TV에서 본편 보고, 유튜브 요악본까지 계속 보다 보면 어떤 지점에서 왜 클로즈업이 들어갔는지, 굳이 배우가 말없이 상대를 응시한 이유가 무엇인지, 숨겨진 떡밥이 무엇이었는지 패턴이 읽힌다. 클리셰라는 소재는 ‘공감대 형성’이 맥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사람들 가까이에 있는, 모두의 공감 소재다.
짤막한 쇼츠에 그치지 않고, 모든 클리셰 장면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면서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된다. 1시간짜리 클리셰 물의 몰입감은 엄은향 채널만의 특별한 매력인데, 자신의 콘텐츠를 어떻게 정의하고 싶나
카테고리는 무조건 유머지만, 장르 상관없이 인간적인 소재라면 ‘오케이’다.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은 것들 말이다. 가난한 주인공은 매번 명품 옷을 입고 등장하고, 현실 직장인은 월급 300~400만 원도 수령하기에도 빡빡한데 드라마에서 직장생활은 늘 ‘유토피아’다. 그런 묘사가 웃기지 않나? 그 지점에서 클리셰가 시작된다. 한창 팬데믹 시기인데 현실에서는 모두 마스크를 끼지만 방송은 ‘코로나’라는 현실을 배제하고 아닌 것처럼 만든다. 전혀 다른 세계처럼 그려지는 게 거북할 때도 있었다. 그걸 언급해 주는 지점이자 소통하는 지점. 클리셰 콘텐츠는 웃기기 위해 만들었지만 인간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었다.
개그맨과 유튜버로서 ‘웃음’을 다루는 방식에 차이가 있다면
기술적인 부분. 개그맨일 때는 무대에서 연기하니 편집 효과를 받을 수 없다. 그 자리에서 바로 관객 반응을 살피고 직관적으로 웃음 포인트를 설명해야 한다. 하지만 유튜브 영상은 편집으로 노릴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특히 나는 크로마키를 배경으로 콘텐츠를 찍으니, 아예 실제 배경처럼 보이게 만들거나 누가 봐도 가짜여서 더 웃긴다. 요즘 개그맨들은 웬만하면 오프라인에서 촬영하는데 나는 연출적·은유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데 집중하는 것 같다.
1인 다역하며 10분 내외의 영상을 만든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매번 다른 캐릭터에 과몰입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이 있다면
연기할 때는 그냥 로봇처럼 한다. 다만 대본을 쓸 때 혼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탄다. 개그 콘텐츠에서 연기는 실제 연기와 달리 감정적으로 인물에 몰입하고 빠질 일이 아니라, 내 머릿속 기획대로 구현할 수 있을지에 관한 문제니까. 애환은 없다. 내가 기획하고 구성하고 나를 캐스팅하는 것이니, 할 줄 아는 걸로 짜고 못하는 거면 안 짠다(웃음).
대중의 공감과 비판적 요소, 재미의 경계를 오가는 일은 쉽지 않다. 스스로 철칙을 세우나
조심해야 할 항목 같은 건 없고 늘 체크하고 분석해 가며 만들지는 않는다. 개그맨으로 시작해 구독자 44만까지 오는 과정에서 체득한 동물적 감각도 있을뿐더러, 굳이 말하면 ‘진실은 그냥 진실대로 가지고 오는 것’이면 된다. 지금 풀어내는 소재가 합법적인지, 미화하는 것은 아닌지. 가끔 편향된 의견을 내세울 때도 있지만 그것이 정답일지 아닐지는 누구도 모르는 일이라면 그냥 가고, 정답이 정해진 경우, 예를 들어 ‘도둑이 잘못한 게 맞는데 사정이 있었겠지’라는 식으로 미화하는 건 경계한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내 개그를 보고 웃길 바라고 단 한 명의 불편한 사람도 없었으면 하고 바라지도 않는다. 모든 사람이 불편하지 않은 영상을 꾸준하게 만들 자신이 없을뿐더러 나는 상식적인 사람이니까 스스로를 믿고, 10년 동안 체득해 온 감을 믿는다.
당신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 부캐를 보며 ‘연기 달란트로 점점 잘생겨지고 있는 엄은향’이라고 칭찬하는 댓글이 가득하다. 점점 ‘남주’에 과몰입하고 설레기도 한다는데
원래 내 얼굴이 꽤 ‘남상’인데 캐릭터로 살릴 방법이 없었다. 그냥 친구끼리 웃었을 뿐 일로 발전시키지 못해 아쉬웠는데(웃음). 점점 남주를 연기하며 욕심이 생겼다. 좀 더 잘생기게 보이기 위해 가발도 사고 부캐를 가꿔가다 보니 어떨 때는 분장하고 크로마키 존으로 들어가면 스스로 깜짝 놀란다. ‘너무 잘생겼는데? 진짜 이런 남자 어디 없나?’ 시청자들도 똑같이 느끼니까 재밌고 뿌듯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콘텐츠는
절대 하나를 고를 수 없다. 모든 콘텐츠가 내 삶이고, 그냥 ‘나’다. 사람들이 릴스나 쇼츠를 보며 잠 못 이루듯 나는 내 콘텐츠를 보면서 그런다. 사실 다른 유튜브 콘텐츠는 잘 안 본다. 예능 프로그램도 좋아하지 않고, 그저 〈인간극장〉이나 좋아하는 드라마 요약본을 본다.
생각지도 못하게 ‘터졌다’ 싶었던 콘텐츠를 꼽는다면
구독자가 10만 미만이었을 땐 병적으로 퀄리티에 집착했다. 조회 수가 200~300회 나오면 사실상 아무도 보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데도 한 편을 만들기 위해 혼자 밤새고 고군분투하던 때가 있었다. 시작한 지 1년이 넘었는데 반응이 오지 않으니까, 내 길이 아닌 것 같고 개그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당시 전 재산 300만 원을 보증금으로 사무실을 얻었는데, 재계약하는 날까지 잘 안 되면 때려치우려 했다. 무기력한 나머지 퀄리티 같은 건 필요 없고, 내가 진짜 재미있어 하는 거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 해보자 해서 탄생한 게 ‘누진세’다. 워낙 춤추는 걸 좋아해서 당시 뉴진스 데뷔 무대를 보고 따라 췄다. 크로마키 앞에서 1분도 채 찍지 않았다. 마이크도 필요 없었고, 춤추다 머리 끈이 떨어지면 그냥 줍고. 합성도 정교하게 하지 않아서, 머리통이 초록색이다(웃음). 근데 나는 웃겼다. ‘이게 맞는 건가, 이렇게 열심히 안 하면 안 될 텐데, 있을 수 없는 일인데’ 하며 업로드했는데 2주 만에 기적적으로 댓글 1000개씩 달리고, 조회 수가 치솟았다. 회의감도 들었지만 그 계기로 좀 내려놓기도 했다. 전에는 검색어 키워드나 섬네일 제목 하나하나 고민했다면 그때부터 ‘나한테는 뭐가 재밌지? 너는 뭐가 웃겨?’ 이렇게 직관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다.
요즘 유튜브 플랫폼에는 ‘사이버 렉카’도, 이를 소비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니 어떤 형태의 스토리텔링이 있는 이야기를 전하려는 콘텐츠의 존재가 소중하게 느껴지더라. ‘재미난 콘텐츠’가 가진 힘은
재미는 양날의 검이다. 재미있는 콘텐츠는 파급력을 지녔지만 그렇기에 조심해야 된다. 렉카나 가짜 뉴스는 잘못된 정보로 누군가를 비방하지만, 또 누군가는 그게 재밌으니까 보고, 그러니 그만큼 파급력을 가진다. 하지만 재미에서는 ‘선’이 중요하고 좋은 콘텐츠는 선을 계속 지키려는 콘텐츠다. 단순히 많이 보길 바라기보다 선한 웃음을 바라는 것이다. 사실 내 꿈 중 하나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콘텐츠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다. 재미있어야 많이 볼 테니, 마음속으로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 하고 싶은 얘기를 하기 위해 ‘재미력’을 키우고 있다.
웃긴 것과 재미난 것에는 큰 격차가 있다. 요즘 이 개념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웃기는 건 쉽다. 그러나 그 웃음의 효과가 긍정적이어야 되기 때문에 콘텐츠를 만드는 게 어려운 거다. 내 목표는 봉준호다. 하고 싶은 얘기를 담으면서 스토리적 재미도 잃지 않고 대중적이기까지 한 영상을 만드니까. 재미와 웃긴 것 사이를 어중간하게 오가면 제작자의 실력이 거기까지인 거다. 스스로 그런 의심이 들지 않도록 힘을 더 쌓을 예정이다.
엄은향 스타일이라는 건 뭘까
인간적인 제작자. 현실과 동떨어지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나만 웃자고 콘텐츠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언제나 대중적이고 싶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끌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당신의 가슴을 관통한 댓글 반응이 있었나
‘B급을 가장한 A급이다’라는 말. 그간 노력을 칭찬해 주는 것 같았다. 단순히 스낵 콘텐츠가 아니라 영상 퀄리티를 위해 알게 모르게 신경 썼다는 걸 알아봐 주는구나 싶어서.
엄은향 채널 구독자들의 특성이 있다면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유튜브 성격상 가만히 있어도 일희일비할 거리가 많다. 조회 수는 즉각적으로 마음을 아프게 하고,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 조급한 성격이라 구독자 반응을 보며 그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어떤 걸 싫어하는지에 관해 평생 모르려고 한다. 내가 좋은 게 중요하다. 나조차 만족하지 못하면 제작할 가치가 없다. 그러니 앞으로도 사람들이 왜 내 영상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에 관심이 없을 거라 죄송하다.
그런 측면에서 구독자에게 미리 사과를 전한다면
하하. 콘텐츠 부분에서 그렇다는 얘기지. 구독자들은 내 생명의 은인이다. 그저 안부를 묻거나 날씨 이야기하는 댓글을 달아주는 것조차도 관심이다. 나는 그런 관심을 얻기 위한 ‘관종’이고. 관심을 얻으려고 개그맨을 시작했는데, 데뷔를 못해서 그런 관심을 받아본 적 없었다. 나는 정말 웃긴 사람인데 웃기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는 인생을 길게 살다가, 이제야 당신들을 통해 재밌는 삶을 산다.
〈엄은향〉으로 어떤 것이 전달되길 바라나
첫째도, 둘째도, 마지막도 그냥 재미. 개그에도 철학이 있고, 영화에도 메시지가 있다는데 단순 ‘재미’는 너무 가볍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일단 내 인생이 즐거운 게 첫 번째니까! 나만의 재미에 적절한 선을 겨우 찾았다. 그러니 스스로 지나치게 검열하지 말고 자신감을 갖고 나아갈 것이다.
인간적인 제작자, 그게 엄은향 스타일이다. 현실과 결코 동떨어지지 않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
「
엄은향
」
‘1인 코미디 부캐 SHOP’이라고 채널을 소개하는 ‘엄은향’은 10년간 개그맨을 꿈꿨다. 2019년 채널을 연 뒤 뉴진스 멤버 부캐 ‘누진세’로 활약하며 알고리즘의 선택을 받아 ‘떡상’한 뒤 ‘K드라마 클리셰 모음집’ 시리즈와 찐 부자의 삶, 손흥민 여친의 삶, 전국 1등의 삶 등 현실을 포착하는 참신한 부캐들을 기발하게 연기하며 사랑받는 중이다. B급을 가장한 A급 콘텐츠를 만드는 엄은향에게 경계나 기준은 없다. 그저 내가 웃기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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